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아, 정말 재미있게 사네요. 저도 유강처럼 한 번 살아보고 싶어요.”
신유강은 미간을 들썩였다.
만약 모든 사정을 알고도 저런 말이 튀어나올 수 있는지 궁금증이 들었으나, 이내 꾹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삼키며 묵묵히 마당을 쓰는 것에만 집중을 했다.
어차피 곧 모든 것을 잊는 여자다.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고, 이야기를 해도 회귀할 테니 소용도 없다.
한숨만 나온다.
“야 이 개새끼야!”
그때, 이른 아침부터 쌍욕을 하며 저 만치에서 일련의 무리들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이미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신유강은 살짝 삐딱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대략 열 명.
나이는 십사 세에서 십육 세가량으로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체구가 단단해 보이는 놈은 미산검문의 후예이자, 신유강과 지긋지긋한 악연으로 묶여 있는 기왕윤이었다.
그는 시퍼런 눈빛으로 신유강을 쏘아보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이…… 이…… 망할 자식이! 지난번 일은 잊지 않았겠지?”
“지난번?”
“그래, 이 자식아!”
신유강은 가만히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 일이 있었던가?”
“이 미친 새끼가!”
어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기왕윤은 꽤 입이 거칠었고, 참을성이 없었으며, 또래 아이들 중 자신이 최고라 착각을 하고 있는 놈이었다.
그는 바득바득 이를 갈며 소리쳤다.
“네놈이 나와 싸웠던 거 말이다!”
“싸워? 너랑 내가?”
“그래!”
신유강은 한 차례 신음을 삼켰다.
“네가 줘 터진 거지. 그걸 싸웠다고 하나?”
순간 왕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앉아 있던 진소소가 키득키득 웃음을 지었다. 또 왕윤을 이겼다는 소리에 구석에서 몰래 엿보고 있었던 손약란이 크게 입을 벌리며 놀라워했다.
“네, 네놈이 쫄랑쫄랑 도망만 다니니까…….”
“어쨌든 맞았잖아.”
“그…… 그거야…….”
왕윤은 할 말을 잊지 못하며 입을 벌렸다.
예전이도 저놈의 입은 매서웠지만, 어째 지금은 더 매서워진 것 같았다.
그러다 눈알을 굴려 객잔 정문에 앉아 있는 진소소를 발견했다.
그 순간 눈이 뒤집히며 왕윤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해졌다.
이 사천에서 또래 아이들 중 가장 예쁜 아이는 바로 당소혜다.
그러나 대부분 아이들은 그녀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難上之木不可仰(난상지목불가앙)
오로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
하여 당소혜를 제외하면 손약란은 가장 뛰어났고, 그 때문에 손약란을 은밀히 사모하기까지 한 왕윤이다.
한데 지금 눈앞에 있는 진소소는 손약란과 비교하는 것이 불경스러울 정도이다.
당소혜? 먼발치에서 본 기억은 있지만,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왕윤은 순간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크흠, 여, 옆에 계신 소저는…… 누구냐?”
진소소는 돌연 자신의 얼굴을 보며 태도를 바꾸는 왕윤의 행태에 더욱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누나.”
뜻밖에 말에 왕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진소소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더욱 환하게 피어올랐다.
“네, 네놈한테 누나가 있었다고?”
“네가 우리 집 가정사를 알아서 뭐하려고 아는 척이야?”
퉁명스레 말을 하는 신유강의 목소리가 귀에 들릴 리가 없다.
왕윤은 더욱 헛기침을 하더니 진소소를 바라봤다.
“아, 안녕하십니까, 소, 소저. 저, 저는 기, 기왕윤이라…… 합니다.”
왕윤은 자신을 빤히 보는 진소소의 눈빛에 너무나 부끄러워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소소예요.”
얼굴도 예쁜 게 목소리까지 곱다.
왕윤을 비롯한 왈짜 아이들이 또한 표정이 느슨하게 변했다.
‘그런데 진?’
왕윤은 다급하게 신유강을 바라봤다.
“네놈은 신씨잖아.”
“그렇지.”
“그런데…… 네 누나는 왜 진씨야?”
그 말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진소소다.
그녀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신유강을 향해 다가갔다.
“저는 원래 신씨예요. 하지만 떨어져 있는 사이에 진씨가 된 거죠. 어렸을 적에 입양됐거든요.”
“아, 그렇군요.”
왕윤은 진소소의 말이라면 뭐든 믿을 기세다.
그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왈짜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지?”
“아하하! 제일 친한 친구가 객잔에서 청소를 하는데 도와주러 왔지. 안 그러냐?”
왕윤은 신유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최대한 진소소에게 잘 보이려 말을 했다. 그것이 두 눈에 빤히 보이기는 했으나, 신유강은 피식 미소를 지을 뿐 반박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왕윤과 왈짜 아이들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진소소가 신유강을 바라보며 쿡쿡 미소를 지었다.
* * *
천운객잔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오늘따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손님이 많은 객잔 내에는 뒷골목에서 사고나 치고 다니는 왈짜들과 미산검문의 후예라는 왕윤이 점소이 노릇을 하고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귀여운 여아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신유강의 옆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기이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왕윤과 신유강은 사이가 좋지 않다.
