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어느새 신유강의 등에서 내려온 진소소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서점 안에서만 살다가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왔으니, 마치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신유강은 그것을 보며 조용히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이놈!”
그때, 손금운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둠 속에서 기다리다 신유강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부리나케 뛰어온 듯, 얼마 되지도 않은 거리임에도 손금운의 전신은 땀에 젖어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살에서 흐르는 육즙은 가히 보기만 해도 역겨울 지경이었다.
진소소가 그 모습에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어르신?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신유강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며 물었다.
객잔을 빠져나간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 이 자식! 네놈이 사라지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 줄 아느냐?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일도 나오지 않고 지금 들어오는 것이야!”
손금운의 두툼한 볼살을 심하게 떨었다.
상당히 화가 나 있는지 얼굴마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막 잡아 구운 통돼지와 닮아 보였다.
신유강은 태평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파서 말입니다. 중 의원님 댁에 좀 누워 있었습니다.”
“아…… 아프다고? 네놈이?”
“저도 인간인데 아플 때도 있지요.”
그렇게 말을 했지만, 어디를 봐도 신유강은 전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말하는 본새가 사람을 약 올리는 듯하니, 손금운은 뒤로 자빠질 지경이었다.
“유강! 어서 아버지한테 죄송하다고 해.”
호통 소리를 듣고 어느새 다가온 손약란이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조금 전부터 신유강과 함께 온 진소소가 신경 쓰였으나, 차마 물을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그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진짜 아파서 누워 있었는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 그건…….”
“어르신, 정 못 미더우시면 중 할아버님께 물어보십시오.”
손금운은 살을 부들부들 떨었다.
천운객잔이 사천에서 삼 대째 내려오는 객잔이며, 인근에 있는 이들과 친분이 있으나, 그 사람들 대부분이 신유강을 무척이나 좋게 본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설령 신유강의 말이 거짓이어도 중 의원은 사실이라고 대답을 할 테니, 그야말로 완전 범죄이지 않은가?
신유강이 입꼬리를 쓱 말아 올렸다.
“내일은 잘 나갈 테니 들어가 주무셔요. 아 그리고 봉급날이지요? 내일이?”
“그, 그렇군.”
“저번 달에는 세 냥을 받았는데, 이번 달에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 네 냥을 주셔야 해요. 밀린 것까지 합해서 일곱 냥을 주시면 되겠네요.”
“크큼!”
갑자기 손금운은 말이 없었다.
그는 오늘 왕윤에게 은자 열 냥을 받았고, 그것은 신유강의 몸값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유강을 장 씨네 대장간으로 보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고, 내일 있을 봉급 또한 주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신유강이 사라진 탓에 씩씩거리는 왕윤이 찾아와 돈을 도로 가져갔고, 내일은 은자 일곱 냥이 날아갈 판국이니 속이 다 쓰렸던 것이다.
손금운은 뭔가 트집 잡을 것이 없나 생각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문득 진소소가 보이자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옆에 있는 아이는 누구냐?”
“어려서부터 친분이 있던 아가씨인데, 사천에 놀러 오신 것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 네 나이가 몇인데 어렸을 적 타령이냐?”
“그러니까 사천으로 오기 전에 하남에서 알던 분입니다.”
사천에 오기 전에 하남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손금운은 콧방귀를 뀌었다. 또한 신유강이 거지 소굴에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진소소 또한 그런 쪽 사람이라 판단을 했다.
‘한데 저 비단옷은 뭐란 말인가?’
손금운은 잠시 의심이 들었으나 어쨌든 봉급으로 내줄 은자를 줄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큼! 객이라고는 하나 우리 집 방을 쓰니, 하루 은자 한 냥이다. 그리고 농땡이를 피워 이 몸을 힘들게 했으니 그것도 제하여, 봉급은 두 냥을 주도록 하마.”
손금운의 말도 안 되는 계산법에 진소소가 욱 하여 뭐라 말을 하려 했는데, 그것을 가로막은 신유강은 씩 웃음을 지을 뿐이다.
은자 두 냥이든 세 냥이든, 어차피 이틀 뒤면 다시 돌아간다.
받아 봐야 쓸모도 없는 것이니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손금운은 순순히 따르겠다는 신유강의 말에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어리지만 돈 귀신이라 불릴 만큼 돈을 악착같이 모으는 놈인데, 봉급을 다섯 냥이나 줄였는데도 개의치 않는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이놈이 미쳤나?’
그러나 손금운에게 있어서는 나쁜 일이 아니다.
또한 기세를 잡았으니 몰고 갈 일이다.
“네가 잘못을 알았다고 하니, 석 달 간 봉급을 은자 두 냥으로 줄이겠다. 그런 줄 알아라.”
“알겠습니다. 제 잘못이니 어쩔 수 없지요.”
신유강은 대수롭지 않게 귀를 파며 말했다.
그것은 상당히 예의 어긋난 행동이었으나 손금운은 입이 찢어질 정도로 좋았다.
