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천마의 탄생 (3)
자하검존은 절망에 사로잡혔다.
이 순간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자가 앞에 등장했다. 이 상황에서는 돌파할 수가 없다. 상대의 무공이 그를 아득히 넘어섰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정파십존이 된 후 지금까지 이토록 절망적인 상황은 없었다. 주변에는 모두 그보다 무공이 못한 자들이었고 그는 항상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평소와 달랐다. 최강자 앞에서 그는 이름 없는 하류 무사가 된 기분이었다.
“항복하라!”
주석하의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지금 항복한 후 훗날을 기약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문제는 손에 든 무한회귀공 비급이다. 이 비급만 빼앗기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자신도 절대자가 될 것이다.
조금 전 뇌군이 이 비급을 사수하기 위해 죽는 순간까지 힘을 쏟았으니 의문의 여지가 없다.
손에 잡힐 듯 다가온 절대자의 삶, 불로불사의 세계. 어찌 손에서 놓을 수 있을까.
“네놈에게 항복할 수는 없다!”
일단 강하게 반발해놓고 자하검존은 눈을 굴렸다.
앞을 막은 주석하까지의 거리는 대략 십여 장, 뒤에는 뇌군이 떨어진 천 길 낭떠러지. 그와 유비연, 악홍아까지는 불과 이 장.
정말 이런 짓만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주석하가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붙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를 나쁘게 만든 것은 네놈이야!’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자하검존이 재빨리 유비연을 덮쳤다. 당연히 유비연은 사부를 경계하지 않았다.
자하검존은 비급을 쥔 손으로 유비연을 품에 안고 다른 손에 잡은 검으로 그녀의 목을 겨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사제지간이기에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주석하에게만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자하검존은 최후의 순간에 유비연의 목숨을 빌미로 빠져나가려 했었다. 역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흐흐! 흑검서생! 어떠냐?”
유비연의 목을 겨눈 검날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주석하는 입을 열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유비연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사, 사부!”
“넌 가만히 있어! 저 자식은 너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자하검존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하검존의 목소리는 평소와 마찬가지였으나 유비연은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예전에 주석하가 했던 충고를 떠올렸다.
- 이런 말을 해봐야 의미 없겠지만 자하검존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무공을 가르치는 사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겠지만 그의 인성은…….
- 당신의 사부는 절대 당신을 아끼고 위해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역시 그녀의 사부는 그런 사람이었다.
주석하는 자하검존의 성품을 꿰뚫었고,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몇 번이고 경험하면서도 끝내 사부를 저버리지 못했었다.
그 결과는…… 지금처럼 겪고 싶지 않은 상황으로 몰렸다.
유비연은 자하검존에게 하소연했다.
“사, 사부! 아직도 늦지 않았어요!”
“지금 네가 할 일은 이 사부를 구하는 것뿐이다.”
자하검존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더 강하게 윽박질렀다. 그녀가 반항을 멈추자 자하검존은 주석하를 향해 소리쳤다.
“네놈도 불로불사를 원하나?”
주석하의 눈이 찌푸려졌다. 역시 자하검존도 무한회귀공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어떤 희생도 무한회귀공과 바꿀 수 없다는 사실도 알려나?
전생에서 그는 무려 우설금의 목숨과도 무한회귀공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유비연의 목숨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대답이 없자 자하검존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긴 욕심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지. 겉으로는 성인군자인 척하지만.”
주석하의 안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결정적으로 자하검존이 모르는 사실. 주석하는 이미 무한회귀공을 익혔다.
자하검존은 오직 천마만 무한회귀공을 익혔기에 이 세상에서 무한회귀공을 익힌 자가 없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비급을 가지면 자신만이 신공을 익혀 절대자가 된다고 생각했다.
자하검존은 지금 주석하가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이유가 무한회귀공을 익히고 싶어서라고 단정했다. 무한회귀공을 없애고 싶어서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렇기에 자하검존은 자신이 이 비급을 쥐고 있는 한 주석하가 함부로 덤비지 못하리라 여겼다.
