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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53화 (253/273)

253화 거듭된 인연 (1)

천마는 부복한 묵천마령을 쏘아보면서 묵직한 마기를 피어 올렸다.

듣지 않아도 심각한 문제라고 느껴진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저렇게 득달같이 달려온 것을 보면. 두 바둑돌이 일으킨 문제라면 골치 아픈데…….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교칠왕에게서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마교칠왕은 모두 일곱이다. 화산에서 둘이 죽었고 청산에서 또 둘이 죽었다. 남은 셋은 덕양에 있었는데 그놈들이 사라졌다면 분명히 주석하와 관련되어 있다.

“이놈들!”

천마는 주먹을 거머쥐며 버럭 소리치려다 간신히 마음을 안정했다. 묵천마령에게 소리쳐봐야 달라지는 것이라곤 없다.

마교 최강 전력이 사라졌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유는?”

“아무래도 흑검서생에게 당한 듯합니다.”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에게 당할 마교칠왕이 아니기에 이 분석은 아마 정답일 것이다.

이번 생은 실패작이다. 아무래도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그 회귀를 놈이 막고 있다.

그러니 가슴이 답답하고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달리 보고할 게 있나?”

“실은…….”

묵천마령이 말을 조심하는 것으로 보아 또 다른 문제가 있어 보였다.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노려보던 천마는 이어진 보고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주력부대가 중원진격을 포기하고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게 뭔 소리야? 누가 명령을 내렸지?”

“모르겠습니다.”

무려 수십 년간 칼을 갈아 중원 정벌을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마교칠왕이 죽고 주력부대가 회군한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전생에서는…… 아, 이젠 전전생인가? 그때는 주력부대가 하남 무림맹을 뒤집었었다.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의 목숨을 손아귀에 넣었었다. 그랬었는데 이번에는 최악의 결과로 흐르고 있다.

“누가 항명한 거지?”

묵천마령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천마는 듣지 않아도 그 답을 안다.

중원진격이라는 명령을 어겼다면 이건 항명을 넘어서 반란이다. 역모를 주동하는 자가 있다. 그 주모자가 단천마령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누구보다 충직했던 단천마령이 갑자기 왜 이렇게 변했을까. 그가 키우다시피 했던 분신 같은 부하가 갑자기 달라졌다.

이게 모두 두 바둑돌이 서로 만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묵천마령 저놈이 입을 열지 못하는 것도 단천마령과 가깝기 때문이다. 저놈은 평소에도 단천마령을 끼고 돌았으니까. 설마 저놈도 역모에 가담했나?

갑자기 솟구치는 의심이 뇌리를 강타했다.

‘대체 전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천마는 점점 불안해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자신이 죽고 주석하가 회귀했을까?

무한회귀공으로 맞붙은 일전은 비록 패하긴 했으나 그 차는 근소했다.

그의 아군이 자신과 세 마교수호사령이라면 주석하와 단천마령을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객관적으로 봐도 훨씬 우세하다. 금천마령과 단천마령의 무공 격차는 예상 밖으로 크니까.

자신과 주석하가 싸우는 동안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거들어주기만 해도 절대 패배할 수 없다.

그런데 패했다는 것은…… 설마 이 자식들도 역모에 가담한 건가?

천마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단천마령뿐 아니라 금천마령과 은천마령마저 역심을 품고 있으면 수습이 어렵다. 문제는 이런 의심을 확인할 방법도 없다. 그 답은 주석하나 단천마령이 쥐고 있을 테니.

천마는 휙휙 손을 저었다.

“물러가라.”

묵천마령이 사라진 후 천마는 이를 갈았다.

중원으로 간 주력부대는 마교 전력의 칠 할이다. 애초에 세 부대로 나누어 둘을 중원으로 보냈고 하나만 남겨 총단을 사수했으니.

주력부대가 칼을 거꾸로 겨눈 상황이라면 막을 수 있나?

숫자로는 불리하지만 천주문을 중심으로 한 천연지형과 죽음의 기관 진식이 있기에 마냥 불리하지만은 않다.

