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혼례 (2)
이가장 뒤뜰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잘 가꾸어진 정원은 차가운 날씨임에도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곳에서 주소은은 멋들어진 화초를 구경하며 여유를 즐겼다.
흑검문을 벗어나 남의 집을 구경하기는 처음이다. 투박하고 검소한 흑검문에 비하면 이곳은 아담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흑검문이나 이가장이나 규모는 비슷한데 꾸며진 내부는 딴판이다. 그녀는 이가장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주석하의 혼례식이 하남 이가장에서 열린다고 했을 때 주소은은 누구보다 이를 반겼다. 하남이라면 사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남궁세가와 가깝다.
어쩌면 남궁천과 만날 수 있으리란 생각에 그녀는 가슴이 콩콩 뛰었다.
연서를 보내고 오매불망 만나기를 기다렸었다.
혈혼도객이 답장을 들고 왔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더구나 그 답장은 그녀가 생각하기에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수고한 혈혼도객에게 추가로 은자를 하사했다. 혼천도객은 너무 감격해서 거의 기절했었다.
“에이, 이거 가지고 뭘 그렇게 놀라? 오가며 돈이 부족했어?”
“아, 아가씨! 저에겐 아가씨뿐입니다.”
감격한 혼천도객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한동안 울부짖은 기억이 났다.
물론 그녀는 혼천도객이 왜 그렇게 과민반응을 일으켰는지 전혀 모른다.
어쨌든 남궁천과 만날 일만 기다리며 이가장에 도착했다.
하늘의 도움인지 다행히 남궁천도 이가장을 방문했다.
다만 남궁천은 너무 바빴다. 최근에 부친이 무림맹주가 되면서 남궁천 역시 무림맹의 주요직책을 맡게 되어 이곳에 와서도 주요 인사들과 회담하기 바빴다.
덕분에 그녀는 멀리서 남궁천을 한 번 본 게 전부였다. 그래도 남궁천을 보았다는 생각에 그녀는 날아갈 듯 기뻤다.
“……한가해지면 만날 기회가 있겠지.”
지금은 식장 주변에서, 남궁천의 회담장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배를 채운 후 이가장 후원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오빠의 결혼 후 곧바로 자신의 차례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남궁세가에는 아직 가본 적이 없지만 유명한 무림세가인 만큼 그 규모가 이곳 이가장보다 훨씬 크다.
잘할 수 있으려나? 무려 무림맹주의 며느리이자 중원 최고의 무림세가 안방마님이 되어야 할 운명이다. 그나마 최근에 오빠가 유명해져서 대충 양쪽 집안의 균형이 맞추어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김칫국을 마시면서 주소은이 화원의 석판을 조심스럽게 밟고 있을 때였다.
정원 나무 사이로 두 남녀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두 남녀의 뒷모습만으로도 누구인지 금방 알아봤다.
“설마?”
갑자기 가슴이 쿵덕거리고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무 사이에 숨어 두 남녀를 지켜봤다.
무림고수들은 부근에 사람이 접근하면 인기척을 감지한다고 했던가? 무공을 모르는 그녀였지만 들은 기억이 있어 더는 접근하지 못하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괜찮아…….”
“그, 그래도…… 그럴까요?”
뭔가 심각한 이야기가 오갔다.
남자가 여자의 한쪽 팔을 툭툭 치면서 정감을 표했다.
주소은은 기분이 묘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저 남자는 그녀를 건드렸던 적이 없었다.
입맞춤은커녕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여자를 막 건드리다니? 원래 저런 남자였었나? 그 달콤했던 연서는 모두 거짓이었던가?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지금 그녀가 관찰하는 두 남녀는 남궁천과 유비연이었다.
주소은은 유비연에 대한 실망감에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건 좀 아니잖아?’
유비연은 주석하를 꼬시려고 무려 남장까지 하고 따라다니지 않았던가?
