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52화 (252/273)

252화 사천으로 (4)

흑검문으로 돌아온 주석하는 대청에서 오랜만에 혈혼도객을 만났다.

혈혼도객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시커먼 피부에 탄탄한 근육의 마른 체구, 거기에 음산한 눈빛. 전형적인 흑도의 인물이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주석하는 혈혼도객을 치하했다.

엄밀히 따지면 혈혼도객은 흑검문에 머무는 빈객이다.

일당을 받고 흑검문의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해주면서 대외적으로는 흑검문의 무력을 빛내주는 역할을 한다.

주석하를 제외하면 제대로 무공을 익힌 고수가 없는 흑검문이기에 혈혼도객의 존재는 빛을 발했다. 튼튼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고 흑검문의 위상을 높였다.

물론 혈혼도객의 무공은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그의 배경이 혼천교이기에 대외적으로 그 위력을 발했다.

주석하가 없을 때, 특히 하북팽가의 위협이 극에 달했을 때도 도망치지 않고 남은 것을 보면 예상외로 의리가 있었다.

“제가 한 일이 있습니까, 전부 문주님께서 잘 해주신 덕이지요.”

혈혼도객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검은 피부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이빨이 섬뜩하다. 누가 사파인 아니랄까 봐.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휴가를 주려고 불렀어.”

“휴가요?”

혈혼도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빈객이 휴가를 가는 법도 있나? 한참 머리를 굴리던 혈혼도객은 갑자기 엎드려 주석하의 다리를 붙잡았다.

“아이고, 소문주님! 저는 여기에서 쫓겨나면 굶어 죽습니다.”

그만 나가라는 말로 착각한 혈혼도객은 결사적으로 다리를 붙잡았다.

혈혼도객 수준의 낭인은 꽤 흔해서 이곳을 나가면 마땅한 자리를 찾기 쉽지 않다. 특히 요즘처럼 정파나 마교가 횡행하는 어지러운 시국에서는 사파라고 목을 세우다가는 자칫 목숨이 간당거리기도 하고.

사실 혈혼도객의 일당은 다소 과하게 높게 책정되긴 했다. 그를 받아들일 때 문주인 주격이 세상 물정을 몰랐고 다급하게 구했던 까닭이다.

“어허, 쫓아내는 거 아니라니까.”

“그, 그러면요?”

“멀리 심부름 좀 시키려고.”

당분간 흑검문이 위기에 빠질 일은 없기에 혈혼도객이 반드시 이곳에 있어야 할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주석하의 밑에 마땅히 부릴 부하가 없다는 점이다. 그나마 가장 만만한 자가 혈혼도객이었다.

“어, 어딘데요?”

“남궁세가!”

“예? 전 흑도라 거기 가면 맞아 죽는데요?”

시커먼 혈혼도객의 안색에 더욱 먹구름이 자욱해졌다.

이곳 사천에서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까지 보통 거리가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수상한 시국에는 가다가 무슨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가야겠어?”

“아, 그, 그건 아니지요.”

“내가 서신 하나를 써줄 테니 후딱 다녀와라. 어때?”

“서신 전달요? 그런 거라면 요즘 명아가 뜰에서 키우는 전서구를 시키면…….”

딱!

주석하는 혈혼도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 비둘기 살찐 거 못 봤냐? 그놈들 몸이 무거워서 사천도 벗어나기 힘들걸?”

“그, 그렇기는 하죠.”

혈혼도객은 맞은 부위를 쓰다듬으며 한숨만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궁세가는 너무 멀었다. 흑검문이 위협에서 벗어나 편하게 발 뻗고 잘 시기가 되었다고 좋아했더니 일을 떠맡게 됐다.

아무리 하늘 같은 소문주의 명령이라지만 조금 억울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가지 않을 궁리를 짜내던 혈혼도객이 큰마음 먹고 요구했다.

“일당은…… 아니지, 여비는 확실히 주시는 거지요?”

“왜?”

“예전에 혼천교 찾아갈 때 여비가 없어 혼쭐났던 기억 있잖습니까?”

