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합종연횡 (3)
“비켜라!”
묵천마령은 사생결단을 내려는 듯 우설금을 향해 장력을 뿌렸다.
자신을 공격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우설금이 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무엇이 묵천마령을 당황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보기에 묵천마령은 지금 마구잡이로 덤벼들고 있었다. 상대가 현저히 약하지 않다면 저런 공격에 당할 바보는 없다.
우설금이 비키는 순간 주석하의 한 손이 묵천마령의 마공을 깨고 들어갔다.
턱!
주석하는 묵천마령의 완맥을 꽉 잡았다.
“엇?”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마교를 대표하는 고수인 자신이 이런 식으로 제압당하리라고 예상치 못했던 묵천마령은 내력을 끌어올려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잡힌 팔을 도저히 뺄 수 없었다.
“에잇!”
공력이 주입된 묵천마령의 팔이 경련을 일으켰다.
주석하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기회에 묵천마령의 능력을 확인해볼까?
묵천마령은 마교수호사령의 표준이다.
금천마령이나 은천마령은 그보다 강하고 단천마령은 그보다 약하다. 그렇기에 묵천마령의 무공을 제대로 파악하면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을 상대할 견적이 나온다.
전생에 싸웠을 때는 워낙 흥분했고, 막무가내로 돌파했기에 그들의 무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고오오오-
완맥을 잡힌 상태에서 상대의 공력이 상승하자 묵천마령은 아예 내력 대결로 전환했다. 그는 완맥을 잡은 주석하의 오른손을 다른 한 손으로 붙잡고 내력을 집중했다.
내력 대결이라면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주석하의 나이는 그보다 훨씬 어리다. 물론 어리다고 내공이 약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나이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가끔 단천마령처럼 상식 밖의 존재가 있긴 하지만 그녀는 천마가 심혈을 기울인 사람 아닌가.
우우우웅-
두 사람이 서로 팔을 붙잡고 내공 대결에 들어가자 주위로 파문이 번졌다.
우설금은 옆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판단으로는 내력 소모는 양쪽 모두에게 좋지 않다. 사지가 잘리는 것보다 낫다지만 일반적인 초식 대결에 비하면 후유증이 훨씬 크다.
“묵천마령! 넌 강자존의 율법을 모르나? 네놈은 단천마령과 천마 가운데 승리하는 사람을 주군으로 모실 운명이다. 물론 천마가 질 리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얼마 전 천마가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 텐데?”주석하의 경고에 묵천마령은 머리가 확 깨는 충격을 받았다.
천마가 졌었다고? 얼마 전에? 얼마 전에 이상한 일이 있긴 했었다. 천마가 천화원에서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졌었으니까.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천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금천마령이 도착했을 때 천마는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니까.
다만 외부 침입자 없이 천마 혼자 쓰러져 있었기에 연공 중에 심마에 들었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무공 대결로 인하여 쓰러졌던 건가?
묵천마령은 반박하려고 했으나 입을 열 수 없었다. 상대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내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있어서다. 지금 상태에서 입을 연다면 운기가 꼬여 자칫 내력이 역류할 위험이 있다.
묵천마령은 눈을 부릅떴다. 지금 주석하가 자연스럽게 말한다는 것은 그의 내력이 월등함을 알려주는 암시 아닌가.
“으으…….”
신음을 토하는 묵천마령을 비웃으면서 주석하가 말을 이었다.
“싸움에는 계획이 있는 거야. 네놈처럼 무턱대고 덤비지 않지. 난 지는 싸움을 절대 하지 않아. 눈 뜨고 보아라! 천마가 어떻게 깨지는지!”
주석하는 상대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내력을 줄였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던 묵천마령은 그제야 한결 편안한 상태가 됐다. 지금 주석하가 내력을 줄이지 않았다면 묵천마령은 내공 대결에 패하면서 죽거나 살더라도 주화입마에 빠졌을 것이다.
파팍!
가벼운 파공성과 함께 주석하는 뒤로 물러났다.