그런데 주석하를 놓치자 이번에는 남궁천에게 꼬리 치다니. 물론 그녀가 천상삼화에 속할 만큼 예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녀에 비하면 자신은…… 솔직히 비교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유비연에 대해 그나마 좋았던 감정이 낱낱이 사라졌다.
빠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탓일까. 주소은은 뒤로 물러서다 마른 가지를 밟았다.
남궁천과 유비연이 급히 떨어지며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왠지 마주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괜히 바닥을 기는 자존감 때문에, 부끄러운 마음에 주소은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주 소저!”
남궁천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그녀는 무시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눈물이 나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뛰던 그녀는 누군가와 부딪쳤다.
“미, 미안해요.”
옆으로 비키려는 그녀를 억센 손이 확 붙잡았다. 당황한 주소은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남궁천이었다.
“주 소저!”
주소은이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남궁천이 넓은 품으로 끌어안았다.
주소은은 북받치는 설움에 눈물을 쏟았다. 무엇이 그리 슬픈지 그녀도 몰랐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조용히 다독이던 남궁천이 그녀가 잠잠해지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요? 안 좋은 일 있어요?”
다정한 남궁천의 말에 주소은은 미움이, 아쉬움이 모두 녹아내렸다.
당신 때문이라고, 당신 때문에 울었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아! 오빠를 떠나보내서 우시는군요. 오빠는 잘 살 거예요. 우 소저가 잘해줄 테니까요.”
“네.”
역시 꿈보다 해몽이다. 주소은은 간신히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니 그토록 그리던 남궁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손도 잡아보지 못했다고 슬퍼했었는데 지금 상황은 가볍게 그 단계를 뛰어넘었다.
부끄러움에 주소은은 살짝 남궁천의 가슴을 밀었다.
“방금 유 소저랑…….”
“아! 유 소저가 십만대산에서 다쳤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간신히 거동할 수 있을 만큼 나아서 격려해줬어요. 고생 많이 했으니까요. 요즘 유 소저도 화산파의 중추로 부상해서 할 일이 많아졌어요. 무림맹과 협력해야 하고. 그래서 앞으로 잘해보자고 인사했죠.”업무 차 만남이었나보다. 주소은은 남궁천을 오해한 것 같아 더욱 부끄러웠다.
남궁천이 주소은의 양팔을 꽉 붙잡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오늘은 정신이 없으니까…… 내일이나 모레쯤 정식으로 매파를 보낼까 해요. 어떻게 생각해요? 너무 급한가요?”
주소은은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이게 말로만 듣던 청혼인가? 정말 무림의 영웅인 창천일룡 남궁천과 맺어지다니! 꿈이 이루어졌다!
주소은은 당장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대신에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한마디 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아버지께서 쉽게 승낙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래요? 흠, 어떻게 하면 아버님 마음을 확 돌릴 수 있으려나…… 제가 열심히 고민해볼게요. 주 소저는 기다리기만 해요. 제가 반드시 꽃가마 태워서 데려갈 테니까요.”남궁천의 장담에 주소은은 다리를 휘청했다. 너무 좋아서 기절하면 안 되는데……. 그래도 이렇게 부축해주니 얼마나 좋아…….
주소은은 남궁천의 품에 안겨 하늘을 바라봤다. 맑고 푸른 하늘이 그녀를 축하해주고 있었다.
***
뿌연 안개가 깔린 어두컴컴한 습지.
이 세계에는 움직이는 생명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기껏 야생초와 마른 고목 몇 그루가 전부인 황량한 지대였다.
바로 마교에서 무량뇌옥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한번 갇히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천혜의 감옥. 그곳에 지금 봉두난발의 두 괴인이 흐느적대고 있었다.
“뇌군! 이 자식아! 뭐 좀 알아냈나?”
전신을 칼자국으로 그림을 그린 듯한 괴인이 두 팔을 흐느적거리면서 물었다.
