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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55화 (255/273)

255화 거듭된 인연 (3)

심각한 표정을 거두지 못하는 도수를 째려보던 녹윤영이 등을 후려갈겼다.

“도수답지 않게 왜 이래?”

“뭐가?”

“털어내기로 했었잖아? 그게 주 공자와의 인연을 끊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도수는 녹윤영과 인생 상담을 하며 내렸던 결론을 기억했다. 그때는 분명히 그랬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또 일이 터졌다는 것뿐. 우설금이 그 일을 따지고 들면 그도 어쩔 수 없다.

“그, 그렇긴 한데…….”

“쪼잔하게…… 한번 결심했으면 해야지. 뭘 고민해? 네 결론은 그때 우 소저가 네 부친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곤륜파에서 손을 썼을 거라며?”

“그렇긴 해.”

“그럼 그렇게 믿어. 우 소저가 원수가 아니라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있잖아?”

물론 녹윤영도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그렇기에 도수에게 계속 일깨우고 있다. 그와 주석하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설마…… 우 소저를 겁내는 거야?”

“그럴 리가.”

우설금의 무시무시한 신분을 안 이후부터 겁이 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도수는 이 문제에 우설금의 신분이나 무공을 고려했던 적이 없었다.

“그 여자가 겁나면 나에게 말해. 내가 혼내줄 테니.”

“네가 어떻게?”

“주 공자를 쥐 잡듯 잡아버리지. 주 공자가 먼지 나게 털리는데 그 여자가 안 움직이면 사람도 아니지.”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도수는 녹윤영의 말이 절대 헛소리가 아님을 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챙겨주는지도. 일찍이 그를 이렇게 신경 써주는 사람은 없었다.

부모와 사문을 잃고 혈혈단신이 된 자신을 돌봐주는 그녀가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그래서 말인데 주 공자를 도우러 가자!”

“어디로?”

“할아버지 서신에 따르면 주 공자가 십만대산으로 움직이는 것 같더라고.”

우설금 때문이다. 도수는 금방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챘다.

그는 우설금이 누구인지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주석하가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 직감했다.

생사를 걸고 일생일대의 승부를 노리고 있다는 것까지.

“내가 가야겠어.”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할아버지도 움직이시겠데. 무려 혼천교도를 이끌고.”

“가는 길에 덕양에도 들러봐야지.”

“덕양에는 왜?”

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흑검문 가족

또한 주석하를 염려하고 있을 게 뻔했다. 과거 하북팽가 원정을 떠올린 도수는 본능적으로 흑검문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다.

녹윤영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도수를 쓱 훑었다.

“너! 그 백화루인지 뭔지 거기 가려는 거지?”

“어? 백화루?”

“거기 백화루 부루주라며?”

녹윤영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그, 그건 석하가…… 하라고 해서…….”

“주 공자가? 좋아! 주 공자가 백 명의 기녀와 그! 렇! 게! 놀라고 했단 말이지? 내 그 자식을 그냥…….”

녹윤영이 갑자기 팔을 걷었다.

도수는 눈을 크게 뜨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아무래도 녹윤영이 그의 백화루 행적을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섬뜩한 녹윤영의 눈빛이 비수처럼 날아왔다. 기겁한 도수는 후다닥 그녀를 피해 연무장을 벗어나려 했다.

그의 길을 막는 거대한 체구의 중년인이 있었다.

“야! 급하다! 비켜! 비켜!”

뒤로 녹윤영을 곁눈질하면서 달아나던 도수는 급기야 중년인과 부딪쳤다.

“도수야! 어디 가느냐?”

“어? 헉! 사부!”

도수는 기겁해서 허리를 팍 숙였다. 언제 왔는지 암군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암군이 도수와 녹윤영을 쓱 훑어보고는 용건을 말했다.

“나도 혼군에게서 서신을 받았다. 지금 정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구나. 흑검서생이 마교로 이동하고 있고, 그 뒤를 마교 주력부대가 따라가고 있다. 문제는…… 그 뒤를 무림맹에서도 추적하고 있다는 거다. 구대문파 연합 부대가 말이지.”암군도 최근 정세를 꿰뚫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갑자기 마교 주력부대가 방향을 틀었다는 점이다. 덕분에 중원 무림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도수는 주석하를 도우러 가고 싶었기에 당연히 의견을 붙였다.

