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대격돌 (1)
진영으로 돌아온 주석하는 패도사십팔마를 비롯한 주력부대 마교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단천마령을 따르면서도 일말의 불안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단천마령이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을 제거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그들의 기쁨은 남달랐다.
“내일은 천마와 한 판 붙을 것이다.”
우설금은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떨쳤다.
우레 같은 함성이 십만대산을 메아리쳤다.
주석하는 우설금과 함께 임시 막사로 들어갔다. 지금부터 추가로 할 일이 있다.
“성공했어요?”
“이거 말이죠?”
우설금이 품에서 십년유심홍 열매를 꺼냈다. 진한 향이 막사 내부를 순식간에 채웠다.
검은색의 작은 열매는 특이했으나 반들반들 윤기가 있었다.
전생에서 열매를 봤던 주석하는 지금이 가장 효과가 좋을 때란 점을 직감했다. 이 열매를 복용하면 무려 일갑자의 내력을 완벽하게 얻을 수 있다.
“일전에 말했다시피 이 열매의 가치는 일갑자 내공입니다. 기억하시죠?”
우설금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예전과 달라진 행동이 무척 귀엽다.
“자, 정좌하고 앉아봐요.”
우설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십년유심홍이 자신에게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표정이다.
“다, 당신이…….”
“나는 이미 내공이 차고 넘쳐요.”
“그래도 내일 천마와 싸우려면…….”
“내일 천마와 싸우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난 당신을 도울 뿐. 그래야 마교를 장악할 수 있어요. 마교를 살리고 싶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천마를 상대하지 않고 내가 이기면 마교는 공중분해 돼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마교의 핵심은 천마다. 천마가 무너지면 그 중심을 잡아줄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인물이 없으면 마교는 존속할 수 없다. 특히 지금처럼 무림맹과 흑련이 모두 몰려와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기에 주석하보다 우설금의 활약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천마를 죽이면서 우설금이 앞으로 마교를 끌어간다는 전언을 확실하게 드러내야 한다.
몇 차례나 머뭇거리던 우설금이 어쩔 수 없이 정좌했다.
“자, 시간 없으니까…… 예전에 십년유심홍 먹은 적 없죠? 먹었다면 여의신단이 추가로 필요해요.”
“없어요.”
귀한 십년유심홍을 천마가 우설금에게 베풀었을 리가 없다.
“자, 열매를 먹고 단천마공을 일으켜 운기를 시작해요. 내가 호법 설 테니까.”
검은빛의 열매는 어쩐지 꺼림칙하다. 하지만 주석하를 믿기에 우설금은 용기를 내어 십년유심홍을 삼켰다. 은은한 향기가 입안을 맴돌았다.
우설금은 곧바로 운기를 시작했다. 일갑자에 해당하는 내력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면서 그녀의 혈맥에 녹아들었다.
주석하는 우설금을 관찰하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우설금은 새로운 강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천마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겠지만 금천마령에 버금가는 마교 최강고수로 우뚝 설 것이다.
내일 천마에 대항하여 그와 합공해야 하기에 그녀의 내공 상승은 대단히 중요하다.
문득 천마가 떠올랐다.
사라진 십년유심홍을 앞에 두고 천마는 어떻게 할까? 길길이 날뛰는 천마의 모습이 그려져 주석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전생에서도 그랬으니까 이번 생에서도 천마의 좌절감은 하늘에 닿을 것이다.
***
보름달이 중천에 떴을 때 천마는 뿌듯한 마음으로 천마각을 떠났다.
오늘이 십년유심홍이 익은 첫날이다. 이날을 무려 십 년간 기다렸다. 최근 들어서는 회귀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단천마령이 반란을 일으켜 코앞까지 진격했음에도 응징하지 않고 내버려 뒀다.
그 뒤로 무림맹과 흑련이 겹겹이 총단을 둘러쌌음에도 무시했다. 그 모든 이유가 바로 십년유심홍, 일갑자의 내공 때문이다.
