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되찾은 삶 (5)
홍철산이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빙글 돌았다.
우설금의 신형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이와 상반되게 파괴적인 산강이 공간을 갈랐다.
우설금을 포위하는 순간 무당오행검수는 승패가 났다고 믿었다. 오행태극진에 포위된 후 무사히 살아나간 자는 없었다. 설사 무림맹주인 무극천존일지라도 불가능하다.
하물며 처음 보는 이 여자는…… 오행태극진에 갇혀서 피를 토할 것이다. 오행태극진의 신묘한 위력은 무림사에서 일절이라 불릴 만큼 대단하니까.
소림의 십팔나한진을 제외하면 이에 비견할 고절한 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검진 중에는 단연 최고라고 오행검수들은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이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의 정체를 전혀 몰랐다.
그들은 단지 이 여인을 나이 어린 풋내기로 치부했지만, 실상 그녀는 마교의 지고한 신분인 마교수호사령이며 소림의 십팔나한진을 단신으로 격파한 최강고수였다.
파- 파- 파- 파-
홍철산이 돌아가고 모란꽃이 비처럼 쏟아졌다.
주석하의 다급함을 눈치챈 우설금이 처음부터 강공을 펼친 까닭이다.
그 아름다운 환상에 오행검수가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 오행태극진은 갈 곳을 잃었다.
“크윽!”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일고 순식간에 오행태극진이 파괴됐다.
진법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오행검수는 오히려 진법에서 짐만 된다. 지금 그들 가운데 절반이 무너지면서 오행태극진은 평범한 검진으로 바뀌었다.
“이럴 수가!”
무열은 우설금이 선보인 놀라운 무공에 경악했다.
현 중원에는 이처럼 우산을 사용해서 무공을 펼치는 자는 없다. 그런데 그 무공이 더할 수 없이 잔인하고 위력적이다.
“너! 넌 누구냐!”
당연히 우설금은 자신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마리 나비처럼 사뿐히 허공을 날아 무열 앞에 소리 없이 내려섰다. 동시에 그녀를 모란꽃이 화려하게 둘러쌌다.
무열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최고 절기인 태극무상검법을 펼쳤다.
사부의 가르침을 완전히 습득하지 못하여 본래의 위력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절초였다.
무열의 어설픈 검강이 허공을 가르고 우설금의 홍철산과 맞섰다. 홍철산의 산강이 폭발하면서 일순간 공간을 채웠다.
콰아아앙!
무열은 그 순간 자신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강자가 아니었다. 이 여인 앞에서는 어른에게 덤비는 어린아이와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이런 무공이 존재하다니! 검강을 흔적도 없이 깨버리는 어마어마한 무공이라니!
그는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자신의 무공의 단점을 이해하고 더 강한 무공을 새롭게 접하는 순간 무열은 무공의 한 차원 높은 경지를 깨달았다.
지금 다시 검을 잡는다면 태극무상검법을 극한으로 펼칠 수 있을 것 같다.
무공의 깨달음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운이 없었다. 이 순간 깨달은 검법의 새로운 경지를 어디에 쓸 건가. 이미 그의 목으로 산강이 비수처럼 날아오고 있는데.
크윽-
뜨거운 무엇이 목을 그었다. 갑자기 사지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이제…… 제대로 검을 펼칠 수 있는데…….”
아쉽게도 무열에게 다시 검을 잡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목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튀고 머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잠시 균형을 잡고 있던 몸통마저 무너져 내렸다.
무열의 죽음이었다. 중원사룡으로 명성을 날리던 자의 마지막이었다.
오행검수의 핵심인 무열이 죽는 순간 오행검수도 죽음을 맞았다. 아직 숨이 붙은 자는 몇 되지 않았다.
그들은 오행태극진이 단 몇 수에 깨지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기에 바로 대응할 수 없었다.
오행검수가 포기하고 도망치려는 순간 산강이 다시 그들을 덮쳤다.
