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대격돌 (3)
하남의 무림맹에는 때 아닌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 무림맹주와 구파 장문인들은 십만대산으로 떠난 상황.
평소 무림맹을 휘어잡던 맹주와 이대호법, 만사지존 등이 부재한 상황에서 무림맹을 책임진 자들은 각 문파에서 파견된 장로급 인사였다.
그들은 평소에 무림맹의 업무를 각 문파에 배분하고 의견을 취합하는 실질적인 중간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지금 무림맹은 맹주가 없어도 딱히 실무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림맹의 실무를 담당한 장로급 인사는 모두 열다섯.
바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물론 최근에 멸문 직전인 문파가 다수여서 예전처럼 무림맹에 전념하지 못하고 각자의 문파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긴 했으나, 어쨌든 지금 무림맹은 이들의 손에 있었다.
그들의 앞에서 한 청년이 냉랭한 어조로 질책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최근 이 년 동안 무림맹이 이 지경이 된 것이 누구의 책임이라 생각하십니까? 모두 만사지존이 사욕을 채운 탓입니다. 만사지존이 개인적인 은원 때문에 흑검서생을 몰아세웠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무림맹의 힘만 약화한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들부들-
무림맹 장로들이 분노를 참느라 경련을 일으켰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림맹주와 만사지존의 권위에 지금까지 쓴소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두 사람은 정파의 핵심이자 모든 문파의 존경을 받았으니까. 솔직히 당시에는 그것이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었다.
“하지만 결과론이잖소?”
무당파 장로가 불쾌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현 무림맹주가 무당파 출신이기에 무당파는 무림맹에서 가장 입김이 센 문파다. 당연히 오늘 이 자리에서도 장로들의 의견을 취합하고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결과론요? 무림맹은 지금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무림맹 장로들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눈앞의 청년을 노려봤다.
창천일룡 남궁천! 중원사룡의 일인이자 차세대 무림맹을 이끌 핵심 인물. 그가 정의롭고 뛰어난 인물임은 분명하지만 이런 식으로 윗사람을 압박할 자격은 없다.
그렇다고 어린놈이라고 핍박할 수도 없었다. 지금 그의 뒤에서 노려보고 있는 인물이 두렵기 때문이다.
남궁천의 뒤에는 정파십존의 일인인 창궁무존 남궁후가 팔짱을 끼고 노려보고 있었다. 현 무림맹에서 무림맹주를 제외하면 창궁무존을 막을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숱한 정파십존이 대부분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더 악화할 일은 없소이다. 무림맹은 앞으로 다시 뻗어 나갈 거요.”
무당파 장로가 변명했다.
남궁천이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과연 그럴까요? 내가 장담하건대…… 십만대산에서 무사히 중원으로 돌아올 사람은 몇 안 될 겁니다. 무림맹주를 비롯하여 구파 장문인 대부분이 그곳에 뼈를 묻을 겁니다.”“이보게, 창천일룡! 말이 좀 심하다고 생각지 않나? 악담을 퍼부어도 그러지는 말아야지. 게다가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분들은 중원을 위해 마교에 대항해서 목숨을 바친 숭고한 희생으로 기록될 거네.”남궁천의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호오, 그래요? 무림맹 원정이 순수하게 마교를 치기 위해서였다면 그렇겠지요. 이 원정의 목적이 마교가 아니라 흑검서생이란 사실을 여기에서 모르는 자가 있습니까?”장로들의 안색이 붉어졌다. 그들도 안다. 이번 원정이 무리수였고 오직 한 사람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임을.
마교 척결이 아니라 사파 척결이라는 기치를 앞세우고 마교 총단으로 떠났다. 뭔가 이상한 일 아닌가?
“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요?”
무당파 장로가 짜증이 난 목소리로 손을 저었다. 대충 회의를 끝내자는 뜻이다.
남궁천이 굳건하게 선언했다.
“저는 이런 식의 무림맹 운영을 반대합니다. 무림맹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운영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림맹에는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기구가 필요합니다.”
“남궁천! 감히 맹주에게 반기를 드는 겐가?”
