소설리스트

흑검천하-244화 (244/273)

244화 되찾은 삶 (4)

“아악!”

비명을 지른 사람은 우설금이었다.

그녀는 운기하던 주석하가 갑자기 울컥 선혈을 내뱉자 깜짝 놀랐다.

사실 이상하긴 했다. 방금 주석하는 겉으로는 가부좌하고 운기에 집중하는 듯했으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주석하는 수시로 인상을 찡그렸고 계속 경련을 일으켰으며 주변으로는 기의 파동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마교칠왕과의 전투에서 내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주석하는 지금 운기하며 무언가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의 상태가 점차 심각해졌다.

우설금은 그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지 못하기에 함부로 그를 도울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석하가 선혈을 한 움큼 쏟았다. 그의 상의가 피로 물들었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하면서도 주석하는 버텨냈다. 경련을 일으키던 그의 신형이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사방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

우설금은 주석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방금 엄청난 격전이 지나갔음을 피부로 체감했다.

사실상 무림의 운명을, 그녀와 주석하의 운명을 가른 일전이었건만 그녀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지켜보는 사이 주석하의 안색이 점차 평온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운기를 마친 주석하가 마침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고 여전히 내력은 안정되지 않았다.

주석하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설금이 있었다. 회귀는 일어나지 않았다. 급격히 마음이 안정됐다.

“크윽!”

주석하가 다시 선혈을 뱉었다.

“괜찮아요?”

주석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설금이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등을 토닥였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방금…… 천마랑 내공 대결을 벌였어요.”

“네? 그게 무슨…….”

우설금은 입을 벌린 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인데 주석하의 말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갑자기 천마라니? 지금 이 순간 십만대산에 있을 천마가 왜 나온단 말인가. 그렇게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이 일전을 벌였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설금은 침착을 되찾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주석하는 대답 대신 품에서 만리안석을 꺼냈다.

“직접 확인해봐요.”

우설금도 만리안석의 특이한 능력을 안다. 예전에 주석하가 직접 입증해 보여주었으니까.

긴가민가한 상황에서 그녀는 만리안석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아쉽게도 만리안석의 푸른빛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만리안석에 천마가 나타났다.

그런데 천마의 행태가 어찌 이상했다.

천마는 천화원 바닥에 누워있었고, 그 옆에는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부산하게 떠들고 있었다.

게다가 천마는 정신을 잃은 듯 눈을 감은 상태였다. 그리고 천마의 옷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천마의 이런 모습을 우설금은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천마는 절대자였다. 누구보다 강하고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 자가 지금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다니!

만리안석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 장면이 만리안석이 만들어낸 환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설금이 그 장면을 관찰하는 사이 서서히 그 모습이 사라졌다. 만리안석의 푸른빛이 완전히 바래지며 투명하게 변했다.

그녀는 만리안석을 돌려주면서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내가 이겼어요. 천마를.”

천마가 쓰러진 모습을 봤으니 주석하가 이긴 것은 확실했다.

그동안 우설금은 천마의 무공 수위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주석하의 승리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여의신단을 복용한 후 주석하의 무공이 급격히 성장하긴 했지만 설마 천마에 비견될 정도였다니!

입을 다물지 못하는 우설금에게 미소로 화답한 주석하는 방금 벌어졌던 무한회귀공 대결을 다시 되새겼다.

회귀하면서 그가 가장 염려했던 사건이 방금 벌어졌다.

그가 우설금을 살리려고 회귀한 직후 그 사실을 인지한 천마가 십 년 전으로 회귀를 시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었다.

십 년 전으로의 회귀는 그와 우설금의 영원한 패배를 의미했고, 천마에게는 영원한 승리를 의미했기에 반드시 막아야 했다.

주석하는 회귀를 시도하면 무한회귀공을 익힌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동시에 인지한다는 현상에 착안했다.

만일 천마가 회귀를 시도하면 그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 이후부터는 회귀를 방해하면 된다. 천마가 십 년 전으로 회귀하는 것을 방해하도록 시공간을 그도 비틀면 된다. 그도 무한회귀공을 익혔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천마는 회귀를 시도했고 그는 결사적으로 막았다. 두 사람 사이에 내공 대결이 시작됐다.

이미 천마와는 한차례 싸워본 사이다.

천마의 무공이, 천마의 내공이 그와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하지만 엄밀하게 판단했을 때 주석하는 자신이 우위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임이 지금 밝혀졌다. 그는 훌륭하게 천마의 무한회귀공을 제압했다.

이로써 생각지도 못한 효과를 얻었다.

천마는 무한회귀공을 사용하여 회귀를 시도하면서 일갑자의 내공을 소모했다. 그는 천마의 무한회귀공을 방해만 했기에 일갑자를 소모하지 않았다.

설사 이전에 둘의 내공이 같았다고 해도 이제는 적어도 일갑자만큼 그가 우위에 서게 됐다. 이는 생각지도 못한 이득이었다.

그만큼 천마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고, 무한회귀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로 발전했다. 앞으로는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사용하더라도 그는 지금보다 훨씬 쉽게 천마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하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자 우설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바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돌아간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석하가 이겼다니 그것으로 만족이다.

“일단 우리는 여기를 떠나야 해요.”

주석하는 주저앉은 채 우설금에게 부탁했다. 방 안에 있는 자신의 짐을 가져오라는 뜻이다.

우설금은 떠나던 상황이었기에 챙길 것이 없었다.

그녀는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 주석하의 짐을 챙겼다. 그리고 그녀가 개어놓았던 연녹색 궁장도 머뭇거리다가 행낭에 집어넣었다.

