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67화 (267/273)

267화 천마의 탄생 (1)

절대천마공이 만들어낸 거대한 심검의 위력은 대단했다. 전생에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주석하는 이처럼 여유롭게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음률로 만든 수천 개의 단검이 풍비박산 나면서 초토화됐다. 흑검육식의 최후 초식도 절대천마공의 위력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거검의 한계도 뚜렷했다. 전생에서 주석하는 공격용 단검을 일부 빼고 간신히 막았었다. 이번에는 모든 단검을 집중해서 방어한 데다 그때 비해 주석하의 공력은 더 높아졌다.

반대로 천마의 공력은 일갑자만큼 낮아졌다. 그 차이는 절대 작지 않았다.

쩍- 쩌쩡!

거검이 밀고 들어오는 만큼 거검의 형상 역시 얼음처럼 깨졌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천마가 당황할 때였다.

하늘에서 모란꽃이 떨어졌다. 천하를 절반으로 가르는 붉은 빛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번쩍!

일순간 시공간이 정지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주석하를 향한 거검에서 우설금의 홍철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천마의 가슴에 박히는 수백 개의 모란꽃을 목격했다.

모란꽃이 허공에 피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자 가장 처절한 장면이기도 했다.

천마평의 모든 군웅이 숨을 죽였다!

우설금은 춤을 멈추고 홍철산을 하늘 위로 들어 햇살을 가렸다. 그 모습은 평범한 여염집 규수처럼 아름다웠다.

천마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심장은 짓이겨졌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제야 천마는 전생에서도 이런 식으로 죽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번에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무한회귀공을 익힌 자가 있다면 불가능은 아니다. 지난 생에서 자신이 죽은 후 왜 회귀가 발생했는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그런 행운이 따를 것 같진 않다.

그 순간 천마의 안면이 확 일그러졌다.

회귀가 일어나고 부활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되풀이해서 주석하와 우설금에게 죽음을 맞이하고…… 이 굴욕은 회귀가 거듭되면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을.

바둑돌이 됐다!

그제야 천마는 자신이 우설금에게 무슨 짓을 해왔는지 깨달았다. 회귀를 반복하면서 그녀를 영원한 자신의 바둑돌로 키워왔다.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고통이었으리라.

다시 회귀가 반복되어 그가 살아나더라도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더 비참한 삶이 무한히 반복되는,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일 뿐인데……. 바둑돌일 뿐인데…….

천마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홍철산을 쓴 아름다운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점차 그녀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고 세상이 캄캄해졌다.

무한회귀공으로 수십 년 이상의 세월을 반복하며 살아온 천마의 최후였다.

천마의 죽음을 확인한 우설금은 감정에 북받쳐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일이 있다. 마교는, 그녀가 사랑했던 마교는 살려야 한다!

우설금은 홍철산을 높이 들었다.

사방에서 우레 같은 함성이 일었다.

“와아!”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 그리워하고 사랑하리니. 쏟아지는 눈물은 그치지 않고.

- 긴 세월 막을 수 없고 흘러가는 그대의 사랑 잡을 수 없네.

천무태평악의 마지막 소절이 반복됐다.

퉁소 소리에 맞춰 깨지고 남은 무형의 단검이 하늘로 솟구쳤다.

펑!

마치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새로운 시대를 축복하는 단검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때 사람들은 천마의 죽음을 확신했고 무림의 정상에 우뚝 선 두 사람을 경이의 시선으로 쳐다봤다.

천마는 사람이었고 단천마령은 신이었다!

방금 보여준 두 사람의 무공은 상상을 넘은 천하 최강이었다. 심지어 두 사람은 그리 고전하지도 않았다.

우설금이 홍철산을 빙글 돌리며 소리쳤다.

“내가 바로 천마다!”

와아아아-

새로운 마교의 지배자, 천마를 선언하는 일성이었다.

마교도들의 열광적인 함성이 십만대산을 울렸다.

양쪽으로 나뉘었던 마교도들은 이때만은 하나가 됐다. 마교의 분란은 사라지고 새로운 천마 아래 단합된 마교로 거듭났다.

