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영빈관 풍운 (4)
“오셨소이까?”
뇌군은 두 흑도팔군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이들이야말로 지금의 사파, 흑련을 지탱하는 최고 고수다. 비록 뇌군 본인도 흑도팔군에 속해 있지만 무력만 따지면 혼군이나 암군에 필적할 수 없다.
“지금 상황은? 흑검서생은 어떻게 되었소?”
혼군이 다급하게 물었다.
혼천교와 암흑단은 겉으로는 중원 무림 사수라는 큰 사명을 걸고 십만대산까지 왔지만, 그 내면에는 흑검서생의 안위와 무림맹 견제라는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십만대산에 도착한 이후부터 뇌군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었다.
“예상대로 물러가고 있소.”
“예상대로라면?”
“무림맹과 마교 사이에 문제가 생긴 듯하오. 흑검서생이 국면을 잘 타개하고 있고, 오늘 밤이 지나면 완전히 판도가 바뀔 거요.”
뇌군이 자신 있게 말했다. 비록 흑련은 마교 총단을 포위한 최외곽 세력이고 단지 무림맹을 견제하는 국면이지만 뇌군은 무림맹에 심어둔 많은 밀정으로부터 정보를 취합하고 있었다.
“그럼 흑검서생은 안전하다고 봐도 되겠소?”
혼군은 무엇보다 주석하의 안전을 염려했다. 지금 저곳은 마교와 무림맹 고수들이 득실대는 용담호혈이다.
“방금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무림맹이 대대적으로 피해를 입은 듯하오. 흉수는 마교! 흑검서생은 현재 어부지리를 봤소. 아직 걱정할 단계는 아닙니다.”뇌군의 설명에 혼군의 안색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오?”
“지금처럼 압박만 하면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영웅을 보게 될지도 모르지요.”
뇌군이 말을 아꼈으나 혼군과 암군은 그 영웅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긴장이 사라지자 혼군과 암군도 편안하게 마교 총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림맹의 병력과 마교의 주력 부대가 마교로 통하는 넓은 고원에서 대치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 수십 년간 이런 긴박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뇌군도 다시 마교 영빈관을 주시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책사가 되려면 주어진 정보를 이용해서 현재와 미래를 꿰뚫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 부분에서 뇌군은 누구보다 우월했다.
‘이제 천마와 주석하 둘이 남은 건가……. 향후 무림은 무한회귀공을 얻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다.’
뇌군은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과거에, 전생에 그는 무한회귀공을 익혔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 무공을 모른다. 전생에서 그의 선택은 옳았고 지금 그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흑련 최고의 두뇌, 뇌군이었으니까.
‘무림 최고, 아니 고금 최고가 되는 길이 눈앞에 있다. 누가 그 유혹에서 자유로울까? 천마는 그 유혹에 졌고 주석하는 아직 의문이지만…… 나는?“뇌군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
콰아아앙!
충격파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주석하와 마교수호사령의 격전은 예상외로 격렬하고 거대했다. 그 여파로 영빈관은 건물의 흔적조차 지워지고 있었다.
야밤의 대격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자칫 싸움에 휘말리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기에.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격전은 인간의 싸움이라 할 수 없었다. 무신(武神)의 싸움이었다.
사람들은 무림맹주를 비롯한 구파 장문인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중원 무림의 최정점에 있던 고수들이 마교의 세 고수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하지만 진정 그들을 정신없게 만든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런 마교의 고수를 지금 사파의 한 인물이 홀로 맞서고 있었다.
흑검서생!
최근 들어 무림사에서 자주 회자되었던 이름이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흑도팔군 정도의 수준으로 인식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평가가 완전히 뒤집혔다. 사실상 중원 최강임을 오늘의 대격돌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새로운 무신의 탄생인가!”