게다가 단천마령이 그들을 장악해봐야 한계가 뚜렷하다. 천마가 나서면 마교도들은 다시 그에게로 충심을 돌릴 테니까.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문제인데…….’

그 둘이 역심을 품었다면 답이 없다. 몇 번 되새겨보아도 전생에서 자신이 주석하에게 패한 원인이 그 둘의 배신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막연한 추측만으로 마교수호사령을 모두 처리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아…….”

천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한회귀공을 익힌 이후로 이렇게 답답한 기분은 처음이다.

**

사생결단의 뜻을 품고 장도에 올랐다.

며칠 지나지 않아 주석하와 우설금은 사천을 벗어났다.

사천의 서쪽은 사실상 중원의 변방이다. 여기서부터는 중원과 토양, 풍습이 달라진다. 산이 험해지고 사람 살기에도 퍽퍽하다. 마교가 있는 십만대산은 이곳에서도 한참 더 떨어진 고산지대다.

여름이라 날씨는 덥고 자주 비가 내렸다. 고원지대 특성상 현저하게 나무숲이 줄었다. 나지막한 관목이 듬성듬성 자란 헐벗은 산들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주석하는 지난 생에서 우설금을 찾아 마교로 갔던 길을 떠올렸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정신없이 갔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 악홍아…….”

“네?”

무심코 지른 혼잣말에 우설금이 바로 반응했다. 주석하에게서 여자 이름이 나오니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우설금은 의심의 눈빛을 지우지 않고 있다.

악홍아가 마교로 잡혀가고 있었는데…… 이번 생에서도 고생하고 있으려나? 주석하는 악홍아에게서 입은 은혜를 잊을 수 없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때 천마는 회귀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때 그 보답으로 광천곡의 부활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주석하는 이번 생에서라도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킬 생각이었다. 사람이란 신용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혹시…….”

주석하의 머뭇거림에 우설금이 눈빛으로 얼른 말하라고 재촉했다.

“마교에서 중원 무림인을 잡아가기로 했었나요?”

“일부는요.”

무림 문파의 주요 인물 가운데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마교로 압송하라는 지시가 있긴 했다. 마교에서 허드렛일을 할 사람이 필요한 데다 인질로 잡으면 중원 문파 지배가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그럼 그들도 이 길을 통과하죠?”

사천에서 마교로 간다면 당연히 이 길뿐이다.

주석하는 날짜를 계산했다. 전생에는 길이 익숙하지 않고 중간에 이런저런 일이 많았었다.

그때와 날짜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지금이 약간 빠르다. 그렇다면 악홍아 일행이 그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잠시 쉬어요.”

주석하는 길 가장자리에서 적당한 곳을 찾았다. 두 사람이 숨을 적절한 장소였다.

그의 옆에서 숨을 고르던 우설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는 그녀도 마교의 그런 행동이 잘못임을 알기에 그 문제는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그 사람들을 구하려고요.”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면 당연하지만 다소 뜬금없기에 우설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천마와 일생일대의 결전을 앞두고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 주석하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석하가 중원 사람을 그만큼 사랑한다고 이해했다.

그러자 그만큼 주석하가 마교를 미워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슬퍼졌다. 중원정벌이나 무림인 납치 문제에서 그녀도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주석하는 미묘한 그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여기에서 기다리다가 구하면 되겠죠?”

우설금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평범한 중원인의 사고를 따라가려면 아직 까마득하다는 자책이 일었다.

예상과 달리 불과 두 시진이 채 못 되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주석하는 그 행렬이 과거에 만났던 바로 그 무리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일살부터 오살이라 했던가? 별로 질이 좋지 않은 놈들이었던 것 같은데?

예상외로 긴장하는 우설금의 귓가에 주석하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 사람들 구해도 별문제 없죠?”

“네.”

마교에서 이것은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다. 천마에게는 보고도 되지 않을 것이고 총괄하는 묵천마령에게 올라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정작 그녀의 걱정은 이 문제로 주석하가 마교를 더 나쁘게 보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비록 천마는 그녀의 원수이지만 마교는 그녀에게 고향과 같은 동네다.