묵천마령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석하와 우설금을 노려봤다. 축 처진 어깨가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듯했다.
다시 우설금이 나섰다.
“묵천마령! 나를 도와줘요. 앞으로 당신은 마교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될 거예요.”
우설금이 당근을 던졌다. 그녀는 주석하에게서 전생에 천마가 죽은 후 묵천마령이 흔들리는 마교를 무난하게 수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묵천마령은 충격을 받은 듯 떨리는 눈으로 우설금을 바라봤다.
우설금의 말은 천마와 금천마령, 은천마령을 살려두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면 마교를 지배할 다음 서열은 바로 묵천마령 자신이 아닌가.
이것은 뜻하지 않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평소에 묵천마령은 앞을 막은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의 벽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로서는 도무지 능가할 수 없는, 그들이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기회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혼란스러운 상념을 주석하의 한마디가 바로 깼다.
“줄 잘 서라! 안 그러면 뒈지는 수가 있으니까.”
묵천마령은 인상을 확 찌푸리면서 주석하를 한차례 쏘아보고는 우설금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소, 단천마령! 당신을 믿겠소.”
“고마워요. 그럼 말해줘요. 지금 천마가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그는 무극천존과 손을 잡았소.”
묵천마령의 대답에 우설금의 표정이 굳어졌다. 반면 주석하는 이미 예상한 일이라는 듯 피식 조소를 보냈다.
“영빈관 모임에서 무극천존과 구파 장문인들이 흑검서생을 공격할 거요. 천마는 당연히 무극천존이 승리하리라 보고 있소.”
“천마 앞에서 그렇게 싸우면 무극천존도 위험하지 않나요? 그렇게 행동할 리가 없잖아요?”
“그게…… 상황이 복잡하오. 무림맹 뒤에 흑련이 도착했소. 지금은 무림맹도 함부로 움직이기 힘드오. 모두 네 개 세력이 치밀하게 대치하고 있어서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자칫 타격을 입으면 오히려 먹잇감이 되기 때문이오. 무극천존과 자하검존은 어떻게든 흑검서생을 처단하겠다고 벼르고 있소. 이것을 천마께서 교묘하게 이용하신 거요. 흑검서생을 치면 흑련의 공격을 막아주겠다고 말이오.”대충 음모의 전반을 이해했다. 천마는 무림맹의 칼을 빌려 주석하를 치려는 거다. 또 무림맹은 눈엣가시인 주석하를 제거하면서 천마의 도움으로 흑련을 칠 수 있다.
양자의 동맹이 믿을 수만 있다면 누구도 손해는 아니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
주석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천마의 생각을 손쉽게 헤아릴 수 있었다. 천마도 무극천존 등이 흑검서생을 제거할 수 있다고 보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무극천존과 흑검서생이 싸우면 무림맹이 무너지고 흑검서생은 내상을 입는 쪽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약화한 흑검서생을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으로 제거하려는 의도다. 설사 흑검서생이 이를 극복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천마가 있으니.
지금 천마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 바둑돌이고 소모품이다. 그들이 죽더라도 회귀해서 다시 세력을 구축하면 되니까. 무한회귀공 덕분에 천마는 부담 없이 작전을 짤 수 있다.
“흐음, 그렇다면 영빈관에서 무극천존이 흑검서생을 공격하리란 거죠?”
“그렇소.”
묵천마령이 주석하의 눈치를 본 후 대답했다.
주석하는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작전을 알았으니 대비하면 되는 법. 묵천마령! 변동이 생기면 우리에게 알려라. 우리는 천마와 승부를 볼 거니까. 우리가 승리하면 당신에게 마교를 맡기지. 물론 우리에게 협조한다면. 당신이 손해 볼 일은 없잖아? 천마가 승리해도 당신은 자리를 유지할 테니. 물론 배신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되겠지만.”묵천마령은 주석하의 말뜻을 이해했다. 사실 묵천마령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양쪽 모두에게 호의를 보이다가 승부가 결정 나는 순간 한쪽에 붙으면 충분하다. 애초에 묵천마령은 천마에게 무조건 충성하지 않았고 단천마령과도 가까웠다.