주석하가 생각해보니 돈이 없어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과거의 그는 작은 흑검문의 궁핍한 소문주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그는 무려 백화루주다. 어디에 내놓아도 돈이 부족할 사람이 아니다.

주석하도 혈혼도객을 고생시킬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 당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알았어. 여비는…… 두둑하게 주지. 얼마나 필요해?”

“일당만큼은 주셔야죠.”

혈혼도객이 받는 일당을 여비로 쓰면 산에서 노숙하고 육포를 뜯을 일은 없다. 객잔을 오가며 호화로운 여행이 가능해진다.

아무래도 한 방 먹은 느낌에 주석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안 주면 안 갑니다.”

혈혼도객도 이제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흑검문에서 자신을 대신해서 남궁세가까지 갈 사람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어쩔 수 없나. 주석하는 마지못해 약속했다. 백화루에서 들어오는 돈이 아니었다면 절대 그만큼 여비를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졸지에 몸값이 두 배로 상승한 혈혼도객은 입이 찢어졌다.

“그런데 무슨 서신입니까?”

“남궁천 형님께 갖다 드려. 반드시 직접 전해야 해.”

“안 계시면요?”

“있는 데까지 찾아가서 전해. 알았어?”

“당연하죠. 임무를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혈혼도객은 하겠다고 답했다.

만일 남궁천이 없어도 걱정할 필요가 사라졌다. 다른 곳까지 또 찾아간다면 그만큼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그래, 후딱 다녀와.”

주석하는 입이 찢어진 혈혼도객을 노려보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자식에게 당한 기분이다. 원래 혈혼도객이 이런 녀석이었나? 예전보다 실리를 챙기는 놈으로 바뀌었다. 대체 누구에게 배운 거지?

주석하는 남궁천에게 보낼 서신에 현재의 무림 상황과 향후 전개될 큰 흐름을 적을 생각이었다.

전전생에서 그는 칼받이로 정마대전을 경험했었고, 전생에서도 무극천존과 무림맹의 움직임을 경험했었다.

그렇기에 그와 우설금이 마교 주력부대를 십만대산으로 돌렸을 때 어떤 문제가 일어날지 비교적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니까.

남궁세가가 그의 조언을 듣고 움직여준다면 앞으로 중원 무림은 남궁세가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

주소은은 비둘기 모이를 주고 있는 우설금을 발견했다.

최근 들어 우설금이 명아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하는 티가 보였다.

예전의 우설금은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가까이하기 힘들었고, 본인도 어울리려 하지 않았었는데 요즘의 그녀는 먼저 다가온다.

당연히 이런 우설금이 예전의 우설금보다 훨씬 낫다.

비둘기와 함께 명아와 어울리는 우설금을 조용히 지켜보던 주소은은 마음을 굳히고 다가갔다.

그녀가 궁금한 것은 단 하나였다. 우설금이 어떻게 오빠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주석하의 애정사를 그녀도 잘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주석하 주변에는 최근에 눈이 번쩍 뜨일 미녀가 많았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설금이 주석하의 눈에 들었으니 분명히 특별한 재주가 있을 것이다.

그 재주를 배워 그녀도 남궁천에게 써먹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뭐해요?”

주소은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우설금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아직 무뚝뚝한 성격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과거처럼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저런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를 띠면 여자인 그녀도 넋이 나가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니까.

“비둘기에게 모이 너무 많이 주면 안 돼요. 게을러지거든요.”

“네.”

돌아오는 대답이 짧다. 대화를 이어가기에 다소 미흡하다.

어쩔 수 없이 주소은은 먼저 용건을 꺼내야 했다.

“그런데…… 우 소저?”

“네?”

“최근에 오빠랑 뭐 했어요?”

“무슨 말씀인지?”

“아!”

주소은은 질문이 부적절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오해하기 딱 좋은 질문이었다.

“음, 그러니까…… 최근에 우 소저랑 오빠가 유달리 가까워진 것 같거든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우설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 들었던 죽고 못 사는 사이란 말이 다시 등장할 것 같아 주소은은 재빨리 덧붙였다.

“오빠가 살려주었다는 그런…… 신파극 대답은 말고요.”