“석하를 도와야 합니다.”

“흠, 그러냐? 무림맹의 움직임으로 보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만사지존의 죽음으로 칼을 갈던 맹주와 자하검존이 마침내 무력을 동원한 것을 보면 낌새가 이상해.”

“그러니까 우리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어떨까요?”

혼자서도 떠날 생각이었던 도수는 적극적으로 원정을 권했다.

“혼천교에 발맞추려면…… 우리도 그래야겠지. 뇌군에게도 연락해봐야겠어.”

“사천을 통해서 가야 합니다!”

도수의 우렁찬 대답에 녹윤영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백화루 근처에만 가도 다리를 부러트려 버릴 생각이다.

***

내리는 비가 제법 거세지자 주석하는 이 동굴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로 했다. 비는 오고 떠나기는 어려우니 동굴에서 하룻밤 묵고 가는 수밖에.

어차피 이 동네는 인가가 드물고 온 동네가 산이라 어디에서든 노숙해야 하니 차라리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이 낫다.

품을 뒤져 육포를 찾던 주석하는 문득 모닥불에 시선이 갔다.

악홍아가 빗속을 헤매면서 주워온 나뭇가지를 태워 모닥불을 만들어 놓으니 제법 운치가 있었다.

타닥- 타닥-

어둠이 내린 산, 적막을 깨는 빗소리, 마음을 가라앉히는 모닥불 타는 소리…….

잠시 멍하니 불을 쳐다봤다. 불에는 혼을 사르는 묘한 끌림이 있다. 언젠가는 저 불처럼 몸을 불사르고픈 욕망이 꿈틀거린다. 자신을 위해, 또 그녀를 위해.

주석하는 우설금을 흘겨봤다. 모닥불에 음영이 진 그녀의 얼굴이 무척 아름답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이곳이 지상이 아닌 천상으로 착각하게 된다. 아니면 꿈속이든가.

정신적인 고뇌 때문에 야윈 그녀를 보고 있자니 고기가 생각났다.

“토끼나 새가 있는지 찾아보고 올게요.”

주석하는 옷을 털고 일어났다.

“토끼 잡아먹게요?”

악홍아가 반색했다. 그녀는 잡혀 오는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먹을 것이 없어 굶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러니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나가려는 그의 앞으로 홍철산이 날아왔다.

홍철산을 받아든 주석하는 우설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불만 쳐다보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비를 피하라는 그녀의 따뜻한 배려가 고마웠다.

주석하는 홍철산을 펴고 빗속을 나섰다. 우산까지 받았으니 적어도 참새 한 마리는 잡아야 돌아올 수 있다.

우설금과 단둘이 남게 되자 악홍아는 우설금의 눈치를 봤다.

악홍아는 우설금의 정체가 궁금했다. 마교인들이 그녀에게 꼼짝 못 하던 장면을 봤기에 마교 사람인 건 확실한데…….

게다가 방금 홍철산도 그냥 휙 던진 것 같아 보여도 사실 허공섭물을 이용해서 정확히 주석하의 손에 떨군 것임을 알아챘다.

감히 그녀가 흉내 낼 수 없는 고수란 뜻이다.

조금 겁이 났으나 주석하를 믿기로 했다. 주석하가 자신에게 잘 해주니까 이 여자도 그의 얼굴을 봐서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저…… 통성명하죠?”

악홍아는 모닥불 건너에 있는 우설금에게 말을 던졌다.

우설금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녀에게로 넘어왔다.

‘흐악!’

악홍아는 비명을 지르려다 가까스로 삼켰다. 여인의 얼굴이 눈을 돌릴 수 없을 만큼 예쁘긴 한데…… 어딘지 모르게 살을 저미는 듯한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왕 말을 걸었으니 꿋꿋하게 버티자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 악홍아라 해요. 운남 광천곡 소문주였는데…… 최근에 쫄딱 망해서 떠돌아다니다가 마교에 잡혀 여기까지 왔어요. 하아! 내 인생은 왜 이리 꼬이는지……. 남들은 멋진 남자랑 잘만 살던데……. 그쪽은 주 공자가 설금, 설금 그러던데…… 이름이 어떻게 돼요?”

