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혼례 (3)
고오오오-
방 안을 울리는 기의 파동이 전해졌다.
주석하뿐만 아니라 우설금도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두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뿌리는 기운이 서로 뒤섞여 묘한 파문을 자아냈다.
‘침착해야지.’
첫날밤이란 원래 설레고 정신 못 차리는 날 아니던가. 특히 우설금 같은 미녀를 눈앞에 두고 제정신이라면 더 이상하다.
“설금…….”
주석하는 뜨거운 눈빛을 쏟아냈다.
그를 슬그머니 살피던 우설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우설금에게도 이런 면이?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이고도 무덤덤하던 그녀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부끄러워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우설금이 더욱 사랑스러워졌다.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우설금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찌릿찌릿한 자극을 전해왔다.
그리고…….
고오오오-
다시 기의 파문이 방안을 퍼져나갔다.
아무래도 오늘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큰일을 치를 것 같았다.
무림 최강의 내공을 품은 두 사람이 흥분해서 내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무슨 불상사가 발생할지 모를 일이다.
주석하는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진정시켰다.
보기 좋은 떡을 앞에 두고…… 아니지,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앞에 두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일이 절대 쉽지 않지만 어쨌든 흥분해서 단전 밖으로 튀어 오르는 내력을 간신히 갈무리했다.
“설금…….”
주석하는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녀의 옆에 바짝 다가가서 앉았다. 옆으로 그녀의 몸이 느껴졌다.
‘으흐흐, 이제 드디어…….’
생각해보면 그녀의 손을 만져보려고 몸을 만져보려고 무던히 노력했었다. 간신히 성공한 것이 비 오는 날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입맞춤했던 게 전부였다.
‘오오! 나도 드디어 역사를 쓰는구나!’
주석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우설금의 옷가지에 손을 가져갔다. 우설금은 고개를 숙인 채 그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 무섭기만 했던 그녀를 드디어 손에 넣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으로 주석하가 옷고름을 풀 때였다.
푸아악-
***
불이 꺼진 신방 밖에는 여인들이 모여 쑥덕거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천상삼화인 유비연, 백화령, 남궁서란과 꼽사리 낀 악홍아였다.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한 그녀들도 온종일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특별하게 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천상삼화는 무척 인기가 많아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는 데다 우설금을 향한 시샘과 자신들도 혼인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섞여 이래저래 보고 접할 것이 많았다.
어쨌든 그녀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다가 이제야 간식거리를 얻어 와서 신방 앞에 앉아 떠들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이 순간을 위해 잔칫상에서 빼돌린 백주가 놓였고, 안줏거리로 각종 전과 요리가 쫙 깔렸다.
“너무 부러워하지 마.”
“내가 왜 부러워해?”
“너, 주 공자에게 마음 있던 거 아니었어?”
“내가 언제? 난 순수하게 동료였을 뿐이라고.”
남궁서란의 핀잔에 유비연이 강하게 부인했다.
툭탁거리던 두 사람은 평소와 달리 침울한 표정으로 말수가 줄어든 백화령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제갈세가에서 주석하가 죽었다고 소문이 났을 때 누구보다 흥분하고 슬퍼했던 사람이 바로 백화령이었다.
만난 지 단 하루였기에 다른 사람들은 백화령의 감정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흑검문에서 그녀가 사제지간을 빌미로 매달리는 것을 보고 그 마음을 알아챘다.
옆에 우설금이라는 강력한 적이 있음에도 굴하지 않고 애정을 표현하던 백화령이었기에 지금 그녀의 심정이 어떨지 모두가 이해했다.
“청산에서 또 만났었다며? 그때 확 잡아버리지.”
유비연이 위로한답시고 과거의 일을 들먹였다.
따지고 보면 유비연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에게 그 기회는 항상 정파와 사파라는 해결할 수 없는 이념 문제와 함께 닥쳐서 눈을 돌릴 방법이 없었을 뿐.
그 문제를 잘 해결했다면, 어쩌면 주석하와 심정적으로 가장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난 이야기이기에 유비연은 본인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백화령을 위로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사부도 응원해 줬었는데…….”
백화령이 술잔을 기울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왜?”
“그날 방이 하나밖에 없었어…….”
“오히려 잘 된 것 아냐?”
“방에 두 사부가 같이 있었는데? 무슨 재주로…….”
여인들이 뜨악 하는 표정으로 백화령의 안타까움을 공감했다.
청산에서 화존마저 팔을 걷어붙이고 무공을 추가로 전수하겠다며 주석하를 붙잡았었다. 그 며칠 동안 어떻게든 친해질 계기를 만들어보라는 무언의 암시였었다.
백화령도 사부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그녀와 주석하를 이어주려는 마음을.
그래서 그때 그녀도 용기를 냈었다. 방이 두 개였다면 어떻게든 주석하와 같은 방을 쓰면서 역사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환경이 좋지 않았다.
고민하느라, 또 그가 한방에서 자고 있었기에 잠을 설쳤던 그녀는 새벽에 잠시 일어나 봉담소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게 마지막이 되었을 줄은…….
하필 그때 주석하가 잠을 깨고 밖으로 나왔고, 그녀가 어떻게 손을 써볼 틈도 없이 떠나갔다.
참으로 허망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주석하와 자신이 인연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너무나 사랑하는 다른 여인이 있었다.
그때 어떻게든 붙잡았더라면……. 그가 며칠 더 머물다 떠났더라면…….
백화령은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아련하게 쑤시는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물론 그녀는 전생에서 주석하가 며칠 더 머물렀음에도 그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백화령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술을 마셨다. 오늘은 취해서 쓰러지고 싶은 날이다.
