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거듭된 인연 (2)
덤불에 숨어 있던 우설금이 벌떡 일어섰다.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던 주석하는 의외의 상황에 그녀를 따라갔다.
“네놈들은 뭐야? 죽…….”
그들을 발견한 마교도가 버럭 소리치다가 입이 얼어붙었다. 녀석의 눈이 우설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별로 놀랍지 않은 장면이다. 단천마령을 발견한 마교도들은 대부분 저런 반응을 보였으니까.
우설금이 등장하자 마교도 다섯이 얼어붙은 채 부동자세를 취했다.
우설금은 잡힌 중원 무림인들을 쓱 훑어봤다.
물론 그녀는 주석하가 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알지 못한다.
“이들은?”
“교에서 잡아 오라고 요구한 자들입니다.”
일살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들에게 단천마령은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사람이다.
푸악-
“으아악!”
순간 우설금에게서 무형의 마기가 솟구쳐 다섯 마교도를 멀리 튕겨냈다. 그들은 무려 십여 장 밖 바닥에 처박혔다.
우설금의 분노는 가시지 않았다.
그들을 해칠 기미가 보이자 주석하는 재빨리 전면에 나섰다.
“이것들아! 너희들은 이들을 풀어주고 뒤따라오는 주력부대에 합류하라.”
“예? 교에서 서른 명을 꼭 채워서 데려오라고…….”
“작전이 바뀌었다.”
“예?”
“네놈이 이 사람들 먹여 살릴 자신 있으면 데려가고.”
다섯 마교도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우설금의 눈치를 봤다. 예전에 받았던 명령보다 눈앞의 단천마령이 지금 내린 명령이 당연히 우선이다.
우설금의 날카로운 시선에 찔끔한 일살이 곧바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알겠습니다.”
“얼른 안 해?”
일살이 다른 네 마교도를 불러 지시를 내렸다.
그들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따질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천마령의 분노가 무서웠다.
갑자기 풀려난 사람들은 눈치를 보느라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 마음이 바뀌어 도망치는 자를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주석하는 일살에게 손을 휙휙 저었다.
“네놈들은 빨리 주력부대로 돌아간다! 다리 보이는 놈 죽는다!”
“예? 예.”
마교도들은 주석하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단천마령 옆에 있으니 당연히 높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후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마교도들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다. 그들이 포로를 잔인하게 대했지만 그 또한 마교의 관습을 고려하면 특별한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니다.
그렇기에 주석하는 전생에서 저들을 죽인 것과 달리 이번에는 저들을 놓아줬다. 다만 앞으로 마교도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우설금과 함께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마교도가 사라지자 그제야 두려움을 벗어난 포로들이 주석하의 눈치를 보며 도망쳤다.
모두 서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남았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악홍아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당신…….”
주석하는 악홍아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전생에 마교로 잠입하면서 함께 고생했던 사이라 반가웠다.
주석하의 따스한 미소에 고민에 잠겼던 악홍아가 그제야 생각난 듯 활짝 웃었다.
“당신! 그때 무림맹주랑 싸웠던 사람! 맞죠?”
“그래요.”
“와아! 정말 고맙습니다. 난 마교에 끌려가서 죽을 줄 알고 정말 걱정했거든요. 이렇게 또 구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악홍아가 꾸벅 절했다.
주석하는 그녀를 구해 전생의 은혜를 갚았다는 생각에 절로 마음이 뿌듯해졌다.
“광천곡의…….”
“네, 광천곡의 악홍아예요.”
“악 낭자,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요즘 광천곡은 어떤가요?”
“그게…….”
악홍아가 침울해져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주석하는 그 답을 안다. 사실상 광천곡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녀밖에 없어 멸문 상태다.
“광천곡 꼭 재건하세요. 먼저 가신 부모님께서 기뻐하실 거예요. 힘든 일 있으면 저에게 말씀하시고요. 아, 저는 사천 덕양에 있는 흑검문 소문주입니다.”이렇게 그녀가 문파를 재건하도록 유도하고 몰래 뒤를 봐주면 그 은혜를 보답한 건가. 주석하는 자신의 기발한 생각을 칭찬했다.