무림맹도 흑련도 이 순간에는 어떻게 개입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무림인 가운데 주석하나 우설금에게 대항할 수 있는 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마를 비롯해서 금천마령, 은천마령, 무림맹의 무극천존이나 구파 장문인 모두 고혼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주석하와 우설금을 막을 자는 모두 사라졌다.

주석하는 정좌를 풀고 몸을 일으키며 우설금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모든 일이 마무리됐다. 앞으로 회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순리를 거스르는 역천은 막을 내려야 한다.

미래는 평화로울 것이다. 그 평화를 만끽하며 그는 우설금과 알콩달콩 살아갈 생각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우설금이 되어야 하기에 주석하는 조용히 몸을 돌려 퇴장했다.

그때였다.

우설금이 갑자기 신형을 날려 주석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일순간 그는 몸이 굳었고 부드러운 우설금의 몸을 등으로 느꼈다.

귀로 그녀의 감격에 북받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요!”

그리고 뒤를 이어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주석하는 가슴이 뛰었다.

“이제 여한이 없어요. 앞으로는 오직 당신을 위해…….”

주석하는 몸을 돌려 그녀를 강하게 품에 안았다.

일순간 경악한 마교도들의 침묵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이번 천마는…… 뭔가 좀 이상했다.

***

십만대산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새로운 천마의 탄생을 모두가 축하했다.

무림맹에서는 무림맹주를 비롯한 구파 장문인의 죽음이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의 짓임을 알게 되었고 복수해준 주석하에게 오히려 감사했다.

흑련은 무림맹을 견제하며 주석하와 우설금의 뒤를 든든하게 받쳤다.

당연히 중원 무림과 마교의 갈등은 씻은 듯 사라졌다. 이제 마교가 중원을 정벌하리라고 겁내는 자는 없었다.

가장 태세전환이 빨랐던 사람은 묵천마령이었다.

전생에서처럼 묵천마령은 재빨리 뒤처리하고 급한 일을 수습했다.

마교는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주석하와 우설금의 무공을 목격한 묵천마령은 알아서 바짝 엎드렸다. 주석하도 자연스럽게 묵천마령을 신임했다.

묵천마령은 무림맹과 흑련 인사를 만나 긴 전쟁의 마무리를 지었다. 주석하가 흑련 출신이었기에 무림맹, 흑련, 마교는 별다른 이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제 목숨을 걸고 싸웠는지 모를 만큼 세상은 평화로워졌다.

***

우설금이 마교를 접수한 후 주석하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했다.

반야불존이 생전에 그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 배교의 신물을 모두 없애달라는 그 말뜻을 주석하도 이제는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무한회귀공, 만리안석, 여의신단.

이 세 신물은 절대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자칫하면 세상의 흐름을 뒤엉키게 만들 수 있으니.

아직 이 세 신물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급하진 않다. 이 신물은 천마의 처소에서 고이 잠자고 있다. 그리고 만리안석은 그의 품속에 있으니까.

하루가 지나 마음이 안정되고 내공 또한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주석하는 우설금과 함께 천마의 서재로 향했다.

전생에서는 묵천마령과 함께 움직였지만, 이번에는 우설금과 함께다. 굳이 묵천마령이 무한회귀의 비밀을 눈치채게 할 이유가 없다.

“천마의 서재에 무한회귀공 비급이 있다고요?”

“그렇죠. 천마가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금고 안에 있어요.”

주석하는 우설금을 재촉했다. 늦게 간다고 달라질 일은 없겠지만 빨리 털어내고 싶었다. 무한회귀공 비급이 남아 있으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다시 천마를 부활시키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현재 무한회귀공을 익힌 사람은…….”

“내가 유일하죠. 그러니 빨리 없애야 해요.”

“그럼 당신이 절대자잖아요?”

우설금이 언급한 절대자는 무림 최강고수로 등극한 주석하와 조금 다른 의미다. 말 그대로 시공간을 지배하는 절대자다.

