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62화 (262/273)

262화 영빈관 풍운 (3)

주석하는 한쪽 구석에서 난장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도 단순히 상황을 주시만 할 수는 없었다.

영빈관이 반파되면서 천정에서 온갖 더미가 떨어졌고, 옆에서는 피를 부르는 강기에 심지어 검강과 마기까지 파편이 되어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 모든 위협을 피해 다니면서 주석하는 돌아가는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이미 금천마령이든 은천마령이든, 과거에 상대해봤었다.

게다가 무극천존을 비롯한 구파 장문인들의 무공도 대충 가늠한다. 그렇기에 그의 머릿속에서는 전투의 결과가 계산되어 있었다.

비록 세 사람일 뿐이지만 무림맹에서는 저들을 감당할 수 없다. 오늘은 무극천존을 비롯하여 자하검존마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누가 이기는가가 아니라 금천마령이 얼마나 내공을 소모하고 다치는가였다.

금천마령의 기세가 꺾일수록 이 상황을 풀기 쉬워지고 나아가 천마를 상대하기도 유리하다.

콰앙-

관전하는 사이 다시 한쪽 벽이 무너지고 곤륜파 장문인 천뢰신검이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전생에서는 그와 내공 대결을 벌이다가 목숨을 잃었지만, 이번 생에선 은천마령의 손에 끝장이 났다.

“저놈도 물건이군.”

주석하는 묵천마령의 움직임에 혀를 내둘렀다.

이 상황을 예상한 사람은 그뿐만 아니라 묵천마령도 있다. 묵천마령과 그는 어찌 보면 느슨한 동맹을 맺었으니까.

묵천마령은 딱히 그를 돕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적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묵천마령은 정파 주요 인물을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상대하는 동안 남은 인물의 멱을 따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 상대에 비해 매우 높았기에 고생 없이 수월하게 전장을 휘저었다.

하긴 저놈은 원래 저런 인물이었다. 그때도 그랬으니까. 아마 이 자리에서 금천마령이 죽고 나면 확실하게 돌아서겠지.

“으으으.”

비세를 감지한 무극천존과 자하검존이 일순간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안색은 침울했고 눈동자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확실하게 깨달았다. 마교수교사령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무극천존은 주위를 둘러봤다.

동료는 남아 있지 않고 몰살이었다. 그나마 목숨을 건진 사람은 그와 자하검존 두 사람뿐이었다.

“비, 비열한…… 동맹을 맺고도 치다니!”

무극천존의 입에서 비밀 협정이 까발려졌다. 이렇게 된 이상 숨길 필요가 사라졌다.

금천마령이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애초에 먼저 검을 든 쪽은 그쪽이 아니었던가?”

“그건 당신들이…….”

입을 열던 무극천존은 뒷말을 삼켰다.

이미 끝난 일을 꺼내 봐야 어디에 쓸 건가. 인과를 따져 봐야 중요치 않다. 금정사태를 누가 죽였는지는 영원히 묻혔다.

구파 장문인들이 죽었으니 무림맹은 마교에 패배했다. 수뇌부를 잃은 무림맹은 마교의 공세를 버틸 수 없다.

무극천존은 자신의 무지를 탓했다. 위험한 회담인 줄 알면서도 마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정파십존에 타격을 입힌 흑검서생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분란 속의 마교가 무림맹을 위협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계산도 깔려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다. 마교수호사령은 너무 강했다. 그 차이가 조금만 작았어도 일방적으로 사태가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마교수호사령에게 무림맹은 큰 변수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놈이…….’

무극천존의 시선이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실 나온 사람처럼 여유로운 주석하가 있었다.

머리를 치는 충격이 강타했다.

‘젠장!’

오늘 사태의 원인이 확실해졌다. 어차피 중요하진 않다. 주모자가 마교이든 흑검서생이든 결과가 달라지지 않으니까.

오늘의 패배로 중원 무림이 멸망하진 않겠지만 한동안 무림맹은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마교는 시비를 걸어온 자를 살려두지 않는다!”

금천마령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윽박질렀다.