사람들은 넋을 놓은 채 멀리서 주석하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주석하는 금천마령, 은천마령, 묵천마령을 압도했다.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의 무공은 대단했으나 이는 전생의 경험과 다르지 않았다. 그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묵천마령은 사전에 합의한 대로 치명적인 살수를 자제하며 느슨하게 싸우고 있었다. 덕분에 주석하는 한결 편안해졌다.
스스스슥-
주석하는 백변환영보와 화판답공으로 종잡을 수 없는 보법을 구사하면서 혼천십팔지와 혼천십이권으로 상대를 압박했다. 여기에 극한빙백신공과 극양염천신공을 실은 장력을 가미하자 금천마령도 상대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그들은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는 주석하의 무공에 오히려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되면 이 격전은 그들의 패배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마벽을 세워라!”
금천마령이 두 사람에게 명령했다.
마벽은 빠르게 날뛰는 적을 가두어 압박할 수 있다. 특히 금천마공, 은천마공, 묵천마공, 세 마공이 합쳐지면 그 위력이 더욱 강화된다.
세 사람의 내력이 무지막지하기에 그 합력을 감당할 자는 그들의 관점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벽을 세워 주석하를 가두면 이 전투는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 했다.
주석하가 날뛰는 상황에서 금천마령의 이러한 선택은 타당했다. 다만 그는 전생에서 주석하의 돌파를 마벽으로 막았다가 패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우우우웅-
금빛, 은빛 마기가 폭발적으로 강화하는 순간 이를 보고만 있을 주석하가 아니었다.
내력을 끌어올리며 사용 무공을 바꾸는 순간에는 틈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주석하는 이 틈을 파고들었다.
묵천마령이 그에게 살수를 펼치지 않으리란 점을 알기에 큰 도움이 됐다. 적의 진영을 무너트리는 방법은 한 녀석만 공격하면 된다. 지금 상황에선 금천마령보다 은천마령이 훨씬 빈틈이 많다.
주석하의 암천살검이 불을 뿜었다.
상대가 대응할 여지도 없이 그의 공격은 번개처럼 은천마령을 내리찍었다. 그것도 내력을 모두 실은 검강 그 자체다.
그의 검강은 십만대산의 봉우리를 통째로 날려버릴 기세였다.
서걱-
눈앞에서 흰빛이 번쩍이는 순간 은천마령은 가슴이 화끈거렸다. 몸을 보호하던 호신강기가 엷어지고 은천마공이 마벽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노린 쾌검이었다.
암천살검은 놀라웠으나 그 일 초식만으로는 은천마령 같은 고수를 무력화할 수 없다.
가슴에 일격을 당하는 순간 은천마령은 뒤로 십 보 물러났다. 마벽을 세우려고 반드시 상대에게 근접할 필요는 없으니까. 거리를 두고 상대를 압박해 들어가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그의 대응은 당연했고 이 움직임은 주석하의 다음 초식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여기까지는 완벽했다.
다음 순간!
“커윽!”
은천마령은 등을 타격하는 강한 충격에 신음을 터트렸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히 눈앞에서 날뛰는 주석하의 공격은 아니었다.
은천마령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붉은빛의 산강이 가슴을 뚫고 나와 한 자가량이나 뻗어 있었다.
“크으윽, 다, 단천마령…….”
몸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암천살검이 재차 그를 엄습했다.
서걱-
은천마령의 한쪽 어깨가 절단됐다.
비틀거리는 은천마령의 뒤로 홍철산을 든 우설금이 독기를 품고 노려보고 있었다.
금천마령은 때 아닌 기습에 대경했다.
그는 은천마령을 구하려고, 아니 그보다 우설금을 죽이려고 분노를 쏟아냈다. 폭죽처럼 터져나간 금천마공이 우설금에게 방향을 틀었다.
고수들의 싸움에서 흥분은 금물이다. 특히 지금처럼 이성을 잃고 날뛰면 승기를 잃게 된다. 그것도 더 강한 고수의 면전이라면.
주석하는 이번에도 틈을 놓치지 않았다.