“그런가요? 전 그걸 바라지 않아요.”

주석하는 욕심이 없었다. 지금의 그는 과거의 천마처럼 사람들의 생사를 멋대로 관장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그 유혹에서 자유롭지만, 불로불사의 욕망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보통 사람이다.

다시 찾은 천마의 서재는 변함이 없었다.

주석하는 한쪽 구석에 놓인 쇠금고를 가리켰다.

천마의 서재에 무수히 드나들었던 우설금이지만 정작 저 금고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해 본 적이 없었다. 천마는 경외의 대상이었기에 감히 그런 의문을 품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열었어요?”

“그땐 무식하게 때려 부쉈죠.”

“당신답네요.”

요즘 들어 우설금도 부쩍 말수가 늘었다. 좋은 현상이다.

“금고 안에는 모두 네 가지 물건이 들어있어요. 무한회귀공과 여의신단 몇 알……, 천마의 일기장과 극마서생 우청엽의 비급.”

예상보다 다양한 물품에 우설금이 눈을 반짝였다.

“천마의 일기장에는…… 지금까지 천마가 회귀하면서 저지른 모든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요. 큰 줄거리는 우리가 아는 바와 똑같고…… 당신 이야기도 꽤 자세하게 적혀 있어요. 봐야겠죠?”예상과 달리 우설금이 고개를 저었다.

“보지 않을래요.”

주석하는 우설금의 마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천마에게 조종당한 지금까지의 인생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세월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시간 외에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존재하는지 그녀는 두려울 것이다.

그녀가 모르는 참혹한 순간이, 고통의 시간이, 타인의 의지에 허수아비로 전락했던 시절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어찌 되었건 천마는 그녀를 키웠던 사람이다.

원수이기도 하지만 은인이기도 했다. 이미 죽은 천마에게 원한을 추가로 쏟아내는 것이 무의미한 감정 소모라 여겼기에 그녀는 천마의 기록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그 기록을 남겨둘 생각도 없을 것이다.

주석하는 그녀에게서 아련한 아픔을 느꼈다.

“그럼 없애도록 하고…… 우청엽의 비급은 어떻게 할까요?”

우청엽 가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우설금이다. 그 비급의 소유권은 우설금에게 있다.

“그건 내가 익힐게요.”

우설금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주석하는 내심 기뻤다. 이것은 우설금이 우청엽 가문의 계승자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니까.

앞으로 우설금은 천마의 신분이면서 극마서생의 후예가 되어야 한다.

그와 혼인하면 이곳 십만대산보다 흑검문에서 생활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기에 그녀는 극마서생의 후예라는 신분이 필요하다.

우청엽의 내력을 몸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녀이기에 우청엽의 무공은 그녀에게 새로운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금고에 남은 여의신단 몇 알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십년유심홍이 아니라면 여의신단의 중요도는 확 떨어진다. 주석하도 새로운 무공을 익힐 일이 없고 우설금도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일 일이 없기에 두 사람 모두 여의신단이 불필요했다.

대충 처리방법을 결정한 후 두 사람은 금고를 살폈다.

“어?”

주석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우설금도 마찬가지였다.

놀랍게도 쇠금고가 열려 있었다. 겉보기에는 잠긴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살짝 열려 있었다. 과거에 완벽하게 닫혀있던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설마…….”

주석하는 다급하게 문을 열었다. 내부에는 그때처럼 물건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었지만…….

“무한회귀공만 없다!”

벼락을 맞은 듯 주석하는 꼼짝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따로 숨겨두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해서 천마가 이득 볼 일이 전혀 없으니까.

가능성은 단 하나. 누군가가 간밤에 들어와 훔쳐갔다!

주석하는 어제 천마가 죽자마자 이곳에 오지 않은 자신을 후회했다.

“절대천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누구도 열 수 없어요.”

우설금이 그 가능성을 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일은 터졌다. 무한회귀공 비급이 사라진 것은 현실이었다. 다시 무한회귀공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가?

‘무한회귀공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누구지?’

두 사람 외에 유일하게 무한회귀공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있긴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