무극천존은 자존감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저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반박할 방법이 없다. 이미 검을 든 손이 흐느적거려서 제대로 초식을 펼치기조차 버겁다. 모든 초식을 어렵지 않게 받아낸 금천마령 앞에서 다시 초식을 펼치려니 전신이 떨린다.

“중원 무림은 영원하다!”

무극천존은 간신히 용기를 내어 자하검존에게 눈빛을 보냈다.

‘죽더라도 마지막 공격을 펼칩시다! 그동안 쌓은 명예를 더럽히지 않게. 장렬하게 죽어 중원의 기상을 떨칩시다.’

분명히 그의 의도를 자하검존도 알아볼 것이다.

역시 자하검존이 검을 다시 거머쥐는 모습이 들어왔다.

‘우리의 죽음을 후배들은 절대 헛되게 하지 않을 거요.’

무극천존은 무당파의 잠재력을, 무림맹의 잠재력을 믿었다.

마교는 중원을 점령하지 못할 것이다. 일시적으로 점령할지라도 영원히 점령하긴 어려울 것이다.

중원에는 기인이사가 장강의 모래알처럼 많으니까. 정파십존은 사라졌지만 몇 년 후에는 다시 정파십존이, 그보다 더 강한 영웅이 나타날 것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왔다.

무극천존은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적시며 힘껏 기합을 넣었다.

“타앗!”

전신의 내력을 투입한 태극무상검법이 펼쳐졌다. 무당파 최고 검법이자 그가 익힌 최강의 초식이다.

그와 자하검존이 동시에 최강의 공격을 펼치면 상대를 죽이진 못하더라도 조금은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주석하는 무극천존이 그리는 아름다운 검초를 구경했다. 무림의 중추 무당파의 검법이 허술할 리 없다. 다만 무극천존의 깨달음이 부족할 뿐.

무극천존의 검강이 금천마공을 깨고 공간을 뒤흔들었다.

그 순간 주석하는 똑똑히 보았다. 자하검존의 신형이 허공으로 높이 솟았다.

“어?”

놀랍게도 자하검존은 금천마령을 향해 허초를 날렸다. 동시에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튀어 올라 전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주석하는 자하검존의 도주에 실소를 억누를 수 없었다.

전생에서 자하검존은 유비연을 위협해서 그를 협박하는 비열한 수를 썼다. 과연 그 성품이 바뀌지 않았다. 이번에는 동료를 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쳤다.

금천마령도 어이가 없는 듯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의 앞에는 무극천존의 검강이 진입하고 있었고, 그 건너편에서는 주석하가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콰아앙!

충격파가 천지를 흔들고 무극천존의 신형이 실 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갔다. 무극천존이 반파된 영빈관 한쪽 벽에 처박히면서 재차 벽을 허물었다.

“끄으윽-”

신음을 흘리면서 간신히 몸을 꿈틀거리는 순간 금빛 강기가 빛살처럼 날아와 목을 벴다.

무림맹주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무림맹 주요 인사가 몰살을 당했다. 무림맹주인 무극천존을 비롯하여 소림사 방장인 구천신승, 무당파 장문인 태을진인, 곤륜파 장문인 천뢰신검, 아미파 장문인 금정사태와 여러 문파 장로들까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털면서 금천마령은 자하검존이 도망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도망쳐봐야 위협이 될 수 없는 존재다. 그보다는 눈앞의 인물을 처리하는 게 더 시급하다.

주석하의 앞에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나란히 대치했다. 그 옆에 곧바로 묵천마령이 따라붙었다.

“금정사태의 죽음은 당신의 작품인가?”

금천마령의 돌직구에 주석하도 부정하지 않았다.

“과연…… 그렇군. 천마께서 당신을 조심하라더니. 이제 우리가 승부를 볼 차례가 왔다!”

이곳 영빈관에는 그들 넷을 제외하고는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그 많던 무림맹 인사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세 마교수호사령은 많은 피를 보았음에도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승부? 그럴 능력은 있고?”

“이 자식이!”

주석하의 빈정거림에 금천마령이 벌컥 화를 냈다.

