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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56화 (256/273)

256화 거듭된 인연 (4)

홍철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경쾌했다.

‘이렇게 함께 빗속을 걷는 게 얼마만이지?’

비를 맞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우설금과 딱 붙어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우설금에게서 특유의 향기가 났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졌다.

예전에는 몰랐었다.

북해로 가면서 함께 홍철산을 쓴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그때는 좋으면서도 무덤덤했었다.

살짝 그녀의 분위기가 두렵기도 했었고. 이런 시간이, 단둘만 몸을 부대끼는 시간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었다.

그녀를 잃고 나서야, 그녀가 천마에게 죽고 나서야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물론 사람이란 배가 부르면 따뜻한 방이 그립고, 따뜻한 방에 앉으면 옆을 채워줄 반려가 필요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주석하는 그녀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우설금이 살짝 미간을 모으면서 그를 쳐다봤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다시 툭 건드렸다.

다행히 그녀는 미소를 띠고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낮부터 왠지 냉랭해진 그녀가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아 기분이 흡족했다.

주석하는 용기를 내어 한 손으로는 홍철산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얼핏 꿈틀거리던 그녀의 반응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몸이 딱 밀착해서 홍철산 안으로 쏙 들어갔다.

주석하는 그녀를 가진 기분이 들어 매우 만족스러웠다.

“앞으로 우리는 어디에서 살까요? 생각해봤어요?”

아직 우설금은 거기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그녀는 온통 천마에게 신경이 쏠려 있으니까. 마교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그녀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다만 떠오르는 기억은 있었다.

함께 살자며 손을 붙잡던 노부인. 그녀의 외할머니와 따뜻한 친척과 함께 한집에서 사는 그런 시간을 경험하고 싶었다.

“……이가장에 갔더니 할머니가 계셨어요.”

주석하는 이가장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리고…… 나랑 닮은, 같은 또래의 여자가 있었어요. 이설은이라고요. 하남일봉이라고 했어요.”

“설금 닮았으면 예쁘겠네요.”

주석하는 머릿속으로 설금과 설은을 되새겼다. 이름에서부터 두 사람이 혈연지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설금은 불현듯 안면이 확 달아올랐다.

방금 주석하의 말은 그녀가 예쁘다는 뜻 아닌가.

물론 그녀도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안다. 살면서 무수히 들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주석하의 칭찬이 가슴을 뛰게 했다.

비 때문에, 단둘이, 그것도 우산 아래에서…… 그래서 이런 기분이 드는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같이 살자고 했어요. 언제든 오라고…….”

“좋은 분이시네요.”

주석하는 그녀와 보폭을 맞추면서 이가장에 있는 우설금을 상상했다. 나쁘지 않다. 그녀와 결혼하면 이가장 또한 그가 자주 방문할 곳이 되니까. 정감이 묻어나는 곳이라면 대만족이다. 우설금에게도 큰 도움이 될 테고.

혼인한 후에 흑검문과 이가장을 오가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부부를 연상했다. 돈은 백화루에서 끊임없이 나올 테니 이거야말로 만족스러운 삶 아닌가.

천마만 죽이면 바로 무림에서 손을 털어버릴 것이다! 주석하는 회귀하면서 다짐했던 삶의 목표를 다시 떠올렸다.

정작 우설금은 이가장을 떠올리다 외숙부의 죽음을 생각해냈다. 외숙부를 찌른 도수의 검과 원수를 갚겠다며 울분을 삼키던 사촌 동생 이명까지.

그녀는 도수의 아버지를 죽였고 도수는 그녀의 외삼촌을 죽였다. 그 은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기분이 가라앉고 침울해졌다.

반대로 기분이 좋아진 주석하는 우설금의 허리를 더욱 끌어당겼다. 생각에 잠긴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오늘은 뭔가 될 듯한 기분이다.

‘큭큭, 역시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는 거지.’

주석하는 깜깜한 주변 산속을 휙휙 둘러보며 음흉한 생각을 떠올렸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만리장성을 쌓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몸에 착 달라붙은 그녀의 몸이 매우 부드러웠다.

