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 본인이 알고 있음에도 그리 말을 하는 것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흑영 또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 말에 반박을 하지 않았다.
“교로 돌아가려다 혹시나 해서 돌아와 본 것이 정답이었군.”
이미 다른 수하들을 전부 돌려보냈지만 흑호와 흑영은 이곳에 남았다.
광마도를 찾다 산속에서 처참하게 변해 버린 시체 한 구를 찾았기 때문이다.
전신이 뒤틀려 죽은 시체였는데, 쥐고 있는 병장기마저 말이 아니었다.
누구인지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그러나 흑영은 그 시체가 광마도라 판단을 했다.
용케 부서지지 않은 검신에 새겨진 광 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현 무림에서 광마도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사천에 구파일방 두 곳과 팔대세가 한 곳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리 세가 강하지 않은 곳들이니 만큼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누가 광마도를 죽인 것일까.
흑영은 가늘게 눈을 뜨며 신유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저놈을 잡아서 족쳐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흑호는 귓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광마도 손에 걸린 이상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저 신유강이라는 점소이가 흑호의 말대로 반로환동이라는 전설적 경지에 도달한 선인이거나, 혹은 운이 좋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흑영은 후자에 힘을 실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심 못마땅한 일이다.
마교 내에서도 최고의 은밀함을 자랑하는 자신들이 고작 열다섯밖에 안 된 소년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마도를 죽인 흉수를 찾지 못하고 교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받은 것은 열 배로.
그것이 마교의 법칙이었다.
* * *
진소소는 다른 누구보다 기척에 민감했다. 다섯 살 어린 나이 때부터 석무자라는 거물에게 단련을 받았던 탓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감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은근슬쩍 눈알을 굴려 자신들을 쫓아오는 이들을 바라봤다.
아직까지 이쪽이 눈치를 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 상당히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유강은 정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사네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신유강은 뜻 모를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신공에 공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신유강은 무인(武人)이 되기 위해 단련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치는 기척 하나하나를 감지해 내는 진소소와는 아직까지 천지차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소소는 서서히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 걸었다. 뒤를 따르고 있는 신유강은 점점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였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러나 진소소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상당히 깊숙한 골목,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까지 들어선 진소소는 슬그머니 등을 돌려 어딘가를 바라봤다.
“슬슬 나오시는 게 어떠세요? 몰래 따라다니시느라 고생이 심하신 것 같은데.”
진소소의 한마디에 신유강은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마치 누군가가 자신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듯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도 없던 공간에서 갑자기 두 명의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신유강은 기겁을 하며 눈을 치켜떴다.
‘방금,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나?’
흑운무(黑雲霧)를 몸에 두르고 모습을 드러낸 흑영과 흑호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약관도 되지 않은 듯한 계집애가, 자신들의 기척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겠는가.
“놀랍군. 우리 기척을 파악하다니…….”
흑영의 말에 진소소가 살포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웃음을 쳤다.
그것은 마치 미의 상징이라 불리는 구미호의 웃음처럼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어머, 숨어 계셨던 건가요?”
자신들의 은신술을 무시하는 진소소를 보며 흑영은 아미를 찌푸렸다.
흑호가 실수를 하여 진소소가 기척을 알아차렸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그것이 아닌 듯하다.
“거 보쇼, 평범한 것들이 아니라고 했잖소.”
흑호는 간이 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진소소의 행태를 바라보며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언제나 예상외의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그에게 재미를 주었다.
지금 상황이 그랬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다.
언제 발검을 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광마도에게 밀린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일류에 달하는 고수. 느껴지는 기백이 장난이 아니었다.
신유강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 반면, 진소소는 여유롭게 손을 뻗었다.
새하얀 그녀 옥수(玉手)는 언제든지 와 보라는 듯, 흑호를 도발하고 있는 듯하였다.
“네년이 광마도를 그리 만들었느냐?”
흑영이 나지막하게 물음을 던지자 진소소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물음에 신유강의 안색은 더욱 굳어졌고, 그것을 흑영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저런 소년이 광마도를 어찌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저 소년이 광마도의 죽음과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린아이의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광마도를 죽인 이가 누구냐?”
흑영의 말은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는 절정에 이른 고수였기에 작지만 확연하게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또한 광마도에 뒤지지 않는 그 기세는 살을 에는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듣는 소리네요.”