보은사 앞뜰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우설금을 감쌌던 모란꽃은 사라졌다. 그녀는 마치 비가 올 때처럼 홍철산을 어깨에 걸치고 무심한 표정으로 쓰러진 시신을 훑었다. 모두 열여덟 구의 시신을 확인한 그녀는 안색조차 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주석하에게 미소를 보낸 후 우설금은 다시 경내 곳곳을 훑었다. 누군가를 찾는 모습이다. 그녀는 아직도 동자승에게 준 편지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다급하게 주석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시간이 없어요! 얼른 떠나요!”
무극천존과 구파 장문인들이 들이닥치면 골치 아파진다. 방금 오행검수를 죽여놓았으니 그들과 만나면 생사의 결전을 벌여야 한다. 그렇기에 빨리 피하는 게 답이다.
“도, 동자승을…….”
“그건 다음에!”
이런 상황에서도 남겼던 편지에 연연하는 그녀를 보니 한편으로는 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주석하는 모른 척 그녀를 끌어당겼다.
우설금은 끌려가면서도 연신 동자승을 찾았다.
그녀의 바람과 달리 동자승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쉽게도 이 순간 동자승은 멀리 떨어진 해우소에서 향기로운 냄새와 싸우며 볼일을 보고 있었다.
***
“난 그 동자승을 만나야 한다고요!”
보은사를 한참 벗어나 이름 없는 야산에 접어들었을 때 우설금이 주석하의 손을 뿌리쳤다.
주석하는 모른 척 그녀에게 물었다.
“동자승은 왜요?”
“그런 게 있어요.”
부끄러운 듯 동자승을 언급할 때마다 우설금의 안색에 홍조가 일었다.
우설금을 조금 놀려볼까? 항상 얼음장 같은 그녀이니 놀리는 맛이 상당하다.
“그게 뭔데요?”
우설금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화가 난 듯 그를 쏘아보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예전이었다면 저런 표정에 주눅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예뻐 보이니 그도 단단히 콩깍지가 씐 모양이다.
“내가 알려줄까요?”
“네?”
“……이번 생의 인연은 여기까지이고, 다음 생에도 만날 가능성이 없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윤회를 거듭하며, 당신을 기다리며 살아가리니.”
우설금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녀는 입을 떡 벌린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완전히 혼이 나간 모습이다.
주석하가 그 서신의 마지막 구절을 외우는 이유는 마교의 우설금 처소에서도 수십 번을 읽었기 때문이다.
죽은 그녀를 침상에 눕혀 놓고 슬픔을 달래며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그 유언을 하염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마음은 한 구절 한 구절 읽을 때마다 찢어졌었다.
어찌 그 마지막 유언을 잊을 수 있을까.
정작 우설금은 자신이 쓴 서신이 주석하에게 전해지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그가 알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의 마음을 들켰다는 부끄러움보다 그가 아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그런데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단지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다.
“오늘 내가 천마와 겨뤘다고 했잖아요?”
“아!”
오행검수와 싸우는 바람에 우설금은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때 주석하는 내상을 입고 알 수 없는 말만 했었는데…….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줄게요. 믿을 수 없겠지만 진실이니까 받아들여야 해요. 알겠죠?”
그때까지만 해도 우설금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쏟아내는 주석하의 말 하나하나가 그녀를 얼마나 충격으로 몰아넣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숨을 고른 주석하는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할 말이 너무 많았다.
“무한회귀공이라고 들어봤어요?”
우설금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천마는 그녀에게 무한회귀공을 꺼낸 적이 없다. 그녀의 가족사를 알려준 반야불존도 정작 우설금에게는 무한회귀공을 언급하지 않았다. 주석하 본인이 그녀에게 무한회귀공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가.
전생에서 우설금은 최후의 순간에야 천마에게 무한회귀공을 듣고 그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난 당신이 쓴 서신을 봤어요.”
