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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73화 (273/273)

273화 혼례 (4)

원숙은 자신을 주시하는 주석하와 우설금의 시선을 담담하게 이겨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불존 스승님의 과거를 알게 되었습니다. 소림 내에서도 극소수 분들만 아시던 건데 마침 저에게 인연이 닿았습니다.”

주석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반야불존에 대해서는 그도 아는 바가 있다.

불존이 젊었던 시절부터 중원 무림 최고 고수로 성장하고 정파십존이 되어 무림을 호령하던 최근까지.

그런데 원숙이 이 말을 꺼낸 것은 분명히 그와 관련 있는 내용일 것이다. 어쩌면 우설금도?

대충 짐작되는 바가 있어 주석하는 원숙에게 귀를 기울였다.

“불존 스승님께서 탄허라는 법명으로 중원에서 활동하실 때 세 명의 가까운 친구를 사귀셨습니다.”

“아! 구주사은!”

주석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거의 오십여 년 전, 중원 무림을 활보했던 네 청년의 이야기다. 그때 그들은 사마를 멸하겠다는 사명을 품고 강호를 종횡했다.

제왕검 남궁비, 흑풍검신 주선풍, 극마서생 우청엽, 반야불존 탄허. 이 네 사람의 뜨거운 강호 사랑 행보다.

“아아!”

우설금이 나직한 탄식을 발했다. 예전에 주석하에게 들었던 이야기이지만 타인이 우청엽을 언급하는 자리는 처음이었다.

우청엽이라는 이름은 아직 낯설지만, 그 이름은 그녀의 뿌리이고, 그의 내력이 그녀의 몸 깊은 곳에서 숨 쉬고 있었다. 게다가 천마의 서재에서 우청엽의 비급마저 얻었으니 남다른 감정이 뭉클 일었다.

놀랍게도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면면이 구주사은과 인연이 깊었다.

주석하와 남궁천은 주선풍과 남궁비의 직계 손자였고, 우설금도 우청엽의 손녀였다. 원숙은 비록 구천신승의 진전을 이었지만 생전의 반야불존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소림 후기지수 중에서 반야불존과 가장 큰 인연을 맺은 사람이었으니까.

선대의 인연을 오십 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 다시 되풀이하게 되니 놀라웠다.

이번에는 남궁천이 말을 이어받았다.

“그래서 내가 좋은 것을 생각해냈어. 우리 네 사람이 뭉쳐서 신 구주사은을 만들어보는 게 어때?”

구주사은(九州四恩). 구주, 즉 강호를 누비는 은혜로운 네 사람. 정파와 사파를 넘어 협의를 행할 그들은 과거 오십 년 전, 선대의 유지를 되살릴 최고의 적임자였다.

주석하는 백화루주의 여유로운 생활을 잠시 떠올렸으나, 조부인 주선풍의 유지를 잇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 힘든 일도 아니었다. 그도 그이지만 천마인 우설금이 뜨면 나쁜 놈들은 모두 꼬리 말고 도망칠 테니까. 지금 강호에서 그와 우설금에 대항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설사 만만하게 깝죽대는 자가 있어도 상관없다.

무한회귀공으로 시간을 되돌려 제대로 쓴맛을 보여주면 되니까. 아! 이건 좀 아닌가? 그러면 역천을 노리던 천마와 다름없어지나?

남궁천과 원숙의 제안에 우설금은 대찬성이었다. 마교라는 어쩔 수 없는 원죄를 고민하던 차에 그나마 부담을 덜 방법이 생겼기 때문이다.

주석하는 우설금을 따라가야 하니까 불쌍하게도 선택권이…… 없다.

“그렇게 해요. 저도 한 번쯤 강호를 위해 좋은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무슨 말이야? 지금까지 소제가 강호에 헌신한 일만 해도 엄청 많아.”

남궁천이 주석하를 치켜세웠다.

의기투합한 네 사람이 시끌벅적 떠들고 있을 때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정원을 가로질러 그들에게 다가왔다.

“잠시 제가 시간 좀 뺐겠습니다.”

말을 건 사람은 꾀죄죄한 넝마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보는 순간 신분을 바로 알았다. 최근에 무림맹주 남궁후를 열심히 지지하고 있다는 개방 방주 칠절신개였다.

“하아, 쉴 틈이 없구나.”