“네놈도 이 무공으로 절대자가 되고 싶은가 본데…….”
말을 흐리며 자하검존은 주위를 둘러봤다. 주석하 외에는 그를 막을 자가 없다. 유비연을 이용해서 주석하를 따돌리면…….
순간 자하검존은 검으로 유비연의 등을 찔렀다.
푹!
“으윽!”
자하검존은 검을 회수하지도 않고 급히 몸을 날려 도주했다.
이를 목격한 주석하는 한숨을 쏟아냈다. 그때와 같다. 전생에서도 자하검존은 유비연을 찌르고 도망쳤었다. 주석하가 유비연을 살피는 시간을 벌겠다는 심보다.
놀랍게도 주석하는 추격하지 않고 매서운 눈초리로 자하검존을 좇았다.
분노한 표정으로 그는 흑검소를 입에 물었다.
삘리리리-
천무태평악이 연주되고 수백 개의 무형화된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마와 싸우던 바로 그 장면이 재현됐다.
슈슈슉-
단검의 움직임은 빨랐다.
수십 장을 도망친 자하검존을 향해 수백 개의 단검이 벌떼처럼 몰려갔다.
자하검존은 등 뒤로 날아드는 예리한 살기를 감지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일단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급했다.
푹- 푸푸푹-
단검이 자하검존의 육신을 난도질했다. 그의 몸을 통과한 단검은 손에 들린 비급마저 갈기갈기 찢었다.
무한회귀공 비급이 순식간에 걸레짝으로 변했다.
자하검존은 눈앞의 장면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무한회귀공이 사라지다니!
“아, 안 돼!”
자하검존은 망연자실한 채 몸부림쳤다.
그의 발밑이 허전했다. 단검을 피하고 비급을 잡으려다 어느새 벼랑 가장자리를 벗어났다.
눈앞에 천 길 낭떠러지가 들어왔다. 방금 뇌군이 추락했던 바로 그곳이다.
“으아아악!”
긴 비명과 함께 자하검존은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정파십존으로 무림을 군림했던 한 영웅의 비참한 종말이었다.
주석하는 재빨리 유비연에게 뛰어갔다. 이미 악홍아가 그녀를 붙잡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얼른 목숨을 구해야 해!”
주석하는 유비연을 안고 총단으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고 악홍아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뒤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주석하 옆에는 여인들이 너무 많았다.
***
무림맹이 위치한 하남은 중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이다.
중원 무학의 원류인 소림을 비롯하여 셀 수 없이 많은 문파가 하남에 밀집해 있다. 많고 많은 소규모 무림세가 중에 이가장(李家莊)이라는 이름 없는 문파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세월, 이가장은 지역에서 나름 정파의 한 축으로 평가받았으나 최근에는 가주의 사망으로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 이가장에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암흑단의 습격으로 무너졌던 정문은 말끔하게 보수되었고, 지금 그곳에는 붉은 휘장이 걸려 방문객을 축하했다.
무심코 지나가던 거지가 잔칫집임을 눈치채고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잔칫날에는 인심이 후해서 외부 사람에게 음식과 은자를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넓은 뜰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음식을 타고 있었다. 곧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거지는 기분이 흡족했다.
“여보시오, 무슨 잔치입니까?”
앞에 선 사람의 등을 두드리며 거지가 물었다.
이웃 마을 사람으로 보이는 청년이 거지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몸을 움츠렸다.
“야! 옷 버린다. 저리로 가!”
화난 청년의 고함에 찔끔한 거지가 본능적으로 등을 치던 손을 회수했다.
“그, 그런데 무슨 잔칩니까?”
“그것도 모르고 밥을 얻어먹어? 이 부인 외손녀 혼례라네!”
“여, 여기 몇 달 전에 장주가 죽어서 장례를 치렀잖습니까?”
“어? 그때도 얻어먹었나 봐?”
거지는 밥을 먹을 수 있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는다. 머쓱해진 거지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후두둑 이가 떨어지자 청년이 기겁하고 물러났다.
