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천마의 탄생 (2)
마교 총단의 외곽을 그림자가 가로질렀다.
십만대산의 산악지대에 세워진 총단의 주변은 낭떠러지 지형이라 무척 위험했다. 군데군데 우거진 나지막한 덤불을 타고 그 인영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뇌군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이동했다. 다행히 새로운 천마의 탄생을 축하하느라 마교의 경계는 허술했다.
덕분에 뇌군은 어렵지 않게 마교를 벗어날 수 있었다.
천주문을 지난 뇌군은 숨을 고르면서 천마의 거처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은 모르겠지?”
뇌군은 품속에 손을 넣어 물건을 재차 확인했다. 지금 그의 품속에는 천마의 서재에서 훔친 무한회귀공 비급이 들어있었다.
무한회귀공의 존재를 아는 그는 이 모든 사태의 본질에 무한회귀공이 존재함을 꿰뚫어 보았다.
처음 주석하를 만났을 때부터 그는 무한회귀공에 주목했다.
무한회귀공을 손에 넣으면 절대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때부터 그는 비상한 자신의 머리를 굴려 무한회귀공 획득에 총력을 기울였다.
상황은 그의 뜻대로 흘러갔다. 무한회귀공을 주목하던 만사지존 제갈휘가 죽은 후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어제 천마와 주석하 사이에 공전절후의 대 결투가 벌어졌을 때, 그는 마교 총단에 잠입했다. 그리고 천마의 서재에 놓인 쇠금고를 발견했다.
아무도 열 수 없는 금고라지만 뇌군에게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평생을 기관진식과 진법에 매진했던 그다. 시간이 주어지면 금고를 여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다행히 승리한 주석하와 우설금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뇌군은 금고를 열었고 무한회귀공을 훔쳤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불로불사의 신이 될 수 있다!”
그는 아직 무한회귀공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이 무공으로 시간을 되돌려 회귀할 수 있다는 것만은 안다. 그가 젊었을 시절로 회귀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새로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
흑도팔군이자 흑련의 책사였던 이번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 회귀하면 흑도팔군을 휘어잡아 흑련의 련주가 되어 최고의 삶을 누릴 것이다.
무림맹을 발아래 두고 가능하다면 마교마저 무너트려 무림 일통을 달성할 것이다.
모든 부귀영화를 다 가진 진정한 절대자로 거듭날 것이다.
꿈은 크고 야무지게 꿔야 한다. 뇌군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섬뜩한 기운이 몰려왔다.
“뇌군!”
순간 엄습하는 살기에 뇌군은 일장을 뿌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눈앞에서 익숙한 인물이 검을 들고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
뇌군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지?
그를 막아선 자는 자하검존이었다. 이곳에 온 무림맹 인사 가운데 유일하게 그를 막아설 능력이 있는 인물이다.
“어디를 바삐 가는 거지?”
“아직 살아있었네? 영빈관에서 죽은 줄 알았더니!”
영빈관 상태가 워낙 나빴기에 일일이 시신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자하검존이 죽었다고 여겼다.
“적어도 네놈보다는 명줄이 길지. 우린 해결할 문제가 있을 텐데?”
자하검존이 뇌군에게 검을 겨눴다.
비록 뇌군도 흑도팔군이라지만 절대적인 무력을 따지면 자하검존에 미치지 못한다. 기관진식에 특화된 뇌군의 무공이 자하검존을 능가할 수는 없다.
“문제? 그런 건 없어. 난 이제 구세대야. 오늘 이 시간부터 무림에서 은거하려고. 그동안 문제가 있었다면 모두 내 잘못이니까 사죄하지. 진정하라고.”뇌군은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달랬다.
자하검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평소와 다른 뇌군의 행동에 벼락처럼 기시감이 일었다.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 은거하는 마당에 그런 게 어디 있겠나?”
“거짓말!”
“진짜일세. 난 이제 흑련의 책사가 아니라네. 다 내려놓았어. 그리고 아무 욕심도 없네!”
뇌군은 양손을 들고 마음을 비웠음을 강조했다.