십년유심홍이 없었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회귀를 시도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불리하니까. 주석하가 그를 방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회귀에 도전했을 것이다.
그 모든 작전을 미룬 이유는 일갑자의 내공을 더하면 그만큼 성공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오늘 내공을 일갑자 늘인 후 내일부터는 오로지 회귀에 매달릴 계획이다.
어쩌면 마교수호사령이 이미 주석하를 해치웠을지도 모른다. 아, 그건 어려우려나?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장렬하게 죽었을지도…… 하지만 주석하도 무사하진 않을 거다.’
금천마령, 은천마령, 묵천마령이 합공하면 그 위력은 상상불가다. 천마인 자신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주석하가 조금도 다치지 않고 그들을 뚫을 수는 없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애초에 천마는 마교수호사령의 목숨을 고려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소모품이고 회귀만 하면 언제든지 되살릴 수 있는 존재니까.
이번에 회귀하면 마교수호사령과 마교칠왕 모두를 확실하게 살려 제대로 키울 것이다.
괘씸한 단천마령을 제대로 손을 봐서 그녀가 더 처절하게 중원에 원한을 품도록 만들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고 있자니 기분이 즐거워졌다.
오늘 주석하가 내상을 입었다면 십년유심홍을 흡수한 그를 절대 이길 수 없다. 회귀는 이루어질 것이다.
가벼운 발걸음을 빨리하며 천마는 천마각에 이르렀다.
뭔가 이상했다. 지금이라면 천화원에는 십년유심홍의 향기가 코를 찔러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설마?”
머릿속 어딘가에 기억된 십년유심홍이 떠올랐다.
열매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줄기와 잎이 마구 짓밟혀 있던. 그는 그 모습을 자신이 죽었던 전생에서 발생한 장면으로 이해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 지금까지 총단을 완벽하게 수비하고 있어 그 누구도 내부로 들어오지 못했으니까.
천화원에 도착하자마자 천마는 십년유심홍이 심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있네.”
십년유심홍은 평소처럼 잎과 줄기를 싱싱하게 뽐내고 있었다. 꿈에서 본 장면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안정됐다.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어?”
천마는 십년유심홍을 앞에 두고 잎을 들어보고 줄기를 굽혀보고 구석구석까지 뒤졌다.
없다.
어두워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달빛을 가로막는 커다란 나뭇가지까지 한방에 잘라냈다.
점점 천마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감히 어떤 놈이 이것을 건드려?”
낮까지도 무사했던 열매가 사라졌으니 분명히 누군가가 열매만 딴 것이다.
“으아아!”
천마가 분노를 폭발시키자 한차례 폭풍이 휘몰아쳤다.
주석하와 우설금은 영빈관에서 회담에 집중하고 있을 테니 십년유심홍을 가져갈 틈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열매를 노린 다른 인물이 있다는 결론이다. 그자가 누구인지 천마는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었다.
“찾기만 하면 씹어 먹어버리겠어!”
분노를 터트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무려 십 년이란 세월이 물거품이 되었기에 천마는 쉽사리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빨리 제정신을 찾아야 했다.
십년유심홍을 탈취당한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서서히 천마는 현실을 되새겼다.
앞으로 주석하와 우설금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은 주석하에게 얼마나 피해를 입혔을까.
최고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금 그는 주석하를 죽이든가 아니면 주석하가 절대 간섭할 수 없는 한 시진의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으드득-
천마는 이빨을 갈면서 고민에 빠졌다. 생각할수록 해법이 만만찮다.
***
날이 밝았을 때 영빈관 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조건물이 완전히 파괴된 현장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누구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시신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영빈관 회담에 참석한 사람들이 마교와 무림맹의 최고 수뇌부였기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특히 무림맹은 혼란에 빠졌다. 하루아침에 맹주를 비롯하여 구대문파 장문인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시신을 뒤진 끝에 그들은 수뇌부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다.
