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합종연횡 (2)
무작정 천마와 승부를 내려면 부담스럽지만 무극천존이라면 고민할 필요 없다.
무극천존 옆에 있을 구파 장문인과 이대호법, 자하검존까지 전생에서 모두 상대해보았었다. 그때는 그 혼자였고 지금은 옆에 우설금마저 있다. 사실상 타격을 입지 않고 압도적으로 누를 자신이 있다.
그렇기에 주석하는 무림맹이 주둔한 지역을 방문하면서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위세를 떨 수는 없다.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지면 천마에게 빌미를 줄 수 있으니까.
주석하는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하늘에 달이 떴다. 달을 보니 우설금이 죽었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이 보름달이었는데…… 오늘 달은 보름 직전이다.
‘이틀 뒤가 보름인가…….’
보름이 중요한 이유는 그날 십년유심홍의 열매가 완전히 익기 때문이다. 무려 일갑자나 되는 내공을 천마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다. 천마가 지금 당장 그들을 치지 않는 이유에 십년유심홍이 분명히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전생에서도 천마는 십년유심홍 열매 때문에, 일갑자 내공을 욕심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천마는 이번에도 비슷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래서 주석하는 적어도 저 달이 보름달이 되기 전에는 천마가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자신했다.
“자, 무극천존을 만나러 가볼까요?”
주석하는 우설금을 부추겨 막사를 나섰다. 적색궁장에 홍철산까지 챙긴 우설금이 그를 따라나섰다.
최근 막사에 머물며 단조로운 시간을 보냈기에 한바탕 기분을 전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일대의 지형을 완벽히 알기에 그들의 움직임은 빨랐다.
마교로 올라오던 길이 아닌 옆길을 뚫고 그들은 손쉽게 무림맹이 주둔한 지역에 도착했다.
부근 야산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무림맹 병력 규모는 지금 우설금이 거둔 주력부대와 비슷했다.
단순히 양측이 전쟁을 벌이면 마교의 압승이다.
무림맹은 최근 구대문파와 무림세가가 큰 타격을 입은 데다 급하게 병력을 모았기에 대규모 원정이 어렵다. 어찌 보면 이만큼 끌고 온 것도 대단하다고 할만했다.
“예상보단 전력이 꽤 되네요.”
주석하는 대략적인 평가를 끝내고 우설금을 슬쩍 봤다. 우설금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아마도 무림맹 진지를 보는 순간 마교의 위기를 떠올렸음이 분명하다.
“문제는…… 수뇌부가 얼마나 왔느냐인데 내 예측으로는 구파 장문인이 꽤 동참했을 거예요.”
전생에서 보은사에 모인 이들을 봤었기에 주석하는 자신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무서운 것은 아니다.
찬찬히 훑어보고 있자니 중앙에 지어진 큰 막사가 보였다. 무극천존을 비롯한 구파 장문인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용도일 것이다.
“저기에 있겠죠…….”
무심코 설명하던 주석하는 눈을 부릅떴다.
마침 막사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그의 눈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무극천존을 비롯하여 나이가 지긋한 구파 장문인들. 그런데 그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아! 묵천마령이 왜 저기에…….”
우설금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막사에서 나온 인물 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묵천마령이 보였다. 묵천마령과 구파 장문인들의 분위기는 예상과 달리 훈훈했다. 서로 포권을 취하면서 예의를 다하고 있으니 마치 십년지기를 만나 환대하는 장면 같다.
예상치 않은 상황에 주석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묵천마령이 개인 자격으로 적진에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마의 사자 자격으로 왔을 것이고 그들이 나눈 대화는…….
감이 왔다.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
우설금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왔다.
“묵천마령과 만나려고 했었잖아요? 이렇게 기회가 왔으니 굳이 피할 필요 없죠.”
무림맹 진지에서 묵천마령을 만날 일은 없다. 묵천마령이 총단으로 복귀하는 중간에 붙잡아야 한다.
주석하가 먼저 적당한 장소로 몸을 날리고 우설금이 뒤를 따랐다.
오래지 않아 묵천마령이 눈앞에 나타났다.