천상삼화 옆에서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악홍아는 세 여인을 연신 살피면서 머리를 굴렸다.
그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들이 사랑에 목이 메어 한숨을 내쉬는 분위기는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한때 그녀는 자신이 조금 더 예뻤더라면 세상을 휘어잡았을 거라며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예뻐도 어쩔 수 없는 세상사도 있나 보다.
이 여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주석하를 떠올렸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주석하가 그녀에게 무척 잘 해주고 있었다. 특히 광천곡 재건과 관련된 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앞서서 해결해줬으니까.
처음에는 그것이 그녀에 대한 호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른다. 다만 그녀도 이제는 욕심을 버리고 그 도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주석하의 옆에 붙어 있는 우설금과는 도무지 경쟁하겠다는 용기가 없어서였다.
어쨌든 덕분에 악홍아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다.
예전이라면 감히 옆에 가지도 못했을 천상삼화와 이렇게 친분을 쌓고 있으니. 주석하의 등장으로 정파, 사파란 이념의 대립이 무의미해진 것도 원인의 하나였다.
그렇게 네 여인은 술잔을 기울이며 과거를 추억했다.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았고 신방은 평화로웠다.
“우 소저는 좋겠다…….”
악홍아는 부러운 표정으로 신방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도 부러워.”
다른 천상삼화도 신방에서 벌어질 열풍을 떠올리며 안면을 달구었다.
창문에 구멍을 뚫고 구경하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밝히는 여자라고 소문이 날 것 같아서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을 때였다.
푸아악-
무시무시한 강기가 소용돌이치는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일순간 신방 주변에 강력한 기의 흐름이 발생했다.
네 여인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적의 침입인가?
그 순간.
와장창!
창문이 박살 나며 한 인영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그 인영은 신방 앞 정원에 그대로 처박혔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네 여인이 다급하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들은 처참한 몰골의 주석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혼례복을 입은 주석하가 땅에 처박힌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특별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신방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야 할 신랑이 저러고 있으니 웃음이 터졌다.
“주 공자, 왜 그래요?”
놀란 백화령이 가장 빨리 주석하를 부축했다.
“아아, 괘, 괜찮아요. 끄윽!”
일어서려다 주석하는 다시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초강 고수인 우설금의 기습을 받았으니 그나마 이 정도인 것이 다행이었다.
“어, 어떻게 된?”
“괘, 괜찮아요. 단지 약간의…… 신호가 안 맞아서…… 절대 불화 이런 건 아니고…….”
흐느적거리면서 다급하게 변명하는 주석하를 안쓰럽게 바라보면서 백화령이 눈썹을 확 일그러트릴 때였다.
창문이 홱 열리고 신방에서 우설금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의 안면에도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사, 상공! 미, 미안해요!”
정신없이 소리치던 우설금의 눈이 주석하를 부축하는 백화령에게 멎었다. 순간 우설금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
“너! 내 꺼에서 손 떼!”
일순간 천상삼화와 악홍아는 석상이 됐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화가 난 우설금은 너무 무서웠다.
“……아, 아냐. 내가 바로 갈게.”
심상찮은 분위기를 바로 인지한 주석하가 서둘러 백화령을 떼어내고 휘적거리며 신방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네 여인은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윽고 남궁서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 공자가 너무 불쌍한 것 같아…….”
***
다음날, 오전에 노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마친 주석하와 우설금은 후원에서 차를 마시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젯밤의 소동 때문인지 그들 주위로 접근하는 여인들은 없었다.
주석하는 천상삼화의 반응이 궁금했으나 물어볼 처지가 아니어서 차만 홀짝거렸다.
차를 마시는 우설금의 자태는 우아했다. 저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설금, 차 맛이 괜찮죠?”
“네. 십만대산에서는 마신 적이 없어요.”
두 사람이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인물과 낯선 인물이 등장했다.
“형님, 이리로 앉으시죠.”
주석하는 남궁천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은 우설금 옆에 앉았다.
남궁천과 함께 온 사람은 머리를 박박 깎은 스님이었다. 스님의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었으나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스님의 나이는 대략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남궁천과 스님이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졸지에 작은 원탁 앞에 네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앉은 꼴이 됐다.
“잠자리는 편안했고?”
“그럭저럭요.”
짓궂은 질문을 던지던 남궁천이 잠시 후 용건을 꺼냈다.
“이 분이 누구인지 알아?”
주석하의 시선이 스님을 향했다.
“모르겠습니다.”
스님이 일어나서 합장한 후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 소승은 원숙이라 합니다.”
원숙? 당연히 주석하는 기억하지 못했다.
원숙이 대신해서 과거의 인연을 설명했다. 주석하와 우설금이 소림에 쳐들어갔을 때 주석하가 불망헌을 찾아 헤매다가 법당 부근에서 만났던 두 스님 중 한 사람이었다.
그때 스님의 법명을 들었었는데 다급한 상황이라 기억에 남지 않았다.
“아!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주석하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물론 지금 다시 그런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그의 행동은 변함없겠지만 어쨌든 상대를 공격했으니 사과는 당연했다.
“아미타불, 아닙니다. 불존 스승님의 유지를 나중에 발견했습니다. 그분은 두 분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주석하는 고마웠다.
이제 제대로 기억났다. 원숙은 소림 방장이었던 구천신승의 제자다. 소림의 미래라고 알려진 유망주다.
그런 대단한 스님이 그의 혼례식에 하객으로 찾아왔고 이 아침에 그를 만나러 왔다.
이유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