놀랍게도 괴인의 양팔은 살점이 파이고 피가 눌어붙어 축 늘어져 있었다. 사실상 팔과 손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 괴인의 맞은편에는 종이 몇 개를 들고 열심히 고심하는 괴인이 있었다. 바로 천마평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진 뇌군이다.
두 팔이 망가진 괴인은 무림에서 자하검존이라 불리던 자였다.
뇌군과 검존은 천마평에서 떨어졌으나 심후한 무공 때문에 죽음에 이르진 않았다. 하지만 절대 위로 올라갈 수 없었다.
지금 뇌군은 자하검존과 같이 떨어진 무한회귀공 비급 조각 몇 장을 들고 씨름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비급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찢어졌다.
간혹 온전한 부분도 몇 장 있긴 했으나 찢어진 조각은 비에 젖어 글씨가 지워졌거나 바람에 날려가 버렸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부근에 떨어진 모든 조각을 주워 짝 맞추기에 열중했다.
“그게 그렇게 금방 될 일이야? 내가 천재인 줄 알아?”
“천재라고 자부할 때는 언제고?”
“그거 다 옛날이야기야. 제갈휘가 죽고 나니 나도 한물갔더라고.”
뇌군은 과거의 영화를 되새기며 현재의 고난에 한숨을 쉬었다.
“또 주석하 그놈 생각이냐?”
“하아, 씨발! 그 자식은 왜 구하러 오지 않는 거야?”
“그 자식 지금 꿀 떨어지느라 네가 여기 있는 줄도 모를걸?”
생각할수록 처지가 암담했다. 아마도 주석하는 그가 비급을 훔치고 도망치다 이곳에 추락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가 여기 떨어진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유비연인데 그녀가 말해줄 리 없으니.
그렇다면 전혀 희망이 없는 건가…….
탐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천마의 금고를 털었던 행동이 실수였다. 차라리 조금 더 눈치를 볼걸.
예전에 주석하는 무량뇌옥에서 흑도팔군 여섯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도 자신은 이런 모습으로 고생하고 있었다는 건데……. 어떻게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마지막이 똑같이 귀결되는 걸까.
하늘이 내린 운명인가.
뇌군은 눈앞의 검존을 살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자신은 검존보다 상황이 낫다. 검존이 저런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마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어쨌든 무량뇌옥은 워낙 척박한 땅이기에 목숨을 연명하려면 서로 협력해야 한다. 더구나 자신은 무한회귀공 비급 복원을 빌미로 검존을 부려먹을 수 있다.
“하아, 검존! 배고프지 않나?”
“아침에 전갈 잡아 줬잖아?”
“넌 아침만 먹고 점심은 안 먹냐?”
“그, 그런가?”
“잘 먹어야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 법이다! 무한회귀공을 복원하려면 잘 먹어야지!”
뇌군은 손안의 비급 조각을 보란 듯 흔들었다.
한참 무한회귀공을 멍하니 쳐다보던 자하검존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먹을 것을 구하러 떠났다.
홀로 남은 뇌군은 손에 든 비급 조각을 귀찮은 듯 휙 집어던졌다.
“아니시타인인지 뭔지 이 자식 대체 뭐라는 거야?”
***
신방에 들어간 주석하는 침상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우설금을 발견했다.
그 자태가 실로 경이로웠다. 얼굴을 붉은 면사로 가린 천사 같은 여인이 우아한 자태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석하는 태어나서 이보다 더한 흥분과 기대감을 품은 기억이 없었다.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예전처럼 제어하지 못하는 내공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전신 혈맥이 팽창하고 단전에 잠재된 내력이 마구 용솟음쳤다.
어떻게 된 게 천마, 아니 이미 죽은 천마와 싸울 때보다 더 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기분이었다.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우설금의 면사포를 걷었다.
천상의 선녀 얼굴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신부로 단장한 그녀의 미모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지금까지 꾸밈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우설금이었기에 그 변신은 실로 놀라웠다.
‘예쁘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건 천상삼화를 찜 쪄 먹을 수준이네…….’
우설금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