“묵천마령!”
덤불 속에서 우설금이 모습을 드러냈다.
걸음을 재촉하던 묵천마령은 우설금을 발견하는 순간 몸이 굳었다. 그는 재빨리 주위를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주석하가 숨어 있는 덤불을 본 직후다.
묵천마령쯤 되는 고수의 눈을 피하기는 역시 쉽지 않다. 주석하도 바로 몸을 일으켰다.
이 자리는 우설금이 풀어야 하기에 주석하는 수하처럼 우설금 뒤에 조용히 섰다. 그래 봐야 묵천마령이라면 누구인지 금방 눈치채겠지만.
“오랜만이에요.”
우설금의 인사에 잠시 고민에 잠겼던 묵천마령이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있소?”
“물론요.”
평소 그녀와 묵천마령 사이가 남달랐기에 이런 대화가 오갈 수 있었다.
묵천마령이 그녀에게 손가락을 까닥이며 접근했다.
일순간 우설금도 주석하도 긴장했다. 묵천마령 같은 고수가 근거리에서 작심하고 기습하면 방어하기 쉽지 않다.
다행히 묵천마령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천마는…… 당신을 배신자라 낙인찍었소. 정말 그렇소? 억울한 부분이 있다면 내가 중간에서 중재해드리겠소.”
“정말입니다. 전 천마와 싸워 천마의 자리를 차지할 거예요. 마교의 율법에 어긋난 일이 아니잖아요?”
우설금이 발설한 엄청난 선언에 묵천마령의 동공에 지진이 났다.
“정말 천마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당연하죠. 그렇지 않다면 시작도 안 했겠죠.”
“하아! 당신 정말!”
“묵천마령! 당신도 이게 교를 배신하는 짓이라 생각해요? 마교는 강자존의 율법이 합법화한 곳이죠. 난 그 율법에 따라 도전할 뿐입니다.”
“문제는 그게 천마란 거요! 역대로 천마에게 도전한 자는 없었소. 모두 뒤에서 작당을 꾸미다가…….”
묵천마령이 뒷말을 잇지 못했다.
우설금은 꿋꿋하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나도 알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대대적으로 선언하고 나선 거죠. 당신은…… 공정하게 주관하면 됩니다. 내 편을 들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묵천마령은 아픈 머리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연이어 쏟아냈다.
따지고 보면 단천마령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 솔직히 최근의 마교는 너무 평화로웠다.
마교수호사령에 도전한 자도 없었고 마교칠왕에 도전한 자도……. 마교 본래의 생기가 사라졌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으나 지금 당면한 문제는 그게 아니라 단천마령이다.
묵천마령의 시선이 우설금 뒤로 향했다.
“저자는…….”
“그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에요. 흑검서생이라고 이미 알고 계시죠?”
주석하는 빙그레 미소를 날렸다.
당황한 묵천마령이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알겠소. 어차피 당신에게 전할 사항도 있었으니…….”
주석하를 힐끔거리면서 눈치 보던 묵천마령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틀 후, 해가 떨어지는 시각에 영빈관에서 삼자 회담을 열거요. 참석자는 본교와 무림맹과 당신네요. 금천마령, 무극천존, 흑검서생이 대표가 되어야 하오.”주석하는 자신이 대표란 말에 주목했다. 단천마령이 아닌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의미가 뭘까.
“알았어요. 회담에서 무슨 논의를 하죠?”
“천마께선 마교 본산이 전쟁으로 얼룩지는 사태를 싫어하시오. 그래서 서로 간에 전쟁 없이 해결해보자는 취지요. 당신도 적 앞에서 우리끼리 분란이 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거요. 천마께서는 흑검서생과 무림맹의 은원은 각자 중원에서 처리하고 마교 문제는 당신과 천마 둘이 별도로 해결하겠다고 하셨소. 우리 측의 계획은 이러하니 당신과 무림맹의 의사를 들어보겠다 하셨소.”천마로서는 당연한 제안이기에 우설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때 영빈관에서 뵙죠.”
말을 전한 묵천마령이 돌아서 떠나려 할 때였다.