주석하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토해냈다.

유명해진 것은 좋은데 옆에 걸리적 거리는 일이 너무 많아졌다. 이래서야 백화루주로 은거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또 뭡니까?”

다소 까칠해진 주석하의 반문에 칠절신개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어제 무림맹과 흑련의 회담이 있었습니다. 하객으로 만난 김에 얼떨결에 열린 것이긴 한데 그 자리에서 강호 무림의 앞날을 심도 있게 논의했습니다.”

“그런데요?”

“그 자리에서 현 무림의 천하제일인인 두 사람을 어떻게 할지 논의가 있었습니다.”

천하제일인이 누군지 주석하는 금방 알아챘다.

‘어쩌긴 뭘 어째?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데.’

주석하의 눈치를 보면서 칠절신개가 계속 말을 이었다.

“우 소저, 아니 주 부인께선 마교의 교주인 천마라는 직함을 갖고 계시니 아무 문제 없는데…… 주 공자께선 아직 흑검문 소문주일 뿐이라서…….”

“그게 어때서요?”

“원래 강호에서는 별호가 반쯤 씹어 먹고, 직책이 일의 절반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 흑도의 거마가 무시무시한 별호를 짓는 이유가 그런 때문이었나? 주석하는 새로운 해석에 눈을 껌벅였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긴 한데…….

“에이, 귀찮은데…….”

“그래도 직함을 갖고 있으면 좋은 일이 많습니다.”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주석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금도 내가 천마의 부군이라고 밝히면 모두가 끔뻑 죽어요.”

천마란 이름은 마교에서는 당연하고 중원의 정파나 사파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우설금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칠절신개가 급하게 손을 저었다.

“물론 압니다. 그래도 많을수록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제 창궁무존, 화존, 혼군, 암군, 악군께서 모여 머리를 맞대셨습니다. 주 공자께 적합한 직책이 뭘까 고민하시다가 결국 뜻을 모으셨습니다.”생각해보니 그동안 신세 졌던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에게 아직 제대로 인사조차 못 했다. 오늘 중으로 빨리 인사해야겠다.

“그래서요?”

“주 공자께 강호총사라는 직함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강호총사?”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직책이었다.

칠절신개가 신이 나서 열심히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강호총사(江湖總使)란 정파와 사파를 넘나드는 권력을 가진 새로운 직책이었다.

무림맹주와 흑련주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그 명을 따라야 했다. 게다가 무림맹주와 흑련주의 부하가 아니기에 명령을 따를 의무는 없다.

강호인을 죽이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 살인면책특권을 부여하며 필요시에는 무림맹과 흑련의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지금까지 무림사에서 정파와 사파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직위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어떠십니까?”

“흐음, 구미가 당기긴 하지만…….”

주석하는 금방 의도를 눈치챘다. 그가 우설금과 혼인하면서 자칫 마교로 기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다.

물론 그에게 우호적인, 또 그를 잘 아는 십존과 팔군은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이를 빌미로 적당한 감투를 씌울 절호의 기회임을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런 여러 측면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무림맹과 흑련의 동의를 끌어낸 것이다.

“에이, 아무래도 귀찮을 것 같은데…….”

“귀찮을 것 없습니다. 귀찮은 일은 아랫사람을 불러서 시키면 되지요. 무림맹주 빼고는 아무나 부려먹어도 됩니다.”

“천상삼화 불러도 돼요?”

“당연하죠. 천상삼화를 불러서…… 음, 공문서 정리…… 아, 이건 아니고 하여튼 음주가무를 시킬 수도 있고…….”

푸아악-

“커윽!”

칠절신개는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강기의 태풍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정원 저쪽의 그루터기에 처박혔다.

허리를 짚으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그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욱신거리는 아픔을 간신히 진정시키면서 그는 자신이 들었던 정보를 되새겼다.

흑검서생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는 백화루주이고 백화루는 기녀 백 명이 수발을 드는 주점이라 했으니 그렇다면 흑검서생의 취향이 어떨지는 뻔한 것 아닌가.

강호 경험이 몇 년인데…… 그동안 영웅치고 호색 아닌 자를 본 적이 없으니 흑검서생의 취향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씨발! 그래도 난 개방 방준데…….’

간신히 몸을 일으킨 칠절신개가 다시 매달리려는 찰나 주석하가 손을 휙휙 저었다.