정작 그들의 뒤에서 우설금은 심상찮은 눈빛을 보냈다.
당연히 그녀는 악홍아가 누군지 몰랐다. 주석하가 잘해주는 것을 보니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러려니 무시했지만, 살짝 마음이…….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뭘요, 같은 사파끼리 돕고 살아야죠.”
악홍아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주석하는 마음의 빚을 지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만.”
주석하는 우설금과 함께 다시 마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걸었을까.
뒤에 조금 떨어져서 악홍아가 그들을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전생에서 경험한 일이다.
그때도 악홍아는 정말 마교까지 따라왔었는데. 설마 이번에도?
주석하는 고개를 홱 돌아봤다. 느긋하게 따라오던 악홍아가 기겁해서 몸을 움츠렸다.
“악 낭자, 지금 제가 가는 길은 무척 위험해요. 그러니 중원으로 돌아가세요.”
악홍아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녀는 주석하가 왜 자신을 도와주는지 몰랐지만 그와 떨어지면 다시 마교에 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림맹주에게도 밀리지 않던 주석하의 고강한 무공으로 보건대 그의 옆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실 돌아갈 곳도 없었다.
다만 옆에 있는 여자가 신경 쓰였다. 누군지 모르지만 마교도를 윽박지르는 것으로 봐선 마교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더럽게 잘생기긴 했는데 정말 마교인이라면 중원인인 저 남자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 아닌가?
저 남자는 그때도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는데…… 여자가 바뀐 것을 보니 바람둥이인가?
어쨌든 저 남자 옆에 붙어 있으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보니 분명히 호감을 품고 있어 보였다.
광천곡도 망했으니 이참에 흑검문인지 뭔지 하는 문파의 안주인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악홍아는 혼자서 별별 생각을 오간 끝에 결정을 내렸다.
“저도 따라갈 거예요.”
“마교로 가는데요?”
“그래도 갈 거예요.”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과 달라지지 않는다. 그때처럼 이 여자를 데리고 마교까지 가야 하나.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우설금이 본체만체 쓱 그를 앞질러 걸어갔다.
주석하는 후다닥 뒤를 쫓았다.
***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마교가 가까워질수록 주석하는 마교에서 비가 내리던 그 날을 떠올렸다. 계절 탓에 그때도 지금도 비가 자주 왔었다.
우설금의 시신을 옆에 두고 회귀를 결정할 때도 비가 온다. 천둥 번개가 쳤던 것 같기도 하고.
비가 내릴 때면 북해로 가면서 그녀와 홍철산을 함께 썼던, 달콤했던 시간을 그리워했었다. 지금 비가 오니까 그런 시간을 기대할 때였다.
그런데 현실은…….
우설금은 그의 앞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고 있었다. 내리는 비를 피해 홍철산을 쓰고 사뿐사뿐 걸어가고 있다.
정작 주석하는…… 비를 맞은 강아지가 따로 없다. 홍철산 아래 우설금과 함께 들어가기는커녕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이제는 완전히 젖어서 우산으로 들어가 봐야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얼굴에서 눈물인지 빗물인지 주르륵 떨어져서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옷은 말할 것도 없다.
“하아,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다정하던 우설금이 갑자기 돌변했다.
마교가 가까워져서 본색이 되살아난 건가? 악홍아가 등장한 후부터 이렇게 된 것 같기도 하고. 단지 악홍아에게 회귀 전의 신세를 갚을 것뿐인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뒤에는 악홍아가 비슷한 간격으로 떨어져서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당연히 악홍아도 비를 줄줄 맞고 있었다. 옷이 물에 젖어서 그녀의 가냘픈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숨길 수도 없지만 그녀도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석하 앞에서 자신의 몸매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오히려 주석하와 저 마교 여자가 틈이 벌어져 기회가 왔다며 좋아했다.
우설금을 따라가던 주석하는 길옆으로 비를 피할 수 있는 커다란 동굴을 발견했다.