이번에는 주석하가 재빨리 개입했다.
“묵천마령! 더 할 말이 있을 텐데?”
돌변한 주석하의 태도에 묵천마령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
“이놈이? 네놈은 단천마령 덕에 목숨을 부지하는 줄 알아라!”
묵천마령이 무시하고 피해 가려 했으나 주석하는 여전히 그의 앞을 막았다.
난감한 표정으로 묵천마령이 단천마령을 돌아봤다.
우설금은 팔짱을 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두 사람을 주시했다.
주석하의 적의를 눈치챈 묵천마령이 몸에서 강한 마기를 뿜어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묵천마령! 다시 물어보겠다. 할 말이 그것뿐이냐?”
“놈! 무슨 소리야?”
“방금 전한 것은 공식적인 내용이고…… 숨긴 거 있잖아? 정말 단천마령이 궁지에 몰리기를 원하나?”
“…….”
묵천마령이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주석하는 빈정거리듯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었다.
“서로 아는 처지에 너무 그러지 말자고. 당신의 성격은 내가 잘 알아. 어차피 단천마령이 천마를 누르면 단천마령에게 붙을 거 아냐? 물론 지금이야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허튼소리!”
“천마가 금천마령, 은천마령과 힘을 합쳐서 나와 단천마령을 없애라 했겠지. 안 그래?”
“그, 그런 적 없다!”
“쓴맛 볼래? 정신 차리게 해줄까?”
우우우웅-
주석하의 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일었다.
묵천마령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는 마교수호사령이다. 중원의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을 안중에 두지 않은 지 오래다. 최근에 흑검서생이 제법 위명을 날린다지만 감히 마교수호사령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 녀석이 안하무인으로 덤비다니! 가소로웠다.
“쓴맛? 진정한 쓴맛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묵천마령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묵빛의 마기가 뻗었다.
주석하는 그것이 묵천마공임을 확인했다. 예전에 대결했을 때 마교수호사령은 각자의 특이한 마공으로 대항했었다. 우설금이 단천마공을 사용하는 것처럼.
묵천마령의 손바닥에서 커다란 구 모양의 빛이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진한 회색빛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거 묵천마공이냐? 마교 장서각에 꽂혀 있긴 하던데…….”
“뭐?”
묵천마령은 대경했다. 특별한 비밀은 아니라지만 묵천마공 비급이 장서각, 그것도 최상층 인물만 들어갈 수 있는 서재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주석하가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뭘 놀래? 절대천마공도 꽂혀 있는 거 다 봤어.”
“이, 이놈이! 대체 네놈은 뭐냐?”
마교의 비밀을 속속들이 아는 주석하가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 그럴수록 주석하를 죽여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묵천마령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주석하를 향해 묵천마공을 폭사했다.
주석하의 무공이 흑도팔군 수준을 넘었다고 평가했기에 당연히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다.
“내가 네놈이 펼친 마벽이란 것도 한방에 깨는 사람이야. 알아서 기어라, 응?”
“으아아!”
흥분한 묵천마령이 모든 내력을 쏟아부었다.
묵천마공이 전신을 감싸는 순간 주석하도 극양염천신공을 쏟아냈다.
콰아아앙!
주석하에게 휘몰아쳤던 묵천마공이 한 방에 찢겨나갔다.
묵천마령의 공격은 가볍지 않았다. 마교수호사령이 전력을 기울인 것이다. 하지만 주석하를 어떻게 할 수준은 아니다.
오히려 양쪽의 신공이 만나는 순간 묵천마령은 거대한 벽에 부딪힌 충격에 휩싸였다. 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바로 마공을 끌어올리기 힘들 만큼 만만찮은 충격이 전신 혈맥에 전달됐다.
“크윽!”
놀란 묵천마령이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그는 상대의 무공이 자신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음을 눈치챘다.
“왜? 또 덤벼봐?”
주석하의 빈정거림에 분을 참지 못하는 묵천마령을 우설금이 가로막았다.
“그러다가 죽어요!”
묵천마령은 넋이 나간 듯 우설금에게 손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