그는 허리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면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설금이 앞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럴 때는 손이 둘밖에 없어 아쉽다. 그렇다고 허리를 놓을 수도 없고 우산을 던져버릴 수도 없으니.

저 얼굴을 돌려야 하는데. 그리고 입을 맞춰야 하는데 아무래도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다. 손이 없어서.

‘……그럼 입술은 말고 빰에…….’

주석하는 우설금의 뺨을 노리고 고개를 숙였다.

이상한 기척을 느낀 우설금이 무심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만날 듯 스쳐 지나갔다.

푸아악-

우설금의 신형에서 홍색 강기가 피어올랐다. 그 강기는 주석하의 몸을 멀리 밀어냈다.

“으아악!”

난데없는 기습에 주석하는 십여 장이나 밀려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땅에 고인 빗물을 뒤집어쓰면서 행색이 엉망이 됐다. 홍철산도 저쪽으로 휙 날아갔다.

순간적으로 스친 입술에 놀라기는 주석하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무방비 상태로 우설금의 강기를 맞았고 그 결과는 흙탕물에 처박히는 것이었다.

“헉!”

우설금이 놀라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낭패를 당한 주석하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진흙이라 발이 쭉 미끄러졌다.

그 순간 주석하는 자신이 딛고 있는 지면이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갑자기 온몸이 허공에 떴다. 발에 닿는 부분이 없었다.

“으아악!”

놀란 주석하는 본능적으로 땅에 박힌 풀포기를 잡았다. 버둥거리면서 뒤를 돌아봤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천 길 낭떠러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날벼락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우설금도 금방 알아챘다.

그녀는 정신없이 주석하의 손을 낚아채고 끌어당겼다.

물론 주석하는 화판답공을 익혀 낭떠러지에 떨어질 일이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는 우설금의 손을 생명줄처럼 붙잡았다.

그를 끌어올린 우설금을 부둥켜안고 절벽 가장자리 한쪽 옆에서 나뒹굴었다. 바닥이 온통 흙탕물이었으나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쏴아아아-

비를 맞으면서 주석하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난리 통에 그의 아래에 깔려 우설금이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그런 우설금을 그가 몸을 포갠 채 누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닿을 듯 가까웠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일까? 어디가 절벽이고 어디가 안전한지는 이미 머리를 떠나고 없었다.

지금이 기회일까.

‘열 번 찍는다는데 난 이제 세 번째인데…….’

주석하는 생각할 틈도 없이 우설금에게 입을 맞추었다. 버둥대던 우설금이 조용해졌다.

내리는 비가 주석하의 등을 흠뻑 적셨으나 이미 감각은 사라지고 없었다.

***

갑작스럽게 방문한 시커먼 혈혼도객 때문에 남궁세가가 뒤집혔다.

최근에 가주인 남궁후가 제갈휘와 불협화음을 겪으면서 남궁세가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항상 정파의 중심에 서 있던 남궁세가였기에 이런 현상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정파도 아닌 사파 인물이 찾아왔으니 모두의 이목이 주목될 수밖에.

남궁천은 혈혼도객이 흑검문 문하라는 사실을 알기에 환대했다. 흑검문은 주석하의 사문이기도 하고 조부 때 구주사은으로 인연을 맺었던 곳이기에 당연히 귀빈으로 맞이했다.

“어쩐 일입니까?”

문 앞까지 뛰어와 반기는 남궁천 덕분에 혈혼도객도 어깨를 쫙 폈다.

“소문주께서 서신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혈혼도객은 품에서 서신 두 개를 꺼냈다.

당연히 서신이 하나라고 생각했던 남궁천은 깜짝 놀랐다.

“이건…….”

“하나는 주석하 소문주께서 보내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소은 아가씨께서 보내신 겁니다.”

“아!”

갑자기 설레는 가슴을 남궁천은 간신히 진정시켰다.