진소소 또한 이미 신유강의 반응을 보고 그가 광마도라는 이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굳이 그것을 입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흑영과 흑호는 진소소의 말을 듣고 어물쩍 넘어갈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난 두 번 묻는 것엔 취미가 없다.”
흑영이 슬그머니 흑호를 향해 시선을 주자, 지금까지 진소소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던 흑호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은밀을 요하는 흑영대 특성상 그들의 신법은 강호에서 상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쉬이이익!
그리고 흑호의 검은 그야말로 섬광이었다.
결코 수준낮은 무인이 어찌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매섭게 휘둘러진 흑호의 검은 일말에 망설임 없이 진소소의 목을 찌르고 들어갔고,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그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진소소의 목을 꿰뚫으려 하였다.
“소소!”
신유강은 미처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이 위협을 받는다면 회귀신공이 먼저 반응을 하지만, 타인이 위험에 빠지는 것에는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호의 검은 그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흑호의 검이 튕겨 나갔다.
검을 휘두른 당사자는 물론이며, 지켜보고 있는 흑영마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뒤였다.
진소소의 옥수(玉手)가 매섭게 흑호를 노리고 뻗어졌다.
마치 한 마리 매가 먹이를 노리며 날아가는 것처럼 잽싼 그 손놀림은 눈을 현혹시키고, 흑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퍽!
한 차례 턱을 가격하고 묵직한 기세를 머금은 우수(右手)가 이번엔 가슴을 타격했다.
퍼억!
“크윽!”
흑호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물러섰다.
생각했던 것보다 공격이 매서웠다.
상대는 그저 감이 좋은 꼬마 계집이 아니었다.
진소소가 자신과 동등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방금 전 공방으로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만약 물러서는 것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흑호는 틀림없이 깊은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제법인데?”
한 발짝 물러선 흑호는 히죽거렸다.
겨우 광마도가 저지른 일의 뒤처리를 하는 임무라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상대를 만났다.
강자와 부딪치는 것은 기쁘다.
특히 눈앞에 있는 이 불여우 같은 계집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둬!”
그때, 소리를 치며 끼어드는 이가 있었다. 바로 신유강이었다. 그는 진소소에게 공격을 가한 흑호에게 적대심을 보였다.
험악하게 표정을 구기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야수를 보는 것 같았다.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 같지 않았음에도 전신이 찌릿찌릿해질 정도의 살기(殺氣)와 머릿 속에서 울리는 극한의 경종은 진소소보다 신유강이 더욱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흑호는 웃었다.
반로환동이라 말했던 것은 단순한 농담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어린 놈은 마치 전설상의 그 경지에 오른 이 같지 않은가.
“대주! 이것들 상대하는 건 나한테 맡겨 주쇼. 내 반드시 광마도 그놈에 대한 걸 털어놓게 만들지.”
“광마도가 네놈 친구더냐?”
흑영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는 흑호를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예전부터 호승심이 강한 녀석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고작해야 약관도 되지 않은 핏덩이들에게 승부욕을 불태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흑영은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지켜봤다.
그것은 마음대로 해 보라는 의미와도 같았기에, 흑호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진소소가 아닌 신유강을 바라봤다.
“이봐, 혹시 반로환동한 늙은이는 아니겠지?”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말에 진소소는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반로환동이라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석무자 또한 그런 늙은 모습이 아닌 소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신유강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웃고 있는 흑호를 향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 내가 사람을 잘못 건드린 건 아닌가 모르겠군.”
흑호는 꺼림칙한 기운을 느끼며 멋쩍게 웃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노려보고 있는 것뿐인데, 그 눈빛이 참으로 살벌했다.
마치 대적할 수 없는 거대한 태산 앞에 선 느낌이었다.
단순한 착각이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흑호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눈앞에 있는 이 소년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진소소보다 더욱 위험했다.
검을 잡고 있는 손이 떨렸다.
두려움 때문에 떠는 것이 아니다.
생사(生死)를 가르는 혈투.
이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죽음의 냄새가 살이 떨릴 만큼 커다란 황홀감을 그에게 가져다주고 있었다.
“이걸 어쩌지.”
조금 전까지만해도 흑호와 손속을 주고받았던 진소소는 상당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