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사천으로 (1)
보은사의 작은 암자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 바둑을 두는 그들은 스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현 정파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자하검존과 무극천존이었다.
무극천존은 보은사에 도착했을 때 제자인 무열을 비롯한 무당오행검수의 시신을 발견했다. 뜨거운 피가 식지 않은 시신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아끼던 제자의 죽음을 슬퍼할 새도 없이 무극천존은 시신에 난 사인을 확인했다.
몸 전체에 꽂힌 수많은 강편. 검강이라 하기에는 투박하고 규모가 작았다. 놀랍게도 이 흔적은 소림 오각주와 십팔나한의 몸에 새겨진 사인과 유사했다.
불호와 도호를 데리고 조사를 진행하던 중에 자하검존이 도착했다.
그날 이후로 무극천존과 자하검존은 보은사에 머물면서 대책 수립에 들어갔다. 겉으로는 바둑을 즐기는 신선 같은 풍모를 보이지만 그것은 눈속임일 뿐이다.
“마교의 동정 보고가 도착했습니까?”
탁-
자하검존이 바둑돌을 올려놓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새벽에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무극천존 또한 바둑돌을 올리며 대답했다.
자하검존은 이런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사지존이 살아있을 때 그는 모든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접했다. 무림의 정보는 만사지존에게 집중됐고, 그와의 친분으로 사실상 모든 정보를 공유했다.
그런데 만사지존이 오대가주와 함께 어이없이 이곳 벽로천에서 빠져 죽은 후 상황이 달라졌다.
모든 정보는 무림맹주인 무극천존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자하검존은 지금처럼 무극천존과 별도의 자리를 만들어야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핵심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뜻했다. 그 점이 묘하게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특이점이 있었습니까?”
“섬서에서 진격하는 마교 주력부대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어떤?”
“그들이 갑자기 진로를 반대로 틀었습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최근에 마교는 승승장구하던 중이었는데…….”
자하검존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제갈휘가 죽기 직전 그에게 전한 서신에는 소림사를 침입하여 반야불존을 죽인 자는 주석하와 마교인이라 했다.
반야불존과 오각주의 몸에는 주석하의 흔적보다 마공의 흔적이 훨씬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제갈휘와 오대가주의 몸에는 주석하의 흔적뿐이었다.
그들은 주석하와 마교인이 함께 움직이면서 때때로 별도의 흔적을 남기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공의 흔적을 이곳 보은사에서 발견했다. 무당오행검수의 시신에서. 그 때문에 두 사람은 마교의 움직임을 유달리 신경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작전을 변경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극천존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만사지존이 저승에서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습니다.”
자하검존은 마교보다 사파를 먼저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사파를 없애야 중원 무림이 정파의 기치 아래 결집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런 논리는 자하검존도 동의했던 주장이다.
제갈휘를 죽인 자가 주석하라고 추정되는 상황이라 자하검존은 사파인 주석하의 타도가 최우선이라는 입장을 견제해왔다.
그런데 무열이 죽자 무림맹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무림맹의 힘을 마교로 돌리자는 의견을 무극천존이 꺼냈다.
“검존, 흑검서생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화산파의 정보망이 와해되고 제갈휘로부터 얻던 정보마저 날아가 버린 판이라 자하검존은 눈과 귀가 묶인 상태였다.
“흑검서생이 사천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럼 우리도…….”
“그런데 그게 마교 주력부대가 방향을 돌린 때와 묘하게 일치한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흑검서생이 정말 마교의 끄나풀이었던 겁니까?”
“그건 알 수 없지요. 다만 마교와 분명히 연관성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면 주석하가 마교도가 함께 움직인다고 보아야 했다.
다만 그 마교도가 누구인지 불명확했다. 때로는 마교도가 다수처럼 보였고 때로는 단 한 사람인 것처럼 여겨졌다.
“어떻든 흑검서생 그자를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원수를 갚아야지요.”