자하검존의 눈이 예리하게 뇌군을 훑었다. 그리고 방금 뇌군을 발견했을 때 마교 총단을 바라보던 행동, 품속을 뒤적거리던 행동을 떠올렸다.
“뭔가를 숨기고 있군.”
“숨기다니! 저, 절대 아니다!”
그 순간 자하검존의 검이 빛살처럼 뇌군의 가슴팍을 갈랐다. 당연히 자하검존도 뇌군을 바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가슴팍 옷이 갈라지면서 품에서 어떤 물체가 툭 떨어졌다.
“무한회귀공?”
자하검존이 떨어진 비급에 시선을 돌리는 순간 뇌군이 재빨리 비급을 줍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자하검존에게 예전의 기억이 서로 맞물렸다.
가적성이 전했던 마교의 비밀과 제갈휘가 걱정했던 회귀자, 주석하에 대한 의심. 그 모든 장면이 눈앞의 무한회귀공으로 귀결됐다.
그렇다! 저 비급이 바로 배교의 신물이다!
진실을 깨달은 자하검존은 뇌군을 추격했다.
낭떠러지 가장자리를 타고 뇌군은 정신없이 달렸다. 무한회귀공을 빼앗기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파인에게. 그것도 욕심 많은 자하검존에게 무한회귀공이 넘어가면 상황은 최악이다.
그 순간 뇌군은 자신의 욕심이 자칫 이 세상을 망가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한회귀공을 확보한 자하검존은 과거의 천마보다 더 지독하게 역천을 행할 것이다.
“절대 안 돼!”
한 손에 비급을 들고 정신없이 뛰어가는 뇌군의 등으로 자하검존의 검기가 날아갔다.
순간의 선택이 필요했다. 도주를 멈추고 자하검존을 상대할 것인가. 아니면 무시하고 계속 달릴 것인가.
애초에 자하검존을 상대할 능력이 부족했다. 두 다리에 문제가 없다면 도주를 계속해야 한다.
뇌군의 결심은 빨랐다. 그는 뒤에서 날아드는 검기를 무시하고 더욱 속도를 높였다.
“커윽!”
등이 화끈했다. 작지 않은 자상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뇌군은 멈추지 않았다. 자하검존이 공격하느라 멈추는 바람에 둘 사이의 거리는 더 벌어졌다.
“잡아!”
뒤에서 자하검존이 급하게 소리쳤다.
그때 뇌군은 앞을 막아서는 두 여인을 발견했다. 재수가 없으려니 하필이면 앞에 엉뚱한 사람이 있다니! 앞을 막는 사람들이 자하검존 일행이 아니기를 바랐다.
***
무림맹이 십만대산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설매검화 유비연도 합류했다.
그녀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사부인 자하검존 때문이었다. 사부가 원정군을 지휘하는 이상 사부를 돕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거들어야 했다.
물론 그 결정에 주석하의 움직임도 영향을 미쳤다. 무림맹이 주석하의 뒤를 쫓았기 때문이다.
십만대산에 온 후에도 그녀는 무림맹 내에서 이런저런 임무를 수행하느라 주석하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자하검존이 영빈관에서 행방불명됐다.
사건 현장을 조사했던 그녀는 사부가 살아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사부의 흔적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자하검존 같은 고수가 허무하게 죽을 리 없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그것은 사부를 향한 믿음이기도 했다.
주석하와 우설금이 천마를 죽이고 승리했을 때 그녀는 무림맹 사람들과 섞여 그 장면을 구경했다. 주석하의 옆에 우설금이 있었기에 한편으로는 씁쓸했지만 그녀는 진정으로 주석하의 승리를 축하했다. 이제 주석하는 그녀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로 급상승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오늘은 아침부터 천주문 부근을 걸었다. 전쟁이 끝난 이곳에서 그녀의 산책을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악홍아였다.
두 사람은 예전에 운남에서 만났던 적이 있었다. 주석하가 무극천존과 싸웠던 그때였다. 악홍아가 먼저 유비연을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산책이 시작됐다. 마교 총단이 눈에 보이는 천마평 고원에서였다.
“잡아!”
