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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60화 (260/273)

260화 영빈관 풍운 (1)

안면에 미소를 머금고 주석하는 여유롭게 둘러댔다.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다더라고.”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의 얼굴에 깊이 주름이 패었다. 단천마령의 부재가 그들의 작전을 조금 일그러트렸다는 의미다. 반면 무림맹 쪽은 오히려 얼굴이 밝아졌다.

묵천마령이 재빨리 사태를 수습했다.

“아, 그럼 지금부터 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현재 본교 앞에 여러 세력이 대치해 있습니다. 저희는 이 문제를 가능한 평화적이고 자주적으로 해결하고자 하기에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고자 합니다.”

“평화? 애초에 당신들이 중원을 침공했기에 벌어진 일 아니오?”

자하검존이 바로 반박하고 나섰다.

일종의 기선제압이다.

“엄연히 이곳은 본교의 영역이오. 우리는 무림맹이 지금이라도 물러가면 없었던 일로 덮어줄 용의가 있소.”

금천마령이 묵직한 경고를 발했다.

첫 시작부터 팽팽했다. 이들 양측은 주석하를 없애려는 음모를 들키지 않고 조금이라도 실리를 많이 챙기고자 대립했다. 특히 무림맹 인사들은 마교의 직접적인 무력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서 말로 강공을 퍼붓고 있었다.

주석하는 쓴웃음을 삼켰다. 저렇게 말로 싸우다가 어느 순간 그 화살이 그에게로 향할 것이다.

마교와 무림맹의 말싸움에 그가 끼어들 이유는 없기에 주석하는 느긋한 심정으로 구경했다. 양측의 말다툼은 진정인 것처럼 격렬했다.

만일 주석하가 사전에 음모를 모르고 있었다면 그들이 회담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주석하는 차분하게 앞으로 그려질 전투를 구상했다. 비록 그가 모두를 상대할 자신이 있다고 해도 천마라는 최종 목표가 건재한 이상 이곳에서 무리해서는 안 된다.

회담을 관찰하는 주석하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

영빈관은 천주문에서 소로를 따라 산비탈을 올라간 지점에 있다.

어두운 데다 소로 주위에는 덤불이 많아 밤길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미파 장문인 금정사태는 문하 제자들이 머물 진지를 구축하느라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여인 문파란 특성 때문에 진지 구축에 더욱 공을 들이다 보니 일어난 결과였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회담에서 머릿수를 채워주는 역할이었고, 실제 회담을 주도하는 자는 무극천존과 자하검존일 테니까.

예정보다 시간이 늦어 금정사태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녀의 뒤에는 항상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태상호법, 금화신니(金花神尼)가 따라오고 있었다. 금화신니는 그녀와 함께 수학했으며 아미파 내에서 최강을 다투는 고수였다.

금화신니가 있기에 금정사태는 안심하고 장문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굳건했다.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장문인께서 빨리 가셨어야 했는데요.”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 금화신니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아미파에 발언 기회도 오지 않을 텐데요.”

“그래도 분위기에 적응하시려면…….”

“사실 본 장문인이 가지 않아도 회담에는 전혀 지장 없을 거예요.”

금화신니는 낙담의 한숨을 토했다.

최근 들어 아미파의 위상은 과거 대비 많이 추락했다. 그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두 사람은 마음이 언짢았다.

이번 마교 원정도 문파 사정이 여의치 않았으나 문파의 위상을 높이고자 어쩔 수 없이 참가했다. 마침 최근에 위기를 겪은 구대문파가 많아 아미파로서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저희 제자들은 장문인만 믿습니다.”

“저도 그 무게를 느끼고 있습니다.”

“흑검서생을 칠 때 한 손만 보태면 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영빈관 건물을 찾았다. 저쪽 너머에 커다란 고목이 한두 그루 서 있고 그 옆으로 석조건물이 보였다.

“조금 멀긴 하네요. 길도 음침하고…….”

호흡을 고르던 금정사태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금정사태는 금화신니를 제지하면서 부근의 덤불을 뚫어지라 주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누군가 있어요.”