지금까지 마교수호사령 앞에서 이렇게 건방을 떠는 자는 없었다. 심지어 천마도 마교수호사령만은 신중하게 대하지 않았던가.

“내가 거짓말하는 거 아냐. 네놈들 능력을 이미 본 적이 있거든. 그때는 너희 세 놈이 합쳐서 마벽을 세우더라? 금빛, 은빛, 묵빛 마벽이 융합하면서 대단한 위력을 드러내긴 했는데…… 아! 단천마령이 없으면 그마저 불완전하지?”주석하의 지적에 금천마령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까지 마교수호사령이 힘을 합쳐 적을 상대할 일이 있었던가? 그런데 주석하는 마치 그들을 한꺼번에 상대해본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내가 하나 더 알려줄까? 천마의 절대천마공 그거 말이야, 그거 별거 아냐. 마공에 대해 모르는 자식들이나 찬양하지, 좀 아는 놈은 그런 거 무시해. 천마가 절대천마공을 펼치면…… 심검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무형의 거대한 검이 하나 생기는데 길이가 대충 이따만 하더라고.”주석하가 우스꽝스럽게 두 팔을 벌려 크다는 표시를 했다.

당연히 금천마령은 절대천마공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숱하게 들었고 실제로 천마가 수련하는 과정도 가끔 지켜봤다.

놀랍게도 주석하의 설명은 틀리지 않았다. 절대천마공의 위력을 물로 보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으나 거검이 나타나 상대를 압박하는 형식은 거짓이 아니었다.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큭큭, 내가 절대천마공을 박살 내놨거든.”

“거, 거짓말 마라!”

주석하가 빈정거리며 손가락질했다.

“천마가 절대 무쌍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매에는 장사 없어! 내가 천마 그 자식 귀싸대기 날려 봤거든! 오늘도 그 자식을 밟아주려고 왔는데…….”

“야! 이 자식아!”

더는 참을 수 없었던지 금천마령이 벼락처럼 손을 홱 뒤집었다. 금빛의 강기가 주석하를 향해 폭사했다.

주석하는 백변환영보를 펼쳐 금천마공을 가볍게 피했다.

그 순간 측면에서 은천마공이 습격했다. 이미 관성이 붙어 방향 전환이 쉽지 않았기에 주석하는 신형을 공중으로 띄었다. 화판답공을 시전하는 주석하의 신형이 우아하게 허공을 밟았다.

예상외로 주석하가 매끄럽게 대응하자 금천마령이 기세를 높였다.

“놈을 죽여라!”

금천마령을 포함해서 은천마령과 묵천마령이 각각 방위를 점하고 주석하를 포위했다.

흑검소에서 검강이 세 방향으로 번개처럼 날아갔다.

전생에 이어 마교수호사령과의 대격돌이 시작됐다.

***

뇌군은 어둠 속의 십만대산을 노려보고 있었다.

달빛에 음영이 진 가장 가까운 봉우리에서 마교 총단이 어슴푸레 빛을 발했다. 주변 봉우리는 고산이라 황폐했고 기암괴석이 기괴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그는 십만대산에 온 적이 없다.

하지만 주석하를 통해 전생에서 이곳을 왔다고 들었다. 그것도 이 능선이 아니라 맞은편 절벽 아래쪽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냈었다고 했다.

“천마…… 대단하구나!”

물론 뇌군은 천마를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를 원수라 생각한다. 무한회귀공을 믿는 그는 천마가 그때 무슨 짓을 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때의 자신은 천마에게 복수하려고 주석하를 키웠다. 지금의 그는 전생의 염원을 이해하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주석하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군.”

현명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복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원 무림을 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만사지존 제갈휘야말로 중원을 구할 성인이라고 평가했지만, 지나고 보면 정말 중원을 구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실제 의도는 아니었어도 결과는 그러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지?”

뇌군은 혀를 차며 세상을 욕했다.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우매한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타인을 평가한다. 진정한 내면을 보지 못한다.

“바보 같은 녀석들…….”

쓴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앞에 두 그림자가 등장했다. 바로 흑련의 중심이라 할 혼군과 암군이다. 흑련은 무림맹을 추격하여 십만대산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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