남궁천은 먼저 주석하가 보낸 편지를 열었다.

편지를 읽는 남궁천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편지에는 최근에 벌어진 강호 정세와 주석하의 개인 행로 의견이 적혀 있었다.

우설금과 함께 마교로 가서 천마를 심판하겠다는 내용에 남궁천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천마가 누구인가? 중원 무림인의 원수이자 모두가 두려워하는 최강의 인물 아닌가. 당금 무림에서 천마와 싸워 이길 자는 아무도 없다. 천마는 설사 정파십존이 연합한다고 해도 장담할 수 없는 극강의 고수다.

그런 천마를 주석하가 홀로 찾아갔다. 천마를 죽이는 것은 고사하고 과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남궁천은 걱정되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했다. 걱정은 되지만 어찌할 방법은 없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다. 비록 최근에 무림맹과의 교류가 끊어졌다고 하지만 이래저래 무림맹 관련 정보가 많이 들어온다.

방금 읽은 서신 내용과 확보한 무림맹 정보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서로 연결됐다.

“개 같은 놈들!”

“예?”

화들짝 놀라는 혈혼도객에게 남궁천은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 무림맹 놈들에게 한 겁니다. 그 자식들의 꿍꿍이가 딱 보이는군요.”

“아!”

어차피 무림 정세에 관심 없는 혈혼도객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궁천은 그 자리에서 고민에 잠겼다.

머릿속에서 최근 이 년 간 벌어진 정파십존의 죽음과 구대 문파와 오대세가의 몰락, 약화한 무림맹에, 형제와 같았던 중원사룡의 죽음 등이 복잡하게 엉켰다.

놀랍게도 그 사건의 중심에 주석하가 존재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 대부분이 주석하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란 점이었다. 이미 죽은 만사지존 제갈휘의 작품이었다.

그가 보기에 주석하는 정파도 사파도 아닌 중간에서 중심을 잘 잡고 있었다. 그가 들었던 과거의 흑풍검신처럼.

만일 주석하가 마교 정벌에 성공한다면 향후 무림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건 기회가 아닌가…….”

무림맹주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주석하를 치러 마교로 원정을 떠났다면 지금 하남의 무림맹 본산은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잖아도 무림맹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은 남궁천이었다.

무림맹을 뒤집어볼까?

갑자기 젊음의 피가 끓었다. 무모하지만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

이건 그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

살아있는 거의 유일한 정파십존인 아버지를 부추겨서 거사를 벌여볼까. 물론 마교 원정에서 무극천존과 자하검존이 죽거나 세력을 잃고 주석하가 승리한다는 가정하에서다.

왠지 모르게 남궁천은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그는 주석하를 믿으니까.

결심을 굳힌 남궁천은 조용히 서신을 내려놓고 다른 서신을 뜯었다.

“허억!”

남궁천은 다급하게 코를 움켜쥐었다. 갑자기 코피가 줄줄 났다.

“어? 소가주님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닙니다. 최근에 일이 많아 조금 무리했나 봅니다.”

다급하게 마른 수건으로 코피를 닦은 남궁천은 얼굴을 물들이며 물었다.

“혈혼도객께선 언제 돌아가십니까?”

“빨리 가야죠. 소문주님께서 안 계시면 모두가 불안에 떨어서 말입니다. 저라도 흑검문을 튼튼하게 지켜야지요. 제가 바로 흑검문의 마당쇠…… 아니 버팀목 아닙니까?”

“아, 그렇죠. 빨리 가셔야죠. 그러면 혹시…… 가시는 길에 답신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뜻밖의 부탁에 혈혼도객이 눈동자를 크게 떴다.

“하하, 제가 충분한 사례금을 드리겠습니다. 여비가 풍족하게요.”

‘사례금!’

혈혼도객의 입이 떡 벌어졌다. 며칠 전에 돈더미에 깔려 죽는 꿈을 꿨었는데…….

“뭔 여비까지…… 남궁 소협 부탁이라면 당연히 전해야지요.”

혈혼도객은 찢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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