금화신니도 재빨리 기감을 끌어올렸다. 확실히 맞은편 덤불에 누군가 있었다. 마교의 경계병이 덤불에 숨어 경계 중이라고 보기엔 이상하게도 섬찟한 살기가 느껴졌다.

금정사태는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덤불을 노려봤다.

덤불이 흔들리면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젊은 여인이 핏빛의 붉은 궁장을 입고 있어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더구나 그녀의 외모는 눈이 번쩍 띌 만큼 놀라웠다.

“다, 당신은…….”

“사태! 그대는 오늘 영빈관 회담에 참석할 수 없어요.”

적색 궁장 여인, 우설금이 나직하게 말했다.

금화신니가 금정사태를 감싸며 소리쳤다.

“너, 넌 누구냐?”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은 당신들의 안위 걱정이 우선이 아닐까 합니다.”

“감히! 마교가 비열하게 이런 식으로 압박하다니!”

성격 급한 금화신니가 선장을 흔들며 우설금을 공격했다.

우설금은 손에 든 홍철산으로 가볍게 선장을 튕겨냈다.

쿵!

선장으로 전해지는 충격에 금화신니는 혼비백산했다. 나이 어린 여인의 무공이 측량 불가할 만큼 대단했다.

그녀가 당황하는 찰나 우설금이 재빨리 달라붙었다.

그녀는 홍철산으로 금화신니의 시선을 빼앗은 다음 다른 한 손을 가볍게 그었다. 손끝에서 뻗은 시뻘건 강기가 금화신니의 목을 가로질렀다.

순식간이었다.

기습당한 금화신니는 엉거주춤 선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목에서 피가 솟구치고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서서히 몸에서 힘이 빠지고 중심이 무너졌다. 동시에 그녀의 혼백도 몸을 이탈했다.

“어?”

금정사태는 뜻밖의 사태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회담에 참석하러 가다가 마교인의 습격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공격한 적이 이렇게 어린 여인일 줄은.

금화신니의 죽음에 그녀의 사고는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회담의 기본 원칙을 어긴 마교의 행태에 분노가 치밀었다. 지금 그녀는 금화신니의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감히 아미파를 공격하다니! 천벌을 받을 것이다!”

금화신니는 선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분노 때문에 그녀의 공격은 투박하고 뻣뻣했으나, 그 위력만큼은 조금도 감소하지 않았다.

강력한 강기를 동반한 선장이 우설금의 머리를 찍어왔다.

우설금은 적의 공격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물 흐르듯 몸을 낮추고 둘 사이의 거리를 지웠다.

푹!

우설금의 하얀 손이 금정사태의 가슴을 꿰뚫었다.

“어윽? 이, 이게 어떻게…….”

금정사태는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상대가 언제 이렇게 접근했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상대의 무공이 아득히 위에 있지 않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다시 그녀의 눈동자가 우설금에게 옮겨갔다.

“너…… 넌 단천마령…….”

그제야 그녀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마교인이긴 하지만 지금은 천마의 휘하에 있지 않은 마교의 배신자.

오늘 이 사태를 주도한 인물, 마교수호사령의 일인인 단천마령이었다.

무극천존과 자하검존이 흑검서생만 강조했기에 흑검서생을 단천마령이 돕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죽음을 앞에 두자 이 암습과 오늘 회담의 연관성이 선명하게 보였다.

“무…… 무서운 년…….”

금정사태는 울컥 선혈을 뱉으면서 쓰러졌다. 그녀는 감긴 눈을 다시 뜨지 못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죽인 우설금은 마지막 살수로 죽음의 방점을 찍었다. 주석하에게서 전생의 금정사태가 어떻게 죽었는지 들었었기에 그녀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어차피 오늘은 예전처럼 잔인해져야 한다. 주석하와 그녀가 최후의 승부에서 천마를 이기려면.

그녀는 멀리 불빛이 비치는 영빈관을 바라봤다.

“조심해요…….”