“알았어요. 고민해볼게요.”

“그, 그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으로 알고 물러가겠습니다.”

칠절신개가 부리나케 사라졌다.

주석하는 우설금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우설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눈치를 보던 남궁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소제, 나도 가보겠네. 앞으로 구주사은의 명예를 걸고 의기투합해보자고.”

“아미타불, 소승도 기쁜 마음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원숙이 합장하며 불호를 외우다가 사라졌다.

둘만 남게 되자 주석하는 은근하게 우설금의 손을 잡았다.

“자, 우리는 이가장을 둘러볼까요?”

“이가장요?”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구경 못 했잖아요?”

주석하의 제안이 마음에 든 우설금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이토록 수줍은 새색시를 누가 천마라고 생각할까.

‘흐흐, 그런 천마를 어젯밤에 깔아 눕힌 나도 대단한 사람이지, 클클.’

주석하는 흐뭇한 웃음을 머금고 이가장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정문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이것들이! 내가 누군 줄 알아?”

“초청장 없으면 못 들어오십니다!”

“뭔 소리야? 당장 그 자식 나오라고 해!”

어째 익숙한 목소리인데 누구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우설금도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안색이 변했다.

“하여튼 안됩니다. 안면 있다고 사칭하고 공짜 밥 얻어먹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요.”

“공짜 밥이라니! 우리가 거진 줄 알아?”

“옷차림 보니 거지랑 별반 차이 없는데요?”

“이것들이! 너 오늘 죽어볼래? 소싯적에 주 소협이 내 밑에서 용병으로 막 굴렀다고. 우 소저? 그 우 소저도 마찬가지야! 나만 보면 설설 기었지. 불러와 봐! 내가 오늘 본때 보여준다!”황당한 이야기가 들리자 주석하는 우설금을 이끌고 부랴부랴 정문으로 다가갔다.

눈에 익은 두 사람이 보였다.

“어? 여기 웬일이세요?”

놀랍게도 두 여인은 북해빙궁의 궁주인 구양상과 친위대장인 엄소교였다.

그런데 두 여인의 몰골이…… 빙궁에 있을 때는 번쩍거리는 귀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상거지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전신에서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모습이 다가오던 남자도 도망갈 정도였다.

주석하를 발견한 엄소교가 반쯤 울음을 터트리며 매달렸다.

“으허헝! 드디어 찾았어! 드디어 오고야 말았어!”

“아니, 왜 그래요?”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중원 구경 한번 해보자고 길을 떠났다가……. 밥도 굶고 잘 곳도 없고…….”

“아니? 여비는 어떻게 하고요? 가진 보석 하나만 팔아도 편하게 오셨을 텐데?”

훌쩍거리며 엄소교가 하소연을 거듭했다.

“그게…… 강호행이 처음이라 당최 아는 게 있어야지, 중원에 들어서자마자 가진 돈 다 털리고…….”

“간도 크지, 감히 누가 빙궁 궁주의 돈을 뺐어요?”

“좀도둑놈들이…… 돈을 훔쳐갈 줄 내가 어떻게 알아? 돈이 없으니 빙궁 궁주라고 해도 아무도 안 믿더라고, 그래서 밥 얻어먹으려고 온갖 허드렛일은 다하며 오다 보니…….”주석하는 두 사람의 옷차림을 다시 훑었다. 고생한 티가 역력했다. 갑자기 예전에 그가 도수와 덕양을 벗어났다가 돈이 없어서 엄청 고생했던 일이 떠올랐다. 중원행이 처음이면 그럴 만도 하다.

그는 한숨을 쉬고 있는 구양상에게 인사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축하드려요.”

구양상은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엄소교가 다시 주석하의 품에 매달리며 너스레를 늘어놓았다.

“하여간에 책임져! 너 때문에 궁주님께서 고생하셨으니까. 몸으로 때우면 더 좋고. 우리 궁주님의 미모와 지위라면 충분히 자격이…….”

푸아악-

갑자기 강기의 태풍이 휘몰아치며 엄소교는 정원의 저쪽 덤불에 처박혔다.

우설금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감지한 주석하는 찔끔 몸을 움츠렸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무사하기 어려울 듯하다.

(끝.)

*** 지금까지 애독해 주신 독자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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