그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며칠 전 저자거리 한복판에서 왕윤이 시비를 걸다가 신유강에게 얻어터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유강아, 재들 왜 저러냐?”
포목점 주인 구씨가 물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왕윤의 성격상 신유강과 어울린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알을 굴려 자신의 옆을 쪼르르 쫓아다니는 진소소를 가리켰는데, 그제야 구씨가 뭔가를 알았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한 차례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객잔이 문을 닫을 술시(戌時) 말이 되었다.
열 명의 왈짜들과 왕윤, 그리고 신유강과 진소소는 현재 손금운의 앞에 서 있었다.
왕윤은 갑자기 신유강이 손금운에게 다가서는 것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호방한 무인을 따라하는 것이다.
“그렇군. 오늘이 네 봉급날이었나?”
“응.”
“진 소저, 동생 하나는 정말 잘 둔 것 같소! 이 근방에서 은자 네 냥을 받는 점소이는 이놈 하나라오.”
진소소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어린놈이 말투를 저리 쓰니 참으로 기이했다.
“그거 정말인가요? 놀랍네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을 하나 진소소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 들었으니 당연한 것이다.
순간 돈을 세던 손금운의 손이 멈칫했다.
슬쩍 신유강의 눈치를 살피는 듯 눈알을 굴렸는데, 그가 피식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작 두 냥을 주면 되는데 왕윤의 입에서 네 냥이 나왔다.
이 상황에서 두 냥을 주면 왠지 왕윤이 나설 것 같다.
손금운의 볼살이 덜덜덜 떨렸다.
“한데 지난번에 들어 보니 월봉이 밀린 것이 있다던데요?”
‘저, 저…… 쓸데없는 소리를…….’
진소소가 나긋나긋하게 말을 하며 애처로운 시선으로 왕윤을 자극했다.
부들부들 손을 떨며 은자 네 냥을 세던 손금운은 속으로 이를 갈며 진소소를 바라봤다. 분명 어제 모두 들었을 텐데 저리 나오는 것은 필시 자신을 엿 먹이려는 심산인 것이다.
손금운의 마음도 모르고 진소소의 눈빛을 받은 기왕윤은 잔뜩 얼굴을 붉히며 큰 소리로 말했다.
“밀린 것이야 다 주지 않겠소! 이래 봬도 손 씨는 사천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유명하지. 이 기왕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오.”
“호호호, 공자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정말로 덕이 많으신 분이겠군요.”
“그렇소. 하하하!”
손금운은 아주 미칠 것 같았다.
두 냥을 세던 손이 어느새 일곱 냥을 세었다.
그야 왕윤의 이름을 걸었으니 미산검문의 이름을 건 것과 같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두 냥만 내주었다간 미산검문에서 어찌 나올지 뻔할 뻔자다.
왕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여기…… 미, 밀린 것까지…… 이, 일곱 냥이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 그리고 이건…… 기 공자와…… 도와준 너희들의 것이다.”
예기치 않은 일에 손금운은 피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일을 했으니 응당 대가를 주어야 하고, 적게 주려니 왕윤이 걸린다.
일곱 냥이 나간 것도 피 눈물이 날 지경인데, 왕윤에게 두 냥, 다른 열 명의 왈짜들에겐 한 냥씩 돈을 주어야 했다.
어제 오늘 번 것이 전부 날아갔다.
그 처량한 모습에 진소소는 속으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손금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얼굴이 굉장히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그녀뿐 아니라 신유강 또한 마찬가지로,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이건 우리에게 줄 필요 없고, 진 소저에게 주도록 하시오. 하하, 유강이 이놈과 오랜만에 만났는데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소?”
“어머, 그럼 사양하지 않고 받도록 할게요.”
진소소가 화사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니, 왈짜들 또한 너도나도 돈을 내놓았다.
순식간에 열한 냥을 챙긴 진소소는 태연한 모습으로 신유강을 이끌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들어가겠어요. 언젠가 또 보도록 하죠.”
“하하! 소저, 꼭 보러 오겠습니다.”
“네, 기대하죠.”
진소소가 화사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자, 왕윤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또한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떴던 탓인지, 같이 온 어린 왈패들에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며 호탕하게 웃음을 지었다.
“가자 이것들아, 오늘은 황룡객잔에서 내 거하게 한턱 내지.”
그 말은 소년답지 않은 소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황룡객잔에서 술을 마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왕윤은 어울리지 않게 어른스런 웃음을 짓더니 은근슬쩍 진소소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선 진소소와 함께 가고 싶은 그였으나, 종일 신유강의 뒤를 따라다니며 객잔 일을 도와주는 것을 옆에서 봤던지라, 왕윤은 굳이 진소소에게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물론 권했더라도 진소소는 가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왕윤과 그 일행들이 밖으로 나가자, 손금운은 헛기침을 하며 신유강을 바라봤다.
혹시 돈을 되돌려주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섞여 있는 눈빛이었지만, 신유강은 손금운과 눈을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어르신.”
“그, 그래라.”
신유강의 당당한 말투 때문인지, 속이 쓰라릴 정도로 큰돈이 나갔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손금운은 진소소의 숙박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도 못한 채 신유강을 보내 주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