갑자기 들려온 사부의 외침에 유비연은 깜짝 놀랐다.
죽었다고 생각한 사부가 검을 든 채 달려오고 있었다. 그 앞에는 그녀에게도 익숙한 뇌군이 한 손에 책을 들고 그녀를 향해 정신없이 덤비고 있었다.
챙!
사태를 판단할 시간은 없었다. 유비연은 달려오는 뇌군을 향해 일검을 날렸다.
뇌군은 차마 앞에서 내리치는 일검을 무시할 담력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이며 유비연을 피했다.
그 순간 유비연 옆에 있던 악홍아마저 검을 휘둘렀다.
도저히 두 사람을 뿌리칠 방법이 없자 뇌군은 탄식하며 도주를 중단했다.
뒤에는 자하검존, 앞에는 유비연과 악홍아.
비록 유비연과 악홍아가 그보다 하수라지만 지금 상황에서 돌파하기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방금 일검을 맞은 등이 욱신거렸다.
“감히! 비켜라!”
“뇌군! 항복하라!”
유비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뇌군은 이빨을 악물고 상대를 노려봤다. 상황이 점차 최악으로 흐르고 있었다.
뒤따라온 자하검존이 헉헉대며 소리쳤다.
“뇌군! 비급을 내놓아라!”
이제 이 비급은 뇌군이 목숨을 건질 유일한 수단이자 절대 빼앗기면 안 될 물건이 됐다. 어떻게 할지 다급하게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하필 자하검존의 제자라니!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없다.
상대가 포위망을 점차 좁혔다.
뇌군의 심적 동요를 자하검존은 놓치지 않았다.
“뇌군! 비급을 내려놓아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자하검존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저 말이 지켜지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뇌군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앞에는 자하검존을 비롯하여 모두 세 사람이 포위하고 있고 뒤에는 까마득한 절벽이다. 어디로도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좋아, 먼저 검을 내려라.”
“안 돼! 비급부터 내려놔!”
“내 목숨부터 보장해!”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라!”
양측의 기 싸움이 시작됐다.
누가 먼저 내려놓든 결과는 같지만, 그들은 상대를 믿지 않았다.
자하검존과 유비연을 노려보던 뇌군은 조심스럽게 몸을 굽혀 비급을 바닥에 놓았다.
쐐액-
뇌군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파공성이 일었다. 무려 검강이었다!
자하검존의 일검이 뇌군을 노리고 직격타를 날렸다.
“이! 미친!”
자하검존이 이렇게 비열하게, 그것도 빨리 공격할 줄 예상하지 못한 뇌군은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강력한 검강을 차마 상대하지 못하고 뇌군은 무심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순간 발에 닿는 부분이 사라졌다. 놀란 뇌군은 다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눈앞에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보였다.
“으악!”
자하검존의 검강이 문제가 아니었다. 몸의 균형을 잃은 뇌군은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새가 된 기분을 느꼈다.
‘아아! 새 됐다!’
순식간에 뇌군이 사라졌다. 천 길 낭떠러지이니 아마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일세를 풍미했던 흑련의 책사가 허망하게 사라졌다.
자하검존은 가슴이 후련해졌다.
뇌군은 절벽에 떨어져 죽었고 지금 눈앞에는 배교의 신물 무한회귀공 비급이 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달려가 비급을 집었다. 표지에 적힌 글씨, 역시 무한회귀공! 바로 그 비급이었다.
“사부!”
옆에서 유비연이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죽었다던 사부가 살아있다는 반가움의 표시다.
당연히 자하검존은 유비연을 본체만체했다.
방금 뇌군을 잡을 때 유비연이 결정적인 공을 세웠지만 뇌군이 죽은 지금 그녀는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지금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무한회귀공이었다. 이 비급만 있으면 그는 절대자로 등극할 수 있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 중원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천마처럼 그도 무림맹주가 되어 영원한 제왕이 될 수 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피가 끓어오른다.
“나는 승리했다!”
자하검존이 비급을 품에 넣으려는 순간 천둥 같은 일성이 천마평을 뒤흔들었다.
“자하검존!”
흑검서생 주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