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하북진가라면 팽가와도 견주는 곳인데, 존대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니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아, 유강은 저희 집을 아시나요?”
“점소이로 일하고 있으면 듣기 싫어도 듣는 것이 팔대세가의 일입니다.”
진소소는 그 말에 기분 좋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눈빛이 씁쓸한 것이 신유강은 왠지 모르게 하북진가에 대한 것을 입에 담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진소소의 눈빛이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저는 세가에서 도망쳐 나왔어요. 그래서 이제는 그곳과는 관계가 없답니다.”
“…….”
신유강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진소소는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저희 어머님은 본처이신데,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하셨어요. 그러다 제가 태어났는데, 이미 둘째 어머니께서 아들 둘을 낳으신 뒤였죠.”
진소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신유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는 괴로움이 가득하였기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으나 진소소의 입은 쉼 없이 움직였다.
“어머니는 저를 낳고 돌아가셨고, 저는 버려지다시피 컸어요. 매일같이 오라버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 집을 뛰쳐나왔죠. 그러다 만난 게 할아버지예요.”
“그렇군요.”
“그러니 유강도 아가씨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소소라고 불러요.”
그녀가 맑은 눈으로 직시를 하며 말하자, 신유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신유강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진소소가 웃음을 머금었다.
그 모습을 본 신유강이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흠, 먹을 것이 있나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아.”
괜스레 부끄러웠기에 진소소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신유강은 폐가를 벗어났다.
뒤에서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들렸으나, 벌게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머지않은 곳에 사천당문의 담장이 보였고, 주위에는 한때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폐건물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신유강은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이것 참…….”
천연고아로 자라 가족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진소소의 말을 들으니, 가족이라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머리를 벅벅 긁적인 신유강은 걸음을 옮겼다.
이 근처 땅은 사천당가의 인물이 아니라면 밟을 수 없는 곳이니, 미산검문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가의 사람들도 오지 않으니…….’
“야!”
안심을 하며 걷고 있던 신유강은 돌연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어디선가 한 번 들어 본 적 있는 익숙한 미성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신유강의 몸엔 소름이 돋았다.
아마 이 목소리를 들었던 당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신유강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붉은 경장 차림의 어린 소녀가 앙칼지게 눈을 뜨고 신유강을 바라보며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신유강은 소녀가 누군지 잘 알았다.
아니, 이 사천 땅에서 소녀를 모르는 이가 있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사천당문의 천방지축으로 불리며, 웬만한 성인 남자들 또한 고개를 숙이고 비켜 간다는 당문의 직계이자, 당 가주의 금지옥엽(金枝玉葉) 당소혜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신유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당소혜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인상을 쓰며 가만히 신유강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그…… 것이.”
“똑바로 말 안 할래?”
어찌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곳은 엄연히 당가의 땅이고, 신유강은 외부인이니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아무런 배경이 없는 신유강은 허락 없이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자칫 목이 잘릴 수도 있는 곳인 것이다.
신유강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당소혜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분명히 천운객잔의 점소이었지?”
“마, 맞습니다, 아가씨. 으, 음식을 배달하러 왔다가 돌아가려는 참입니다.”
그 말에 당소혜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작고 여린 손을 들어 올려 신유강의 머리를 툭툭 치더니, 기가 찬 말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집 정문은 저쪽이야. 그런데 넌 이쪽에서 왔어. 더욱이 음식 따위 들고 있지도 않잖아.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기, 길을 잃어서…….”
“지난번에 배달을 하러 왔을 때에는 잘 찾아왔잖아.”
“…….”
‘기억력도 좋은 계집애.’
신유강은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은 당소혜를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천방지축 날뛰며 공부는 뒷전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명문가의 자식답게 머리는 좋은 모양이다.
신유강은 속으로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그만 깜빡했습니다.”
“이게 나를 바보로 알아?! 어디서 온 거지? 저 집이야?”
당소혜는 거침없이 진소소가 있는 폐가를 향해 가려 했다.
그 순간, 당황한 신유강이 당소혜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디 감히 더러운 손을 올려!”
당소혜는 어깨에 닿은 신유강의 손을 쳐 내며 그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뻗었다.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명문세가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만큼, 그 내력은 소녀의 손에서 뻗어졌다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신유강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손을 움직였다.
그것은 아주 지극히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탁!
당소혜의 일장과 신유강의 손이 부딪혔다.