“반기라뇨? 이제는 맹주가 물러날 때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못 돌아올지도 모르니 물러날 기회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감히!”
무당파 장로를 필두로 다른 장로들이 분노를 터트리며 우르르 일어났다.
그때 남궁천의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장내를 짓눌렀다.
“이봐! 잘 생각해라! 지금 행동이 사욕인지 아닌지.”
협박성 어조와 함께 남궁후가 검병을 슬슬 어루만졌다.
정파십존의 기세에 무림맹 장로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아무래도 오늘 창궁무존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르다. 작정하고 피를 볼 심산인 듯했다.
눈동자를 굴리던 무당파 장로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보게, 창궁무존! 이건 아니네. 맹주가 부재한 시기에 우리끼리 반목하는 것은…….”
“그게 어때서요? 맹주가 맹주 같아야 말이죠!”
뾰족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회의장으로 두 여인이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짝을 찾기 힘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화존과 천중화 백화령!
“나는 창궁무존을 지지해요!”
화존은 정파십존에 속한다. 당연히 그녀의 말 한마디가 가지는 무게는 무림맹 장로를 훨씬 넘어선다.
만일 화존과 창궁무존이 결심한다면 이곳에 있는 장로들은 아무도 살아서 문턱을 넘지 못할 것이다.
“아아!”
무당파 장로가 탄식했다. 이것은 명백한 반역인데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다른 장로들이 슬금슬금 눈치 보며 창궁무존에게 동조할 기미를 보였다.
“지금이 무림맹을 바꿀 기회입니다!”
재차 남궁천이 결의에 찬 선언을 날렸을 때 회의장 안으로 한 무리의 스님들이 들어왔다.
그들을 발견한 무당파 장로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소림은 무당파와 함께 무림맹의 축을 이루는 문파다. 게다가 소림은 얼마 전에 흑검서생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감수했기에 흑검서생 척결에 앞장설 것이 분명했다.
원군을 맞은 무당파 장로가 재빨리 구원을 요청했다.
“원숙 스님! 잘 오셨소. 이들이…….”
“아미타불, 소승 원숙도 창궁무존을 지지합니다.”
가장 앞에선 젊은 스님, 원숙이 합장하며 창궁무존에게 예를 표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무림맹 장로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원숙이 누군가. 소림 방장인 구천신승의 제자이자 젊은 피를 이끄는 차세대 소림의 핵심이다. 젊은 신승으로 이루어진 소림십팔나한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한때 반야불존에게서 사사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소림이 심혈을 기울여 키우는 핵심 인물이다.
그런 원숙의 돌발적인 발언은 충격이 작지 않다. 사실상 소림의 의중이라 볼 수 있었다.
“아미타불, 저는 예전에 흑검서생과 겨룬 적이 있습니다. 지금 되새겨보니 그자의 행동은 일반적인 사마외도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체 조사결과 반야불존께서 열반에 드셨던 날, 여러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소림에서는 흑검서생과의 은원을 없었던 일로…….”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당파 장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원군을 찾았다.
“무존이야말로 사리사욕 없는 대쪽 아닌가?”
“암암, 무림맹도 이제 엎어야지.”
그는 장로 대부분이 자신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음을 실감했다. 특히 저곳에서 빈정대는 표정으로 관찰하는, 다 떨어진 넝마를 입은 늙은 거지는 더욱…….
무당파 장로가 허탈감에 잠겼을 때 결정타가 날아들었다.
“오늘부로 무림맹의 모든 의결을 중지한다. 당분간 무림맹의 의사 결정은 나, 무존의 허락을 받아라! 이것은 무림맹 존립을 위한 불가결한 조치다!”화존과 소림을 등에 업은 창궁무존을 말릴 수 있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
천무태평악의 구슬픈 곡조가 사람들의 심금을 자아냈다.
무형의 단검을 밟으며 허공에서 춤추는 단천마령의 우아한 자태는 마교도뿐 아니라 무림맹과 흑련 사람들마저 혼을 빼놓았다.
그들은 마교에도 천상삼화 못지않은 마교의 꽃이 존재함을 비로소 깨달았다.