“저도 압니다. 무려 무림맹 책사가 죽었는데 우리가 움츠리고 있으면 놀림감이 될 테니까요. 다만 예전처럼 무작정 그를 노려서는 승산이 없습니다.”무극천존의 책망에 자하검존은 심기가 불편했다.
사실 지금까지 그와 제갈휘가 주석하 제거를 주동했었다. 어쩌면 지금 무림맹이 흔들리는 것도 제갈휘와 그가 주석하에게 매달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설사 그게 사실이더라도 지금 포기할 수는 없다. 제갈휘가 죽었으니까.
자하검존은 내심 이를 갈았다. 그는 정파십존이 이렇게 무기력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범주에 자신도 들어가 있었다.
그가 통찰력을 가진 고인이라면 무림에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다고 진작 눈치 챘겠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완고한 고집을 지닌 구세대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하검존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담겼다. 무극천존이 이즈음에서 발을 뺀다면 그는 혼자서라도 주석하를 어떻게든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막강한 무기가 남아 있으니까. 어쩌면 주석하의 약점이라 할 유비연이었다.
제자를 불구덩이에 밀어 넣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으나 제갈휘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정파 무림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구파를 연합하여 마교의 뒤를 칠 생각입니다. 그들이 방향을 전환했다는 것은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 주력부대가 사천에 주둔한 다른 부대와 합류해서 다시 중원을 침공하면 최악이지만 그게 아니라 십만대산으로 돌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십만대산이라…….”
자하검존은 마교가 어느 쪽으로 움직이든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마교는 주석하 다음 관심사였다. 다만 최근에 주석하와 마교가 동행하는 움직임을 보이니…….
“그럼 우리 정파도 총력을 모아 마교의 뒤를 쫓읍시다. 그들이 십만대산으로 돌아가면 이 기회에 흑검서생을 포함해서 마교를 무너트리지요.”
자하검존이 호기롭게 외쳤다.
물론 그의 속셈은 그렇게 마교와 부딪혀 주석하를 처리할 기회를 잡겠다는 의도였다.
“알겠습니다. 무림맹주의 이름으로 구대문파를 규합해보겠습니다.”
자하검존은 무극천존을 지지했다.
무림맹의 움직임이 정해졌다. 이 결정은 향후 무림에 큰 변화를 예고했다.
***
주석하는 섬서에서 사천으로 넘어왔다.
회귀 전 마교로 향하면서 사천을 지날 때는 마교 주력부대의 움직임 때문에 고민이 많았었다.
그때는 주력부대와 마교칠왕 중 세 마두가 연합하여 흑검문을 위협했었다. 우설금과 흑검문 문제가 겹치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고 이는 커다란 심리적 고통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훨씬 편안해졌다.
설사 마교칠왕이 주력부대에 가담하더라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고, 우설금은 지금 그의 옆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심리적으로 쫓기지도 않고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당연히 주석하는 기분이 좋았다.
그는 옆에서 걸음을 옮기는 우설금을 슬쩍 살폈다. 그녀의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덕양에 가까워질수록 심해지는 느낌이다.
물론 그녀가 진정한 신분과 원수를 알게 되면서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졌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 상황에서 대놓고 천마에 반기를 들었으니 불안감도 상당할 것이다.
그 모든 점을 이해하지만 이런 그녀의 모습은 다소 예외였다. 항상 싸늘한 분위기 속에 자신감을 내뿜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오늘은 제대로 제가 대접할게요.”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우설금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그는 묘안을 짜냈다.
덕양에 왔으니 백화루에서 별미를 먹을 생각이다.
백화루의 요리 솜씨는 꽤 좋은 편이다. 그동안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거의 육포로 때웠으니, 가끔 이렇게 호의호식하며 호강을 즐길 때도 있어야 한다.
“어때요?”
주석하의 물음에 우설금은 단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째 여전히 불편해 보였다.