말이 두 냥이지 이것저것 트집을 잡으면 한 달에 한 냥이면 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회귀를 하여 상황을 바꾸면 그만인 신유강은 그가 뭘 하든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그럼 저는 들어갑니다. 어르신도 쉬십시오.”
“자, 잠깐, 설마 둘이 같은 방에서 자려고?”
손금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릴 때, 손약란이 기겁을 하며 물었다.
말하는 본새가 마치 둘이서 한 방에 머물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유강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약란을 바라봤다.
“네가 객방 비용을 지불해 준다면 다른 방에서 머물도록 하지.”
“그, 그거야…….”
“무리지? 그럼 난 들어간다. 애들은 어서 가서 자라.”
“유, 유강아!”
* * *
진소소는 당황했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아이는 일곱 살이 지나면, 남아와 여아를 함께 자리에 앉거나 함께 음식을 먹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신유강은 그러한 것을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진소소와 처음 만났을 당시, 유강과 한 방을 써야 한다고 우긴 것은 신유강이 아닌 진소소였고, 그날을 기점으로 수차례 회귀할 동안, 한 방에서 잠을 잔 횟수만 따져도 만 일이 넘으니 신유강에겐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을 해 보자면, 애초에 신유강에게 업혀 있었던 것 자체도 이상한 일이다.
하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진소소는 여전히 당황스러울 뿐이다.
“저기 유강?”
“왜 그러나요?”
“하, 한방은 좀…….”
신유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얼굴은 딱히 신경을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제가 바닥에서 잘 테니 소소는 침상을 쓰면 됩니다.”
“네…….”
약간 어이없어 하며 대답을 한 진소소는, 허름한 침상을 한 차례 바라보다,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베개 속에 집어넣었다.
신유강은 저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단검.
무슨 짓을 저지를 심산이면 저걸 휘두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무섭다니까.’
진소소의 성격은 약간 태평하면서도 똑 부러지고, 머릿속에 든 것이 많아 하는 행동이 소녀 같지 않았다.
또한 무언가 행하려 한다면 결코 망설임이 없고, 자신에게 위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일말에 망설임 없이 배제하려 했다.
그것은 한때 당소혜의 경우를 생각해 보며 알았다.
신유강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다만 진소소만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벌컥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와 더불어 누군가가 쿵쿵 거칠게 발을 놀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신유강은 실눈을 뜨며 그것을 바라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손약란이 바닥에서 자고 있는 신유강과 침상에서 퀭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소소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손약란은 둘이 한 침상에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하는 거야? 날이 밝았으니 일어나야지! 객잔 청소는 내가 도와줄게.”
“됐다.”
“이씨, 자꾸 그렇게 말할래? 내가 너보다 누나거든?”
손약란은 당차게 말했다.
양손을 허리에 두르고 한껏 얼굴을 치켜들며, 마치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행동이다.
신유강은 오늘 따라 손약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서 기지개를 펴며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중 할아버지 댁에나 가 봐라.”
“거길 내가 왜 가?”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모르는 손약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신유강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에 이상이 있을 때 놓는 침 좀 놔 달라 해. 기왕이면 약도 좀 먹고.”
“우씨…… 너!”
“일해야 하니 먼저 나간다.”
“유강, 저도 도울게요.”
진소소와 신유강이 마치 연인처럼 나란히 방을 빠져나가자, 손약란은 더욱 분을 참을 수가 없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씩씩거렸다.
“아이 씨!”
손약란은 벌써 사라지고 없는 진소소의 등을 떠올렸다.
‘이걸 뭐라 하더라……? 주, 주…… 주객…… 뭐?’
손약란은 잔뜩 인상을 썼다.
“풉!”
밖으로 나온 진소소는 그만 웃고 말았다.
손약란의 행동이 너무 우스웠던 탓이다.
뿔이 난 표정과 신유강의 독설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니, 귀여운 여동생 같았다. 왠지 손약란이 마음에 든 진소소였다.
“유강은 정말 이상해요. 저리 귀여운 아가씨가 따라다니는데 눈길도 안 주고.”
신유강은 천천히 마당을 쓸며 도와준답시고 따라와 놓고, 객잔 정문 문턱에 주저앉아 구경만 하고 있는 진소소를 바라봤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그 모습을 만약 동년배 남아들이 봤다면 황홀해 했을 것이다.
“제가 저 아이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십니까?”
신유강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옛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당장 이 회귀가 끝나면 객잔을 박차고 나가 두 번 다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이들이 바로 손 씨네라고 확언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신유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고울 리가 없었다.
진소소는 한참을 웃다가 시선을 돌렸다.
객잔 한구석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이쪽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손약란이 보였다.
“유강, 관심을 좀 가져 줘 봐요. 불쌍하잖아요.”
쿡쿡 웃으며 말을 했지만, 신유강은 대답이 없었다.
관심이고 나발이고 얼굴만 마주하면 좋은 말이 튀어나오지 않으니, 그저 안 보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고 여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