주석하는 마음이 급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전생에서 그가 보은사를 떠날 때 무극천존과 마주쳤었다.

무극천존은 무당의 무당오행검수와 구파 장문인까지 대동하고 그를 압박했었다. 거기에 자하검존까지.

그때처럼 그의 몸이 정상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지금은 막 천마와 결전을 치른 이후라 상태가 좋지 않다. 지금 그들과 마주치면 대단히 위험하다.

우설금이 짐을 챙겨 나오자 주석하도 몸을 일으켰다.

“얼른 가죠.”

그를 부축해서 몇 걸음 옮기던 우설금은 동자승에게 전했던 서신을 떠올렸다. 주석하에게 구구절절 그리움을 표현했던, 그녀에게는 낯 뜨거운 서신이었다.

모든 삶을 포기하고 천마에게 복수하러 떠날 때는 감정에 북받쳐서 썼던 서신이지만 막상 주석하와 함께 이동하게 되자 부끄러워졌다.

그 서신을 빨리 되찾아 없애고 싶었다. 서명도 없는 서신이라지만 남이 읽을 우려도 있고. 어쩌다 주석하가 그 서신을 보게 된다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어질 것이다.

“잠깐만요.”

“왜요?”

“도, 동자승을…….”

우설금이 동자승을 찾아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됐다. 주석하도 한 사람을 발견한 순간 몸이 굳었다.

사찰 저쪽 편 담벼락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주석하에게는 익숙한 인물, 바로 무당파의 태상자 무열이었다.

전생에서는 무극천존을 먼저 만났고 무열은 나중에 무당오행검수와 함께 만났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열을 먼저 만났다.

얼핏 같은 현상인 듯하지만…… 무엇이 바뀐 걸까.

“흐흐, 주석하! 오랜만이다!”

그를 발견한 무열은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마치 한 마리의 야생 늑대 같은 분위기다.

우설금이 주석하에게 누구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무당파, 무극천존의 제자이자 중원사룡이죠.”

일반 무림인에게는 대단한 배경일지 모르지만 우설금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물론 주석하에게도 그렇다.

다만 주석하는 낭패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만일 이곳에 무극천존이 도착했다면 여러모로 귀찮아진다. 지금 당장 그는 무극천존을 압도하기 어렵다.

비록 우설금이 있지만 구파 장문인까지 몰려온다면 만만찮은 상황이 벌어진다.

“쥐새끼 같은 놈! 어디에 숨어 있나 했더니!”

호기롭게 소리치는 무열 덕분에 주석하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소림사에서 일을 벌이고 도망친 후, 무림맹에서는 그들을 찾아 일대를 뒤지고 있었다. 무열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을 테고.

무열은 그들의 행적을 좇아 이곳에서 그와 우설금을 뒤지다가 지금 발견한 것이다.

과거와 차이점이라면…… 그때는 무극천존이 이곳에 도착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지금은 아직 무극천존과 구파 장문인이 도착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주석하와 우설금이 떠날 기미가 보이자 무열이 무리해서 막아선 것이다. 무열은 혼자서 그를 상대할 수 있다고 보는 걸까. 물론 무열은 우설금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긴 하다.

“무열! 제갈세가에서 만난 후 처음이지?”

“그때 네놈을 수장한 줄 알았는데 잘도 빠져나갔더구나.”

당연히 무열은 주석하가 제갈세가에서 정파십존 세 사람을 죽였다고 믿지 않았다. 비록 주석하가 자신보다 강하지만 정파십존에 비빌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무열은 주석하를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열! 난 너에게 관심 없다.”

주석하는 상대를 무시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무열이 바로 검을 빼 들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건 네놈 사정이고, 난 네놈에게 관심이 많거든.”

“믿는 구석이 있나 보네.”

주석하는 비웃음을 흘리며 흑검소를 꾹 쥐었다.

비웃음을 흘리는 것은 무열도 똑같았다.

“흐흐, 네놈 따위를 무서워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호랑이는 쥐 한 마리를 잡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

무열의 뒤로 낯선 그림자가 쭉 늘어섰다.

주석하는 금방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다.

무당오행검수. 오행태극진을 구성하는 무당의 행동대원 열여덟 명이다. 이들은 중원에서 이름난 무력을 자랑하지만 주석하는 전생에서 이미 이들을 경험했었다. 비록 지금 내공 소모가 극심해서 싸울 상태가 아니라지만 이들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다.

가끔 사람들은 죽을지 모르고 겁 없이 덤벼든다. 목숨을 걸면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 같지만 실상은 오히려 판단력이 흐트러져 무모한 행동을 범하곤 한다. 지금 무열의 행동이 딱 그러했다.

“흐흐, 무당의 자랑, 무당오행검수다! 내가 총대장으로 있지. 오늘 네놈에게 무당의 절진 오행태극진을 보여주도록 하마!”

무열의 호기로운 선언이 이어졌다.

과거에도 이들은 날뛰다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아마 오늘도 그럴 것이다.

마음을 굳힌 주석하는 자비를 덮었다. 지금은 얼른 이들을 해치우고 언제 등장할지 알 수 없는 무극천존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

“알았다! 모두 죽여주지.”

주석하가 안면을 굳히고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 우설금이 그를 만류했다.

우설금은 눈빛으로 그녀가 처리하겠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방금 주석하가 내상으로 선혈을 내뱉었기에 그녀는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게 나으려나. 어차피 이제부터 우설금과 그는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니까. 아니 앞으로 평생을 함께해야 하니까.

주석하는 미소를 지으며 수락했다.

우설금이 앞으로 나섰다. 홍철산이 활짝 펼쳐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