허공을 선회하던 흑검소에서 암천살검의 마지막 초식이 펼쳐졌다.
번쩍!
순간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벼락이 금천마령 머리 위로 내려친 듯했다. 그 속도와 중후함이 시간과 공간을 잠식하고 장내의 마기를 일시에 잠재웠다.
콰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파공성과 사방으로 퍼지는 충격파에 일순간 시간의 흐름이 마비됐다.
그 와중에 금천마령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 통증은 기이하게도 머리끝에서 시작하여 가슴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
금천마령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말은커녕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진득한 핏물이 코와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 온 세상이 정지해있고 핏물만 방울방울 흐르는 듯한 느낌은 정말 기괴했다. 태어나서 수십 년을 살아온 금천마령도 처음 경험하는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어디를 당한 것인지 그것마저 인지할 수 없었다.
단지 전신이 핏물에 잠기고 있다는 감각만 있을 뿐.
그마저도 잠시였다. 고통마저 사라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이 하나하나 분해되고 있었다.
금천마령의 노쇠한 육신이 쪼개지고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강에 맞아 정확하게 절반으로 분리됐다. 피가 쏟아지고 육신에서 내장과 살점 덩어리가 와르르 떨어졌다.
쿵!
두 조각 난 몸을 다리가 지탱하지 못했다. 좌우로 벌어지면서 금천마령의 몸이 넘어갔다.
“허억! 이, 이게 어떻게 된…….”
은천마령은 자신의 어깨가 잘려나간 것마저 잊었다. 눈앞에서 금천마령이 조각나는 장면은 그야말로 공포였다. 갑자기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마교의 이인자이자 수십 년을 일인지하 만인지상 권좌에서 군림했던 금천마령이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죽을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푹!
명쾌한 소음과 함께 은천마령의 가슴에 다시 구멍이 뚫렸다.
한쪽 팔이 날아가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둘이나 뚫린 은천마령도 삶에 작별을 고했다. 무너진 그의 신형이 금천마령 위로 포개졌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주석하는 은천마령 뒤에 나타난 우설금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적절한 시점에 그녀가 등장해서 과도한 내력 소모를 막았다. 그와 우설금의 합공이 절묘하게 어울려 완승을 이끌었다.
주석하는 시선을 묵천마령에게 돌렸다.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의 시신을 어색하게 쳐다보던 묵천마령이 찔끔 놀라며 손을 저었다.
주석하의 눈빛은 상대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제 당신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천마인가 아니면 단천마령인가?
묵천마령도 주석하의 질문을 정확하게 자각했다. 물론 그 답은 명확했다. 그는 금천마령을 일검에 쪼개버린 주석하의 무위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저 둘이라면 천마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주석하 혼자서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거짓말이라 생각했던 주석하의 장담을 이제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단천마령과 매우 가까웠고 단천마령이 반기를 든 이후에도 그녀를 적대시한 적이 없었다.
강자에게 굴복하는 것이 마교의 섭리다.
묵천마령은 두 손을 펼쳐 의사를 표현했다.
주석하가 손가락을 아래로 향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천천히 묵천마령은 무릎을 꿇었다. 주석하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이 정지했다.
묵천마령을 무릎 꿇리고 오만하게 노려보는 주석하는 위풍당당했다.
아! 늠름한 기상이여! 우설금은 이 순간 주석하를 존경하게 됐다. 모든 게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주석하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답례하듯 고개를 숙인 묵천마령이 몸을 일으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적막이 내려앉은 영빈관에 남은 사람은 주석하와 우설금뿐이었다. 멀리서 결전을 관전하던 사람들은 예상 밖의 결과에 숨을 죽였다.
주석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우설금 옆에 나란히 섰다.
그는 우설금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우설금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곁에 있던 자, 그녀에게는 절대자나 마찬가지였던 이들이었기에 그 죽음이 남달랐다.
“자, 아직 하나가 남았지?”
주석하는 우설금을 살짝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