비록 시신의 얼굴은 완전히 뭉개져 확인이 어려웠으나 입은 옷가지와 지닌 소지품으로 대략적인 판단이 가능했다.
무림맹은 슬픔과 분노에 빠졌다.
그리고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금천마령, 은천마령, 묵천마령이 무림맹주와 구파 장문인을 공격했다.
- 영빈관 회담은 무림맹을 치기 위한 천마의 간악한 술수였다.
- 금천마령과 은천마령도 죽었다. 죽인 자는 흑검서생과 단천마령이다.
- 단천마령이 마교 최강자인 천마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소문은 단편적이었고 진실과 거짓이 섞여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진실이라고 믿었다.
무림맹과 흑련 사람들은 모이면 소문을 전했고 의견을 덧붙였다.
“단천마령이 누구야? 정말 천마랑 싸운데?”
“단천마령이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을 죽였다니 도전이 사실인가 봐.”
“무려 천마에게? 대단한데?”
“맹주와 구파 장문인을 죽인 게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잖아? 그런 자들을 단천마령과 흑검서생이 발라버렸다고! 그러니 천마 정도야 우습겠지.”
“그렇게 되나?”
“무림맹은 원수를 갚아준 단천마령과 흑검서생에게 감사해야 해.”
“흑검서생이 은인이군.”
열심히 간밤의 사태를 입에 올리던 두 사람의 귀에 옆에서 떠드는 다른 무리의 대화가 들려왔다.
“단천마령이 공식적으로 천마에게 도전했데!”
“드디어 마교의 분란이 시작되나?”
“아니, 마교는 강자존의 집단이라 위쪽으로 도전이 자유롭다더라.”
“이야! 좋네. 나도 무림맹주에 도전해볼걸.”
“미친놈!”
“그래서 천마는 수락했어?”
“피하면 쪽팔리지.”
“구경 가야겠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처음에 소문을 떠벌리던 두 사람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세기의 대결이니 당연히 구경 가고 싶었다.
그들의 심정에 불을 붙이는 대화가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단천마령 본 적 있어?”
“내 꼬라지에 어떻게 보겠냐?”
“단천마령을 직접 보면 넋이 나간 데.”
“왜?”
“천상삼화가 울고 갔다더라.”
천상삼화란 말 한마디로 설명이 필요 없어졌다.
두 사람은 더 고민하지 않고 천주문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 사람들은 마교와 무림맹, 무림맹과 흑련의 대립에는 관심이 사라졌다.
그보다 마교 내부의 분란인 천마와 단천마령의 대결투에 관심을 집중했다. 특히 단천마령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아직 단천마령의 공식적인 결투 요청에 천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결을 피할 수도 없었다. 무림의 여론이 천마의 등을 떠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천주문에서 조금 떨어진, 마교 총단이 멀리 보이는 고원지대.
천마평(天魔平)이라고 이름 붙여진 넓은 이 지역은 예전에 주석하가 무림맹의 칼받이로 마교를 쳐들어갔을 때 싸웠던 장소다. 이 천마평의 한쪽 면은 깎아지른 절벽 지형으로 마교에서 무량뇌옥이라 부르는 천혜의 감옥이다.
물론 무량뇌옥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천마평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주석하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는 무림맹의 말단 병사였고, 두 번째 이곳에 왔을 때 우설금을 찾아 저돌적인 돌파를 외쳤었다.
그리고 지금이 세 번째다.
오늘 이곳에서 그는 천마를 처리할 것이다. 회귀를 거듭하면서 우설금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천마를 영원히 저 세상으로 보내버릴 것이다.
주석하의 마음은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그의 옆에는 우설금이 서 있었다. 적색 궁장을 입은 우설금은 평소의 단천마령 그대로였다. 다만 오늘 그녀는 그가 선물한, 흰 구름이 수놓인 녹색 머리띠를 했다. 그녀에게서 평소와 다른 결심이 엿보였다.
일정 거리 떨어진 곳에는 수많은 군웅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은 흑검서생과 단천마령을 응원하면서 천마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