짝!

날아든 채찍이 사람들의 등을 휘갈겼다.

여기저기에서 신음이 새어 나오고 몸을 휘청거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포승줄에 묶인 채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을 재촉하며 채찍을 휘두르는 자들은 다섯 명. 우설금에게는 말단이라고 할 마교도 다섯이다.

우설금은 과거에도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약자라면 당연히 받아야 할 굴욕이니까. 그런데 지금은 다르게 보였다. 채찍을 휘두르는 마교도의 잔인함과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약자의 비참한 사정이 눈에 밟혔다.

우설금은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이 장면에서 마교도가 아닌 중원인에게 동정이 실리는 것을 보면 그녀도 정말 많이 변했다.

그사이 주석하는 포로 가운데에서 악홍아를 찾았다. 악홍아 또한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날아드는 채찍을 맞고 있었다. 주석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채찍을 맞던 사람들이 쓰러지자 화를 내던 마교도가 결국 포기하고 길가에 그들을 주저앉혔다. 내리쬐는 햇볕에 지쳐 쉬려는 모양이다.

“이것들아! 죽고 싶나? 요령 부릴래?”

저렇게 위협하지만 포로 숫자를 맞추어야 하기에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주석하는 경험했었다.

“인간으로 대해주니 아직 인간인 줄 착각하나 본데 너희들은 가축이야, 가축!”

다른 녀석이 낄낄대며 옆에서 거들었다.

포로들은 두려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일살이 옆의 동료에게 소리쳤다.

“지금 몇 놈이야?”

“네 명씩 여덟 줄이니…… 서른 명이야.”

“야 이 미친놈아! 제대로 세!”

“그, 그게…… 하여튼 그렇다고. 너무 큰 걸 나에게 바라지 마.”

“으이그, 좋다. 본보기로 한 놈 죽이자고.”

“그래도 되나? 서른 명인데…….”

일살이 포로들을 쓱 훑어보더니 한 놈을 지목했다.

“이 새끼야, 너 나와봐.”

겁에 질려 잽싸게 몸을 숨기는 한 중년인을 이살이 강제로 붙잡아서 끌고 나왔다.

“네놈이 계속 말썽부렸지? 선동하고, 걸음 늦추고, 틈만 나면 도망치려 하고…….”

“그, 그런 적 없습니다.”

“뭔 소리야? 전부 다 봤다고. 야! 거기 너! 이 자식이 그랬어? 안 그랬어?”

일살이 다른 한 사람을 지목했다.

그 사람이 고개를 저으며 하소연했다.

“아, 안 그랬습니다.”

“그래? 그럼 네놈이 그랬나 보네. 너도 나와!”

날벼락이 대답한 사람에게 떨어졌다.

일살이 두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윽박질렀다.

“다시 잘 봐라. 이 자식이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그, 그러지 않았…… 크윽!”

푹!

대답하던 사람이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의 배에는 단검이 박혀 있었다.

“거짓말하면 이렇게 된다. 거기, 너! 네놈이 대답해! 이 자식이 선동했었지?”

“그, 그렇습니다.”

지목당한 사람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일살이 앞에 선 포로의 가슴에 비수를 박았다. 남자는 신음과 함께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선동하거나 도망치거나 행군을 방해하는 자는 이렇게 된다!”

일살이 포로를 향해 경고했다.

이 장면에서 주석하는 정신이 확 달아났다. 죽이지 못하는 것 아니었나? 어떻게 된 거지?

두 사람이 죽자 포로들은 꼼짝하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주석하는 재빨리 포로의 머릿수를 셌다.

모두 서른. 죽기 전에는 서른둘이었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안이하게 생각하다가 아쉬운 생명을 죽였다.

이 장면을 모두 지켜본 우설금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마교라는 입장을 벗고 나니 마교도의 잔인함이 눈에 보였다. 물론 과거 그녀의 모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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