“우설금.”

우설금이 딱 자신의 이름만 말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조금 마음이 상했으나 악홍아는 참기로 했다.

“출신은요?”

“마교.”

“흐악!”

자신도 모르게 악홍아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미 예상했었는데도 듣고 나니 식은땀이 쭉쭉 흘렀다. 그래도 여기에서 포기하면 앞으로 두 사람을 따라다니기 더 힘들 것 같아 다시 용기를 냈다.

“그, 그럼 둘이서 마교 총단으로 가는 거예요?”

답이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깊은숨을 내쉬며 가슴을 안정시킨 악홍아는 무거운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주, 주 공자랑 어떤 사이예요? 무척 가까워 보이던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자 우설금이 그녀를 노려봤다. 그 눈빛에서 악홍아는 이미 대답을 알 수 있었다.

‘내 거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거지?’

그녀의 눈빛을 확실하게 읽었다. 물론 그녀도 두 사람의 분위기에서 그 정도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우설금의 냉랭한 태도 때문에 둘 사이가 생각만큼 다정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사이라고 추측했다.

‘왜 멋진 남자는 항상 임자가 있는 거야?’

기회는 있다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마음을 진정시킨 악홍아는 다시 질문했다.

“두 사람 어떻게 만났어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아직도 우설금은 물끄러미 불만 쳐다볼 뿐 그녀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도발하겠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그럼 더 센 걸로?

“혹시…… 같이 잤어요?”

악홍아의 질문에 우설금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노려봤다.

그 눈초리가 무시무시했으나 악홍아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우설금의 반응을 보니 같이 자기는커녕 아무것도 못 해본 게 확실했다. 아직 기회는 남아 있고 배도 떠나지 않았다.

그럼 조금 더 놀려볼까?

“그럼…… 입맞춤은 해봤어요?”

푸아악-

“으악!”

악홍아는 갑자기 기운이 확 밀려오자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몸이 태풍을 맞은 것처럼 뒤로 밀려나 동굴 벽에 그대로 처박혔다.

“으으으.”

그녀는 쑤시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신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신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승리가 훨씬 강했다. 둘은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못 한 사이가 확실하다.

‘그렇지. 저렇게 싸늘하고 무서운 여자를 좋아할 남자가 어디 있어.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고통 속에서도 악홍아는 상상의 나래를 폈다.

정작 우설금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불을 보며 멍 때리고 있었다.

***

토끼고기를 맛있게 먹고 주석하는 배를 두드렸다.

악홍아는 연신 그의 사냥 실력을 칭찬하면서 고기 굽기를 거들었다.

그리고 맛있게 먹었다. 마치 걸신들린 사람처럼. 실제로 그녀는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여 무척 배가 고프던 차였다.

반면 우설금은…… 고기 몇 점을 깨작거리다가 맛이 없는 듯 금방 손을 거두었다.

가끔 주석하 옆에서 법석을 떠는 악홍아를 힐끔거리며 미간을 찌푸리다가 다시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동굴 바닥에는 먹고 난 토끼 뼈가 수북이 쌓였다.

주석하는 나름 만족했다. 어쨌든 육포보다는 훨씬 나은 진수성찬이었으니까.

어둠에 싸인 동굴 밖은 비가 잦아들었으나,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그리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배가 부르니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부근을 둘러보고 올게요. 피곤하면 먼저 자요.”

주석하는 두 사람에게 말하고는 동굴을 나섰다.

“같이 가요.”

우설금이 홍철산을 들고 따라 나왔다.

당연히 주석하는 우설금을 반겼다. 비를 피할 수 있는 홍철산도 반가웠지만 그녀와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걸으면 더 기분이 좋다.

우설금이 홍철산을 펴자 주석하는 냉큼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나도 같이…….”

무심코 말을 꺼내며 동참하려던 악홍아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뒤를 돌아보는 우설금의 눈빛이 섬뜩했다.

“허윽! 다, 다녀오세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악홍아는 손을 내저으며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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