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70화 (270/273)

270화 혼례 (1)

여기가 외나무다리일까?

주석하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최근에 그도 우설금에게 듣긴 했다. 암흑단이 이가장을 습격해서 장주를 죽였을 때 우설금이 도수를 저지했던 사건이다.

우설금과 도수의 은원도 문제지만 지금 이 순간은 도수와 이가장의 은원이 문제였다. 이명과 이설은에게 도수는 아버지를 죽인 불구대천지수다. 하늘 아래 같이 존재할 수 없는 원수다.

주석하는 도수가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암흑단이 하남에서 가깝고, 도수가 그와 절친이라지만 도수에게 이가장은 방문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그는 도수를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상황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곳에서 바로 쫓겨난다고 해도 도수는 할 말이 없다.

이명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적의가 떠올라 있었다.

당황한 표정을 짓던 도수는 천천히 노부인 앞으로 걸어갔다. 일순간 긴장이 폭발하며 이명을 비롯한 이가장 사람들이 도수의 앞을 막았다.

“죄송합니다.”

도수가 노부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객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도수와 노부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도수와 노부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수는 꿇어앉아 머리를 숙였고 노부인은 그런 도수를 조용히 내려다보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노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죽은 아들이 다시 생각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노부인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 눈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이 살인범을 죽여 원수를 갚아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살인범을 용서하기에는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

눈물을 훔치던 노부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의 원한은 이렇게 하늘로 날려 보내야 할 듯하다.

“일어나게. 축하하러 왔으면 밥이라도 들고 가게나.”

“고맙습니다. 노부인.”

도수는 다시 한차례 절을 한 후 몸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이 이명과 이설은도 적의를 거뒀다. 그들도 도수가 누구인지 어떤 관계인지 이야기를 들었었다. 무려 암흑단의 단주이자 흑도팔군의 일인인 암군의 제자이고 우설금과 결혼할 주석하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 했다.

아무리 부친의 원수라지만 주석하와 반목할 생각이 아니라면 막무가내로 도수를 적대하기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명과 이설은은 주석하와 우설금의 신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설금이 최근에 마교 교주에 등극하여 천마가 되었다니! 게다가 주석하는 겉으로는 작은 문파인 흑검문 소문주였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이었다.

이런 두 사람의 신분을 축하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의 마교는 그들이 짐작했던 마교가 아니었고, 사파 또한 그들이 알던 흑도가 아니었다.

졸지에 마교와 흑도, 아니 중원 무림 최강자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된 두 사람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당황했다.

동시에 이가장의 위상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주석하와 우설금에게 선을 대려는 사람들이 연달아 방문했다.

혼례를 맞이한 오늘도 이가장은 인산인해였다.

무림에서 유명하다는 정파와 사파의 모든 문파 관계자가 총출동했다. 덕분에 이가장 대표인 두 사람은 손님맞이에 바빴고 여러 유명인사와 친교를 트게 됐다.

“이리로 오시지요.”

이명이 도수를 안내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무사히 마무리된 상황에 주석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수를 용서해준 노부인의 넓은 마음에 그는 고마움을 표했다.

다시 하객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 제자 오늘따라 너무 잘 생겼네?”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찜찜한 기분을 모두 날렸다.

목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 얼굴이 즉시 떠올랐다. 주석하는 누구보다 반갑게 화존을 맞이했다.

정문을 들어서는 세 여인은 화존과 악군에 그 제자인 백화령이었다.

화존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고 악군은 어색한 듯 안면이 굳었다. 백화령도 평소처럼 화사한 기색이었다.

“오셨습니까?”

화존이 미간을 확 찌푸리고 삿대질을 시작했다.

“그날 야밤에 도주하더니 신부 보고 싶어서 간 거지? 어떻게 말도 없이 사부를 버릴 수 있어?”

“에이, 그게 아니라 바쁜 일이 있어서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천리비행공과 백옥수를 전수하려 했더니 말도 없이 도망쳐? 흥! 다시는 무공을 전수하나 봐라!”

“그, 그게요…….”

주석하는 변명을 계속하며 식은땀을 연신 훔쳤다.

그는 이미 천리비행공과 백옥수를 자유자재로 쓴다. 전생에서 화존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아마 화존보다 못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그 두 무공은 그에게 무척 도움이 됐다. 물론 화존은 자신이 가르쳐준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아무래도 날 잡아서 다시 한번 배우긴 배워야겠어.’

화존을 달래려면 어쩔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저 장난기 많은 사부에게 두고두고 씹힐 테니.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혼례를 잡으면 어떡해? 우리 예쁜 화령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눈물을 질질 짰는지 알아?”

“예?”

“사부!”

백화령이 다급하게 화존의 입을 막으려 했다.

당연히 화존은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말을 뱉어냈다.

“오죽하면 내가 너를 확 보쌈해 오려고 계획을 다 짰을까. 오늘 밤 조심해라! 보쌈 당한다.”

화존의 막말에 주석하는 몸을 움츠렸다.

주변 하객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모두가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무려 화존이 절기인 천리비행공과 백옥수를 가르쳐준다고 했는데도 도망쳤다니!

거기에 천상삼화의 일인이자 중원 최고 미녀로 알려진 천중화 백화령을 거절했다고?

하객들의 의아한 시선이 주석하에게 집중됐다.

그날 십만대산에 갔던 중원인은 극히 일부다.

지금 이곳에 온 사람들 대부분은 우설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우설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은 우설금이라면 천마를 먼저 떠올렸다. 중원을 노리던 사악한 악마인 천마!

그렇기에 사람들은 우설금을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이 아니라 무시무시하고 표독스러운 여인으로 연상했다.