콰아앙!
폭발하는 충격파를 타고 우설금이 허공에서 제비 돌며 유연하게 미끄러졌다. 홍철산이 돌며 산강을 비 오듯 퍼부었다.
-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그대의 고운 눈매는.
-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그리움만 쌓이네.
천무태평악은 끊이지 않고 흐른다. 주석하의 내력은 끝없이 단검에 실려 천마를 공격했다. 흑검육식의 정수가 천마를 위협했다.
천무태평악에 몸을 맡긴 우설금은 이 음악에 담긴 주석하의 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 음악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전하고 있다.
그녀를 잃어 마음이 무너졌던 그 애절함이 그녀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그녀를 잃었었기에, 이제는 잃어서는 안 되기에 천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도록 그녀를 돕는 그 마음을 음률에 가득 담았다.
언제부터인지 그녀는 주석하를 사랑하게 됐다. 상춘원 미로가 시작이었는지 아니면 북해로의 여정 때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소림사의 혈전을 겪은 후부터였는지 그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그가 가슴에 깊숙이 자리 잡았고 이제는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해서라도 천마를 제거해야 한다.
그녀의 일생에서 천마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굳어지는 두려운 절대자였다.
지금도 천마 앞에 서는 순간 눈앞이 하얘지고 머릿속이 텅 빌 정도였다.
그런데 천무태평악이 그녀에게 안정을 가져왔다. 그의 사랑을 담은 이 음률이 그녀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켰고 자신감을 극대화했다.
천마를 잡을 수 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천마만은 확실하게 죽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자 두 사람의 미래를 찬란하게 빛낼 유일한 수단이니까.
천무태평악의 절절한 음률을 타고 그녀는 모든 내력을 천마에게 쏟아냈다.
마침내 천마도 알게 됐다. 천무태평악과 단천마공의 조합이 무엇을 뜻하는지.
두려움 속에 천마는 끊임없이 자신을 세뇌했다.
‘저들은 한낱 바둑돌에 불과하다! 꾸며놓은 바둑판 위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놈들에게 두려움을 가지지 말라!’
쿠콰쾅!
허공에서 강기를 비트는 천마의 눈에 정좌한 채 퉁소를 부는 주석하가 보였다.
군웅들이 보기에 이 싸움은 천마와 단천마령의 승부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주석하가 있다. 주석하의 천무태평악이 그에게 가하는 압력은 이미 태산을 넘어섰다.
순수하게 단천마령과의 싸움이었다면 그는 십 초식 이내에 끝냈을 것이다.
‘저놈! 대체 끝이 어디냐! 이대로 밀릴 수는 없다!’
상대방 공력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승산 없는 싸움을 지속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조금이라도 기력이 남아 있을 때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마침내 천마는 절대천마공의 최후 단계인 심검을 꺼냈다.
아마도 전생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이 마지막 심검을 전개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심검 앞에 그 누가 맞설 수 있으랴. 우설금이나 주석하는 절대 감당하지 못하리라!
고오오오-
천마의 가슴 앞에 거대한 무형의 검이 생성됐다. 폭이 한 자를 넘고 검신이 무려 다섯 장에 달하는 거검이었다.
목표물을 고민하던 천마는 주석하를 향해 조준했다. 주석하가 없는 우설금은 별것 아니기에 주석하를 없애는 것이 우선이라 믿었다.
관전자들은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낸 거검에 새파랗게 질렸다. 전설 속의 절대천마공 진수를 드디어 목격했다.
“가라!”
천마의 일성이 십만대산을 뒤흔들고 거검이 번개처럼 앞으로 날아갔다.
번쩍!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극강의 힘이 주석하에게 몰려갔다.
주석하의 반응도 빨랐다. 수천 개의 단검이 절대천마공의 거검으로 몰려갔다.
콰지직-
거검 앞에 단검이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갔다.
하지만 주석하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다. 천무태평악의 마지막 소절이 연주됐다.
- 그리워하고 사랑하리니. 쏟아지는 눈물은 그치지 않고.
- 긴 세월 막을 수 없고 흘러가는 그대의 사랑 잡을 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