우설금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천마의 손에 그녀가 죽고 주석하가 회귀해서 그녀를 되살린 이후 급격히 둘 사이에 벽이 사라진 건데, 그것 말고 다른 계기를 말하라니 말문이 턱 막혔다.

“뭔가 결정적인 것 없어요? 우 소저가 오빠에게 했던 거…….”

한참 고민하던 우설금은 유일하게 그녀가 했던 특별한 행동 하나를 떠올렸다.

“아! 있어요.”

“뭔데요?”

주소은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우설금의 답을 기다렸다.

“서신을 썼어요.”

“아! 어떤 내용의…….”

“대략…… 이번 생의 인연은 여기까지이고, 다음 생에도 만날 가능성이 없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윤회를 거듭하며, 당신을 기다리며 살아가리니. 이런 내용의…….”우설금이 얼굴을 붉히며 주섬주섬 털어놓았다.

“아! 연서!”

주소은의 안색도 확 붉어졌다. 무슨 말인지 확실히 감을 잡았다. 역시 남자들은 진심이 담긴 편지에 감동하기 마련이다.

“고, 고마워요!”

주소은은 부끄러운 마음에 후다닥 몸을 돌려 처소로 뛰어갔다. 남궁천에게 연서를 보낼 생각을 하니 저절로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 와중에 그녀는 행랑을 짊어지고 길을 떠나는 혈혼도객을 발견했다.

“도객! 어디 가세요?”

“아, 아가씨! 임무가 떨어져서 멀리 갑니다.”

“무슨 임무요?”

혈혼도객이 머리를 긁적이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남궁세가에 서신을 전하러 가는 길입니다.”

“남궁세가요?”

갑자기 주소은은 놀라서 몸이 굳었다.

남궁세가에 서신이라니?

이것은 그녀가 남궁천에게 연서를 보내라는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필 방금 우설금에게 연서 이야기를 들었고 곧바로 길을 떠나는 혈혼도객을 발견했으니…… 이런 우연이 없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혈혼도객이 꾸벅 인사했다.

“자, 잠시만요.”

“네?”

“나도 서신 하나 써줄 테니까 남궁천 소협에게 전해주세요.”

“남궁천요?”

혈혼도객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딱 일석이조 아닌가.

혈혼도객의 안색이 변하자 주소은은 불안해졌다.

“왜요? 힘드세요?”

“그, 그게 아니라…….”

혈혼도객은 손가락을 비비며 머뭇거렸다.

주소은이 바로 눈치채고 다급하게 제안했다.

“제가 여비를 드릴 테니까 꼭 전해줘요.”

“아! 원래는 바빠서 안 되지만…… 아가씨께서 부탁하시니 특별히 해드려야지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요.”

주소은이 내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혈혼도객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돈을 계산했다.

“낄낄, 이거 잘하면 떼돈 벌겠는데…….”

***

웅장한 십만대산을 바라보면서 천마는 기분을 가라앉혔다.

무한회귀공을 썼다가 패한 이후 이제야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예상 외로 내상이 심각했다. 게다가 피 같은 내공 일갑자를 소모했다.

예전이라면 일갑자의 내공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회귀를 거듭하면서 쌓았던 심후한 내공에서 일갑자는 크지 않았고 다시 얻어낼 방법도 많았다. 십년유심홍 열매만 있어도 일갑자는 바로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방해했던 녀석과 내공 차이가 더 벌어졌다.

무한회귀공을 썼을 때 아쉽게 패한 정도였다면 이제는 곧바로 패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 당장 무한회귀공을 사용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에 천마는 말할 수 없을 만큼 답답해졌다.

지금처럼 내공 부족을 절감한 적은 그의 일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

“주석하 이놈!”

천마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빨을 갈았다.

바둑돌로 키운 녀석이 이제는 주인이 되어 판세를 뒤집으려 한다. 절대 내버려 둘 수 없다. 아니 처절하게 누가 주인인지 일깨워줘야 한다.

천마는 십만대산의 마기를 들이마시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천마시여! 말씀드릴 문제가 있습니다.”

묵천마령이 뒤에 나타났다.

천마는 묵묵히 몸을 돌려 묵천마령을 맞이했다.

“무슨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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