“언제요?”
우설금이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주석하와 동자승이 만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 당신은 보은사를 떠나고 며칠 후에 난 그곳에 도착해서 동자승을 만났죠. 그때 그가 서신을 주더군요. 그래서 그 서신을 봤어요.”
“무슨…… 지금 나랑 이렇게 함께 있잖아요.”
“지금 말고 전생에서.”
우설금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때는 당신이 먼저 떠났고 내가 나중에 도착하는 바람에 나는 그 서신을 받았어요. 방금 내가 마지막 구절을 읊었잖아요. 그 구절 맞죠?”
우설금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석하의 말이 터무니없음을 그녀는 안다.
하지만 어쩐지 진실인 것만 같다. 그리고 점차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녀가 절대 모르는 어떤 일이 발생했었다는 거다. 그것도 전생에서.
“난 그 서신을 보고 당신이 천마에게 복수하려고 십만대산으로 떠났음을 알았어요. 그래서 그길로 십만대산으로 갔죠.”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전생을 이야기했다.
그 전생은 그녀에게는 실로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그녀의 진정한 원수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그 원수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던. 그 힘들었던 시간을 다시 듣게 됐다.
주석하의 말을 듣던 우설금이 주저앉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가 마교 총단을 돌파한 일과 우설금의 죽음과 천마와 벌인 최후의 결전까지.
그리고 무한회귀공이 다시 등장했다.
“아아!”
우설금이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녀는 이 진실을 받아들였을까? 주석하는 염려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지금 이 순간은 그녀에게 너무 잔인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몇 차례나 경련을 일으키던 우설금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늘 다시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일으켜 과거로 회귀하려 했고 당신이 방해했다는 말인가요?”
“그래요. 만리안석으로 보았듯이 그 대결로 인하여 천마 또한 지금 치명상을 입었기에 당분간은 수작을 부리지 못할 겁니다. 이제는 나를 죽이기 전까지 감히 무한회귀공을 다시 쓸 생각은 하지 못해요. 하다가 실패하면 또 일갑자의 내공을 날려버리는 거니까요.”지금 주석하가 천마와의 싸움에서 자신하는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이제는 급하지 않다. 차근차근 천마의 목을 죄면서 밟아주면 된다.
우설금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주석하는 기다렸다.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물론 그도 정리할 것이 많다. 지금 그의 앞에는 제거할 인물이 널려 있다. 대부분 전생에서 한 번씩 붙어보았기에 이제는 계획이 선 인물들이지만.
천마를 비롯하여 무극천존과 자하검존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그들을 살려두면 다시 재앙이 일어나니까.
그들을 제외하고도 구파 장문인과 남은 마교칠왕 세 사람에 금천마령, 은천마령, 묵천마령……. 묵천마령? 이놈은 아닌가?
“그때 흑귀와 백귀는 어떻게 되었어요?”
“그 두 사람은 당신을 구하려다 천마각에서 천마의 손에 죽었어요.”
우설금의 안면에 슬픔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그녀는 믿었던 두 충직한 부하가 끝까지 그녀와 함께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주석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확실하게 적군과 아군을 구별할 수 있게 됐다.
“그럼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죠?”
“천마를 어떻게 없앨지 고민해야죠.”
“그냥 가서…… 없애면 되잖아요? 당신 말대로라면 당신이 천마보다 더 강하니까.”
“그게…… 꼭 그렇지 않아요. 사실 차이가 나 봐야 얼마 나지도 않고…… 천마도 이 사실을 안다는 거죠. 그도 지는 싸움을 하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제는 무한회귀공을 제외하고 둘이서 붙어야 하는데…… 천마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마교라는 조직이 있거든요. 천마는 이 장점을 살려 사태를 만회하려 할 겁니다.”앞으로 천마는 전생과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때의 천마가 본인의 강함만 믿고 날뛰었다면 지금의 천마는 둘만의 대결을 회피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그를 노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