“어쨌든 밥을 준다는 거네.”
거지가 자리를 차지하자 분기탱천한 청년이 팔을 걷으며 외쳤다.
“이 자식! 저리로 안 가? 네놈 때문에 줄을 못 서잖아?”
그때 사람들이 웅성대며 한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정문으로 꽤 권세가 있어 보이는 두 사람이 들어섰다. 한 사람은 위풍당당한 중년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거지였는데 그 기세가 남달랐다.
사람들이 두 사람을 확인하고는 입을 떡 벌렸다.
“창궁무존 남궁후다! 신임 무림맹주다!”
“그 옆에는 개방 방주인 칠절신개 아닌가!”
순간 청년이 찜찜한 눈으로 방금 툭탁거린 거지를 훑었다.
“혹시 개방이시오?”
“우리 방주님이지요.”
순간 주변 사람들이 거지에게 읍을 하면서 아부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아! 개방에서 오신 대협이셨군요.”
거지는 뿌듯한 표정으로 다시 줄에 합류했다.
‘개방은 개뿔! 개방은 아무 거지나 다 받아주는 줄 아나?’
신임 무림맹주까지 하객으로 등장한 이 혼례는 시작부터 수상쩍었다.
***
주석하는 걸리적거리는 붉은 비단옷을 대충 걷어붙이고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이가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처음 와보는 곳이다. 하지만 이 장원이 우설금의 외가라 하니 낯섦보다 반가움이 더 컸다.
혼례를 알리는 붉은 휘장이 그를 반겼다.
“여기입니다.”
주석하가 마치 와본 적 있는 것처럼 일행을 안내했다.
그의 뒤에는 부친인 주격을 비롯하여 장로인 신옹, 누이동생인 주소은과 명아에 이르기까지 흑검문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들은 주석하와 우설금의 혼례를 맞이하여 이가장을 방문했다.
“크흠!”
주격이 헛기침으로 방문을 알린 후 가장 먼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맞은편에서 소식을 들은 이가장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오늘은 친영(親迎), 신랑이 신부 집에서 예식을 올리고 신부를 맞이해 오는 날이다.
두 가문의 거리가 멀어서 주석하가 가는 김에 온 가족이 총출동해서 신부 집에 도착했다. 오늘이 아니면 양가 친척들이 얼굴을 보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설금은 부모가 계시지 않아 집이 없다. 그래서 외가인 이가장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주석하는 맞은편 이가장 사람 중에 가장 앞에서 환대하는 노부인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우설금의 외조모라 했던가. 우설금이 이가장을 방문했을 때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맞이하고 힘이 되어준 사람이라 했다.
그렇기에 노부인은 그에게도 특별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아마 그도 노부인에게 특별한 사람일 것이다.
“자네가 바로 석하지? 듣던 대로 훤칠하게 잘 생겼네.”
“예, 제가 주가의 장남, 석하입니다.”
어릴 때 할머니를 잃어 할머니 기억이 없는 주석하에게 노부인의 자애로운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노부인이 주석하의 손을 잡고 자상한 미소를 보냈다.
주석하는 노부인 옆에서 즐겁게 웃는 두 남매를 발견했다. 우설금과 사촌지간인 이명과 이설은이다. 이명은 늠름한 청년이었고, 이설은은 인상이 우설금과 닮았다.
얼핏 우설금과 이설은이 자매라 여겨질 정도다. 말로만 듣던 이설은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갑자기 마음에 드는 친척이 생겼기에 주석하는 기쁨을 지우지 못했다.
이래저래 환담하며 인사를 마쳤을 때였다.
다시 정문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두 남녀가 등장했다. 바로 도수와 녹윤영이었다.
도수를 발견한 이가장 사람들의 안색이 얼어붙었다.
시간이 흘렀다지만 어찌 잊을 것인가. 그날 이가장 장주 이산을 검으로 찔러 죽인 원수가 아닌가.
안면이 딱딱하게 굳은 이명과 도수가 서로에게 눈을 맞추자 왁자지껄했던 잔칫상에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