그와 우설금이 함께 백화루에 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그녀와 처음 만난 직후 마교 인사의 죽음을 추궁 당했던 때였다. 그때 그녀의 놀라운 무공에 그가 식겁한 적이 있었다.
두 번째는 하북팽가 침공 후에 다른 동료들과 함께였었다. 그때 그녀는 별말이 없었던 것 같은데…….
당시를 떠올리며 주석하는 백화루 안으로 들어갔다.
백화루의 주인이 등장하자 점원을 비롯하여 모두가 우르르 몰려나와 인사했다. 거의 몇 달 만의 방문이니 환영이 다소 격렬했다.
주석하는 뿌듯하게 목을 세우며 옆의 우설금을 살폈다. 어째 그녀의 안색이 더욱 침울해졌다.
‘무슨 일이지?’
그가 의아해하는 사이 총관이 후다닥 뛰어왔다.
“공자님, 오셨습니까?”
“조용한 별채에 자리를 마련해 줘요.”
“이리로 오십시오.”
총관이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그들을 정중히 안내했다.
“그동안 큰일 없이 순조롭게 운영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총관이 이동하면서 쉴 새 없이 그간 상황을 보고했다. 이런 점이 예전과 달라졌다.
주석하는 듣는 둥 마는 둥 우설금의 기분을 염탐했다. 이 백화루가 자신의 소유라고 자랑하는 중인데, 어째 우설금의 반응이 별로였다.
부군이 엄청난 부자가 됐으니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직 모르는 건가? 우설금이 말수가 적으니 그가 백화루주임을 아는지 모르는지도 불분명했다.
물레방아가 도는 작은 연못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주석하는 우설금과 나란히 앉았다.
점소이가 격렬하게 반기면서 요리를 내왔다.
“자, 드세요.”
이 요리가 공짜인지 아닌지 모호했다. 돈을 내지 않으니 공짜인 것 같긴 한데 그가 운영하는 곳이니 결국 그의 돈으로 먹는 것 같기도 하고.
우설금이 말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기분이 안 좋아요?”
대답 대신 우설금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는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백화루 인수는 저의 꿈이었어요. 그걸 이룬 거죠. 물론 뇌군의 도움이 컸지만요. 어쨌든 이제는 나도 부자이고 어디를 가도 돈이 없어서 굶을 수준은…….”무심코 말하던 주석하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사천으로 오면서 여비가 떨어져 고생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꼭 필요할 때는 가진 돈이 부족했다. 사실 육포가 떨어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마교수호사령인 우설금은 강호를 오가면서 돈이 부족한 적이 없었다. 다만 지금은 마교 총단과 연락이 끊어져 호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졌다.
예전에 도수와 둘이 다닐 때 상거지 꼴로 귀가했던 주석하는 이번에도 우설금을 거지로 만들 수 없어 엄청 신경 썼다.
“알아요.”
“그런데 왜?”
“백화루라…….”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주석하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밖이 소란스럽더니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다짜고짜 주석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루주니이임!”
“어? 누구지? 아, 명월이?”
이상한 인연으로 그가 백화루를 올 때마다 시중을 드는 여인이다. 그는 딱히 이 여인을 지명한 적이 없는데 그가 이 여인을 좋아한다고 오해한 총관과 행수어멈인 서 부인이 명월을 오늘도 이곳에 집어넣었다.
당연히 명월도 백화루주를 자신이 모신다고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오늘도 다른 일을 때려치우고 바로 나타났다.
“그동안 안 찾아주셔서 서운했어요.”
명월의 코맹맹이 소리에 당황한 주석하는 우설금을 슬쩍 살폈다. 우설금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월이 주석하의 얼굴을 매만지며 불평을 늘어놨다.
“오늘…… 도 공자님도 오세요?”
“그 자식은 당분간 바쁘다.”
“다행이에요. 그때 도 공자님이…….”
고자질하면서 한껏 분위기를 내던 명월의 시선이 옆에 앉은 우설금에게 무심코 옮겨갔다. 명월의 안면이 얼어붙었다.
“흐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