아련한 표정으로 영빈관을 바라보던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주저 없이 다시 몸을 날렸다. 그녀의 그림자가 마교 총단 쪽으로 사라졌다.

***

꽤 오랜 시간 무림맹을 노려보며 말다툼을 벌이던 금천마령이 갑자기 주석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흑검서생,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지목받은 주석하는 안면을 찌푸렸다. 딴 생각하던 중이라 논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뭔 말이지?”

“마교가 중원에 끼친 피해를 무림맹에서 배상해달라지 않소? 알다시피 중원을 공격한 주력부대는 지금 단천마령과 당신이 이끌고 있소. 그러니 무림맹에 배상해야 할 자는 당신이라 생각하오만.”금천마령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주석하를 공격했다.

논리가 그렇게 되나? 주석하는 실소를 머금으며 반박하려 했다.

“흑검서생! 지금 당신의 주력부대가 무수히 많은 문파를 멸문했소. 중원은 피바다가 됐고. 순순히 넘어가기엔 너무 뻔뻔하지 않소?”

자하검존이 금천마령을 두둔했다.

주석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후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그에게 덮어씌우겠다는 건가? 아무리 명분이 필요하다기로서니.

“그 말은…… 마교의 주력부대가 천마 휘하가 아니라 단천마령과 나, 흑검서생의 휘하에 있다는 뜻이지?”

“실상이 그렇지 않소?”

“좋아, 금천마령이 주력부대 앞에서 ‘천마가 너희들을 포기했다.’라고 선언하면 얼마든지 책임져주지.”

금천마령이 그렇게 선언하는 순간 주력부대는 단천마령에게 말 그대로 충성을 바치게 될 것이다.

조금도 거리낌 없이 치받는 주석하의 노림수를 금천마령도 간파했다.

자하검존이 금천마령을 향해 의미심장한 웃음을 날렸다.

“금천마령! 흑검서생의 소원대로 해주시오! 그러면 무림맹은 이 자리에서 바로 흑검서생에게 책임을 물으리다.”

당연히 금천마령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주력부대는 앞으로 무림맹이나 흑련과 싸울 자원이다. 절대 버릴 수 있는 병력이 아니다.

“자하검존, 먼저 흑검서생에게 빚을 받으시오. 우리 마교는 전적으로 무림맹의 의견에 동의하오.”

상황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무극천존과 자하검존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주석하를 노려보면서 진기를 끌어올렸다.

“흑검서생! 그동안 많이 참았다! 감히 정파십존과 구대문파, 무림세가를 건드리다니! 네놈에게 만사지존을 해친 죄를 묻겠다.”

주석하는 흑검소를 슬슬 어루만지며 곧바로 치받았다.

“그럴 능력은 있고? 꼬리가 잘려도 모르는 병신들!”

“무슨 소리냐?”

주석하의 욕설에 자하검존이 버럭 소리쳤다. 새파란 녀석에게 이런 모욕을 들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걸 내가 꼭 알려줘야 알아?”

주석하가 알 듯 모를 듯 빈정댔다.

무극천존과 금천마령의 안면이 확 일그러졌다. 주석하의 말이 뭔가를 암시하는 듯했다.

분기탱천한 자하검존이 검을 겨눴다. 오늘 정파가 연합해서 주석하를 처리하기로 약속했으니 지금의 욕설을 싸움의 빌미로 삼는다.

“건방진 네놈의 주둥이를 탓하라!”

자하검존이 무극천존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낼 때였다.

갑자기 영빈관 문이 벌컥 열리고 한 여승이 뛰어들어왔다.

난데없는 불청객의 난입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승이 무극천존 앞에 철퍼덕 무릎을 꿇었다.

“매, 맹주님! 저, 저희 장문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순간 싸늘한 냉기가 장내에 내려앉았다.

“무슨 소리요?”

여승이 눈물을 쏟으며 하소연했다.

“금정사태와 호법이신 금화신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사인은…… 명백히 마공입니다. 마교가 저희 장문인을 살해했습니다!”

무극천존을 비롯한 무림맹 인사와 세 마교수호사령의 입이 쩍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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