온갖 영약을 먹으면서 무공을 익힌 당소혜는 우습지도 않은 신유강의 수법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신유강의 손에 부딪힘과 동시에 뿜어져 나간 그녀의 내력이 다시 그녀에게로 역류했으며, 손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소혜는 주춤 물러서며 신음을 흘렸다.
“윽!”
자신이 쏘아 낸 내력이 다시금 돌아오며 충격을 주자, 당소혜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신유강을 쏘아봤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소혜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더욱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주먹을 뻗었다. 단순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천당가의 권각술이 담겨 있는 움직임인지라, 왕윤의 것과는 비교도 불가능한 몸놀림이었다.
퍽!
“큭!”
신유강은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물러섰다.
그 순간 한걸음 앞으로 다가선 당소혜가 각을 뻗어 머리를 가격했고, 그가 또다시 격한 신음을 터트리자 이번엔 복부를 걷어찼다.
퍽!
“커억!”
“감히 내게 손을 대?”
신유강의 몸이 새우처럼 꺾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발을 뻗자, 당소혜의 말이 신유강의 안면을 가격했다.
퍽!
둔탁한 울림과 동시에 신유강의 몸이 크게 휘청였고, 입에서 터진 피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그러나 당소혜는 손을 멈추지 않았고, 신유강 또한 쓰러지지 않았다.
당소혜의 쌍장에 머문 것은 그녀가 가진 반 갑자의 내공 전부였다.
그 힘으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신유강을 공격한다면, 틀림없이 죽어 나갈 것이다.
그러나 당소혜는 망설임 없이 신유강의 머리를 향해 그것을 뻗었다.
그 순간 신유강 또한 손을 뻗었다. 살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그의 의지에 반응했는지 단전에서 기묘한 기운이 솟구치더니 기맥을 따라 그의 손으로 움직였고, 동시에 당소혜의 쌍장과 신유강의 주먹이 부딪혔다.
퍽!
“꺄아악!”
둔탁한 소리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간 것은 다름 아닌 당소혜였다.
그녀는 신유강의 손에 부딪힘과 동시에 또다시 자신의 내력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내력은 주인인 당소혜의 몸에 한 차례 충격을 주었고, 결국 신유강의 손에 가슴을 가격당했다.
무림인이 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일격이었으나, 되돌아오는 내력을 수습하지 못한 당소혜에겐 일류 고수의 일장과도 같은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쿵!
당소혜의 몸이 일 장 이상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쿨럭!”
입에선 거칠게 피를 토하며 쓰러진 당소혜는 정신을 잃은 듯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신유강은 당황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 장면을 당가의 사람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틀림없이 목이 떨어질 것이다.
더욱이 상대는 당가의 직계혈족이며, 가주가 죽고 못 산다는 금지옥엽이 아니던가?
신유강은 너무도 급작스런 일에 어떻게 자신이 당소혜를 이길 수 있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당소혜를 업어 들고 후다닥 진소소가 있는 폐가를 향해 뛰었다.
기이한 것은 당소혜의 내력이 실린 공격을 그렇게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유강의 몸은 여전히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신유강은 폐가의 문을 벌컥 하고 열어젖혔다.
그러자 곤히 잠을 자고 있었던 진소소가 눈을 떴다.
“유, 유강? 이게 대체……?”
“아가씨, 어서 나가야 합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그…… 그게, 이 아가씨는 사천당가 가주님의 따님이신데, 저를 발견하고, 때리시다가 저랑 손이 부딪치니까 갑자기…….”
진소소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는 그가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진소소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신유강의 손을 부여잡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자, 일단 진정하고 심호흡부터 해요. 어서.”
“후…… 웁! 하아…….”
신유강이 천천히 심호흡을 시작하자 진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시선을 돌려 입가에 피를 흘린 채 정신을 잃고 있는 당소혜를 바라본 그녀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조심스레 당소혜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것은 기연고서점의 주인이었던 그녀의 할아버지가 만들어 두었던 영단으로, 중원 전역을 뒤져도 채 다섯 알뿐이 존재하지 않는 선기단이라는 것이었다.
소림의 대환단보다 대단한 영약이었기에 그녀가 이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한바탕 피 바람이 불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 선기단이 진소소의 품에서 나온 손바닥만 한 옥병에 무수히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소저는 이제 괜찮을 거예요. 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세요.”
신유강은 고작 약 하나 먹이고 괜찮을 거라 말을 하니, 의아함이 들기는 했으나, 원체 기연고서점이라는 기이한 곳에서 선인이라 생각되는 노인과 함께 지내던 진소소였으니, 알아서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유강은 당소혜와 만났을 때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설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