그렇기에 그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알았소. 그렇게 하리다.”
묵천마령은 우설금에게 행운을 당부하고는 총단 쪽으로 사라졌다.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주석하와 우설금은 각자 묵천마령이 전해준 천마의 계략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고 있었다.
“백번 생각해도 위험해요. 세 마교수호사령과 무극천존을 비롯한 무림맹 인사들…… 적이 너무 많아요.”
“그렇다고 대적 못 할 정도는 아니죠.”
주석하의 자신감을 우설금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녀는 금천마령 하나도 주석하가 상대하기 쉽지 않다고 예상했다. 내공이 강하더라도 마교 서열 이 위인 금천마공을 압도하기는 무척 어려우니까.
주석하는 과거에 상대해본 경험 덕분에 훨씬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 모두와 상대해도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다만 그 직후 천마가 등장하면 승부를 장담하기 어렵다. 천마가 파놓은 치밀한 함정이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영빈관에 가지 말아요. 다른 방법을…….”
“아뇨, 천마가 판을 깔아줬는데 제대로 이용해야죠.”
각개격파하는 것보다 한곳에 모아 놓고 처리하는 것이 월등히 편하다. 능력만 받쳐준다면.
“휴우, 알았어요. 함께 고생해보죠.”
우설금은 주석하의 고집을 꺾을 수 없고 마땅한 다른 방법이 없기에 마지못해 수긍했다.
정작 주석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따로 할 일이 있어요.”
“네?”
“영빈관 회담보다 훨씬 중요한, 천마를 상대하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죠.”
주석하는 미소를 머금고 우설금에게 작전을 설명했다.
***
영빈관 회담 당일,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깔렸을 때 하늘에는 보름달이 떴다.
주석하에게 이 보름달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바로 전생에서 이날 그는 마교 돌파를 시도했었고 그날 우설금이 죽었다. 금천마령과 은천마령도 이날 죽었고 천마 또한 이날 죽었다.
과연 회귀한 후 다시 맞이한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주석하는 혼자서 영빈관을 찾았다.
묵천마령을 통해 정식으로 회담 초대를 받았다. 마교와 무림맹의 회담에 그도 참석해달라는 요구였다.
공식적으로는 주석하는 단체의 대표나 소속이 아니기에 참가 자격이 없었으나, 지금 현재 단천마령과 함께 당당하게 마교 주력부대를 이끌고 있기에 양측 모두 무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이 회담에서 그를 치겠다는 음모가 내재해 있겠지만.
적들은 그와 단천마령이 함께 참석하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오늘 주석하는 혼자였다.
영빈관은 천주문에서 산비탈 쪽으로 떨어진 곳에 지어져 있었다. 주변에 다른 건물 없이 홀로 떨어진 외딴 석조건물이다.
전생에서 천주문을 뚫고 마교로 진입할 때는 몰랐던 건물이다. 평소라면 이 건물은 마교도가 아닌 중원인에게 허용된 마교 총단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지점이기도 하다.
“흑검서생! 오셨습니까?”
누군지 모르지만 마교도 한 사람이 그에게 인사했다.
“조금 늦었습니다.”
주석하는 대충 인사하고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그리 넓지 않았고 이미 많은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닌데 제일 늦게 왔다. 그가 들어섰을 때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이곳에 있는 사람 가운데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이 상당히 많겠지만 주석하는 대부분 낯설지 않았다. 전생에서 만나거나 심지어 손속을 겨뤘던 사람들이다.
그는 그들의 시선을 뚫고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그의 옆자리는 비었고 홀로 떨어져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왼쪽에는 무극천존과 자하검존이 앉아 있었다.
그 뒤로 구파 장문인과 무림맹 간부로 짐작되는 자들이 십여 명 보였다.
“단천마령은 오지 않았습니까?”
개회를 선언하려던 묵천마령이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