“쯧쯧, 불쌍하지. 경국지색인 천중화 대신에 천마와 혼인하다니. 천마에게 협박을 받았나 봐.”

“천마가 잘생긴 남자를 밝히나 보네. 천마와 하룻밤? 오금이 저려 밤일이나 제대로 하겠어? 사내구실도 쉽지 않네.”

여기저기서 주석하를 동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존이 주석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오늘 밤 쫓겨나면 내가 받아줄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래도 나 아직 안 늙었거든.”

“사부!”

백화령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화존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석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악군을 응시했다.

악군의 표정은 미묘했다. 그동안 그녀는 이가장을 미워했고 거리를 두었었다.

사랑했던 우경천을 이가장 딸인 이가흔에게 빼앗기고 난 후부터다. 그전에는 악군은 이가흔과 친하게 지내면서 이가장을 자주 방문했고 노부인을 공경했었다.

이곳에 들어서자 불현듯 이십 년 전의 일이 떠올라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악군은 이가장 노부인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굽혔다.

“저…… 왔습니다.”

노부인이 악군을 조심스럽게 뜯어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아아! 네가 웬일이냐? 대체 몇 년 만이야!”

이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노부인은 악군을 알아봤다. 어찌 모를까, 딸과 가장 친했던 친구를.

딸이 결혼할 때쯤 갑자기 소식이 끊어졌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들르지 않았던 사람이 오늘 다시 찾아왔다.

한때 친딸처럼 아꼈었는데 한 남자를 두고 딸과 사이가 틀어졌기에 노부인도 안타까워했었다.

잊었던 딸의 친구가 다시 찾아온 것은 노부인에게 혼례 못지않은 반가움과 감동을 주었다.

“어머니, 저도 왔어요!”

화존이 악군 옆에서 꾸벅 인사했다.

노부인이 악군과 화존을 어루만지며 다시 눈물을 쏟았다. 오래전 죽은 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주석하는 우설금의 어머니인 이가흔과 악군, 화존이 과거에 현재의 천상삼화와 같은 관계였으며 무림에서 관심의 대상이었다고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친했었기에 악군과 화존은 자주 이가장을 방문했었고 노부인을 어머니처럼 섬겼었다.

그랬던 그들의 관계가 이가흔이 우경천과 결혼하면서 끊어졌기에 노부인을 비롯하여 악군과 화존에게 오늘 방문은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

“그래, 잘 왔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니?”

노부인의 질문에 화존이 주석하를 손가락질했다.

“저 녀석이 우리 제자예요.”

의외로 이어진 인연에 노부인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객들은 갑자기 나타난 미모의 여인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은 이가장이 화존, 악군과 인연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두 사람이 흑검서생의 사부란 점에는 더 놀랐다. 이 혼례 때문에 악군이 은거를 깨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도 놀라움을 더했다.

“앞으로 손주 사위가 말을 듣지 않으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제가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

“괜찮다. 저 아이는 우리 손주 없으면 못산다더라.”

“아! 보쌈하려 했더니 참아야겠네요.”

화존의 투덜거림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됐다.

강호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많은 사람이 방문했다. 신임 무림맹주인 창궁무존 남궁후는 가족과 함께 직접 방문했고 신임 구대문파 장문인들도 대거 참석했다.

암흑단과 혼천교에서도 암군, 혼군을 비롯하여 다수가 왔다.

마교에서는 천마를 대신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 중인 묵천마령이 직접 오진 못했으나, 그 아래 주요 인물들이 천마 호위 겸 축하 겸 모습을 드러냈다.

흑귀와 백귀는 오래전부터 이가장에 머물면서 지금도 예전처럼 우설금을 호위하고 수발을 들었다.

과거라면 이처럼 다양한 문파가 모였을 때 분란이 발생할 우려가 컸으나 지금은 달랐다.

정파, 사파 사이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데다 우설금이 천마가 된 후 마교 또한 중원을 향한 적대적 감정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이다.

최근 수십 년간 없었던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하객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는 주석하는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태어난 후 지금까지 무림은 항상 정사로 나뉘어 피 튀기는 대결을 벌였다.

여기에 더해 마교는 호시탐탐 중원을 노렸다. 그 와중에 무공이 약한 하류 무사들은 작은 전쟁에서도 목숨을 잃었다.

전전생에서 그는 흑검문의 멸문으로 강호를 전전했고, 나중에는 칼받이가 되어 십만대산에서 죽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무림은 무척 평화로웠다.

그것이 그의 노력 때문은 아니겠지만 일정 부분 그의 공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분위기라면…… 꼭 은거해서 백화루주로 살아갈 이유는 없지.’

어차피 은거는 물 건너갔다. 그의 아내가 무려 천마니까.

우설금은 천마에 등극한 후 바로 묵천마령에게 천마를 물려주려 했지만 마교도 모두가 반대했다.

덕분에 우설금은 천마의 신분이면서도 중원으로 나와 흑검문에서 거주하는 이상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어쨌든 앞으로 강호 대소사를 챙기는 그런 임무는 사양이다. 이제는 자신의 삶을 챙기고, 가족이 된 우설금과 부친, 동생과 함께 오순도순 지낼 예정이다.

그에게만은 인생의 승자는 무림맹주나 천마가 아니다. 골치 아픈 지위보다 돈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백화루주가…….

문득 백화루주가 되었다는 말에 기겁하던 우설금이 떠올라 주석하는 쓴맛을 다셨다. 마침 도수도 왔으니 백화루 관리를 협의해봐야겠다.

훗날 주석하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도수의 반응은 단순했다.

“이 동네에도 분점을 내면 어때?”

둥!

혼례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하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들으면서 주석하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겨 식장으로 들어갔다. 단상 앞에서 붉은 면사포를 덮어쓴 우설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