“설금! 우리 비 좀 피하고 가죠?”
우설금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그제야 그녀는 비를 쫄딱 맞은 주석하를 발견하고는 눈매를 찌푸렸다.
주석하는 열심히 옆의 동굴을 가리켰다.
우설금이 그 뜻을 알아채고 먼저 동굴로 들어갔다.
다행히 동굴 입구 부근에서 머무를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전 모닥불을 피울 땔감을 찾아볼게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악홍아가 먼저 움직였다.
빗속에서 마른 장작을 찾아 돌아다니는 악홍아를 구경하다가 주석하는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서는 지금쯤 악홍아를 구했던가. 그날 비가 왔었는데.
이곳에서 마교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십년유심홍이 익을 때까지 시간은 충분하다. 마교에는 얼마만큼의 병력이 남아 있을까. 두 주력부대의 무력으로 총단을 공격할 수 있을까.
머리가 복잡해진 주석하는 저 멀리 마교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리는 비와 피어오르는 안개에 높은 봉우리가 흐릿하게 보였다.
생각에 잠긴 주석하를 우설금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도수는 흑검육식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의 재능은 남달라서 암흑단 내에서도 두드러지게 성장이 빨랐다. 암군의 주 검법인 암천살검을 완벽하게 습득한 후 다양한 검법을 추가로 익혔다.
그는 물을 빨아들이는 무명천처럼 다양한 검법을 흡수하여 손쉽게 십이성까지 달성했다.
암군도 그의 남다른 재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을 때 질시를 보냈던 암흑단원들도 도수의 놀라운 성장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도수는 암군의 제자로 확고한 자리를 굳히게 됐다.
지금 도수를 괴롭히는 문제는 바로 흑검육식의 마지막 초식이었다.
그가 보완한 흑검육식은 완벽했다. 그는 창시자인 흑풍검신에 빙의한 것처럼 초식의 의도를 완벽하게 찾아내어 검초를 보완했다.
백번 검토한 결과 다른 검로는 없다고 장담할 만큼 흑검육식은 완벽해졌다. 그는 흑검육식의 원래 초식을 복원했다고 확신했다.
다만 마지막 초식만은 어떻게 해도 펼칠 수가 없었다. 암군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남의 문파 초식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아, 이상하네.”
“여전히 잘 안 되나 봐?”
옆에서 녹윤영이 마른 수건을 건넸다.
그때 소림사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 녹윤영은 암흑단에 남았다. 암군과 혼군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기에 암군도 그녀의 방문을 허락한 상태였다.
둘 사이는 놀랄 만큼 가까워졌다. 그날 울부짖는 도수를 녹윤영이 따뜻하게 안아주고 난 후부터다.
“흑풍검신의 의도는 확실해. 그런데…… 인간이 펼칠 수 있는 검로가 아니야.”
“가끔 인간 아닌 사람들이 있어.”
도수는 녹윤영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주석하 같은 괴물을 손자로 둔 사람이라면 인간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물론 녹윤영이 지칭한 인간이 아닌 사람은 도수였다.
도수가 수건으로 땀을 닦는 동안 녹윤영이 양피지 서신을 꺼냈다.
“할아버지께서 연락하셨어. 주 공자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게다가 무림맹의 이상한 병력 이동도 감지되었다고.”
주석하와 우설금의 동향이 나오자 도수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우설금이다.
그런데 그는 우설금의 외숙부를 죽였다. 소림사 탈출 후 우설금을 검으로 찌르고 도망치면서 은원을 마무리하자고 다짐했었다.
우설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인 주석하를 위해서였다.
그랬던 일이 그녀의 외숙부를 죽이면서 물거품이 됐다. 그와 그녀는 다시 물고 물리는 은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직 그녀를 용서하지 못했어?”
녹윤영이 우려를 드러냈다. 정신적인 방황은 수련에 방해가 된다. 심하면 자칫 주화입마까지 유발할 수 있다.
“나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지만…….”
아직 녹윤영에게 그날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