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어째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초라해 보인다.
“왜 그래요, 유강?”
무언가 고민이 있어 보이는 신유강의 모습에 한달음에 그의 곁으로 다가온 진소소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워낙 거리가 가까운지라 살짝 손을 뻗는다면 닿을 정도였기에, 진소소를 보기 위해 몰려든 청년들에 눈에서 불이 튀었다.
‘이거이거…….’
과거 손약란이 그에게 관심을 보일 때에도 이런 반응은 종종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격이 다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살기가 느껴졌다.
“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요?”
진소소는 뭔가 머득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밝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슬쩍 등을 돌렸는데, 그녀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마치 신유강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고민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과 미소였고, 마치 이 상황이 그녀의 계산 아래에서 벌어진 것 같은 의심이 강하게 일 만큼 의미심장했다.
스치듯 그 미소를 보았던 신유강은 갑자기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왜 그런 건지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어쨌든 어두워지면 장사를 할 수 없는 노점의 특성상, 신유강과 진소소는 유시(酉時) 정도면 장사를 접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 모여 있는 청년들이 아쉬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란 것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신유강은 이 시간대를 가장 좋아했다.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정리하는 신유강의 모습에 진소소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무언가 만족을 한 표정이 역력했다.
신유강은 여전히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오늘은 상당했어요. 후후.”
짤랑거리는 은자와 동전이 부딪히는 소리가 상당한 금액을 벌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고작해야 노점에서 벌면 얼마나 벌겠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진소소와 신유강이 번 돈은 일반 객잔의 하루 수입보다 더욱 많았다.
인근에 있는 객잔들보다 더 번다는 소리다.
고작해야 노점이.
“다 소소 덕분입니다.”
신유강이 이 모든 것이 진소소 덕분이란 걸 인정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이렇게 큰돈을 만져 볼 수도 없었을 테니까.
“제 덕분이라뇨? 유강도 열심히 하잖아요.”
“그거야 원래 점소이였으니…… 하지만 그 많은 손님들이 대부분 소소의 얼굴을 보러 오잖아요.”
어두워진 거리를 걸으며 신유강이 퉁명스레 말을 하자, 진소소는 또다시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따지면 이 모든게 유강 덕분이네요.”
“그게 소립니까?”
“모르셨어요?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유강 때문이에요. 그러니 저를 보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돈을 버는 이유도, 다 유강 때문이라는 거죠. 당신이 이곳에 없었으면 나도 여기 없었을 테니까요.”
신유강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방긋 웃고 있는 진소소를 바라봤다.
어두운 풍경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신유강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총총 걸음으로 앞서나선 진소소가 화사한 석양(夕陽)을 등지고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은 마치 천상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광경이었기에 순간 신유강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소소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같은 거 하지 말아요.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유강은 마치…… 으음…… 가족 같은 느낌이니까요. 제가 유강을 떠날 일은 없어요.”
거기까지 말을 하던 진소소가 잠시 입을 다물더니, 마치 고백하는 어린 소녀처럼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유강이 저를 버리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제가 소소를 버리다뇨. 천지가 개벽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단언하는 신유강의 말에 진소소는 화들짝 고개를 들어 올리며 가만히 신유강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무척 굳건했다.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에 도가 텃다 해도 과언이 아닌 진소소는 처음 신유강을 만난 그 순간부터 느꼈던 것이 하나 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그것을 확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석무자는 그에 대해 무언가 아는 듯했지만, 굳이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 주려 하지 않았다. 석무자는 결과적으로 그것이 진소소와 신유강의 관계에 해가 될 것이라 판단을 한 것이다.
진소소는 뚫어지게 신유강의 눈을 응시하다 이내 웃음을 지었다.
언제가 그가 자신에게 감추고 있는 말을 해 줄 때를 기다릴 것이다.
지금은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족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
그러나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은 허언이 아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신유강이라는 존재가 깊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 * *
“시벌, 더럽게 늦게 오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중 의원의 의방.
그곳에서 배를 골며 신유강과 진소소를 기다리고 있었던 흑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신유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매일 끝나는 시간에 끝내고 온 것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시나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들려오는 욕설 때문인지, 진소소는 좋았던 기분이 깡그리 뭉개지는 것을 느끼며 살포시 아미를 찌푸렸다.
다 죽어 가는 것들을 구해 줬더니 입에서 나오는 말 대부분이 욕설이고, 하는 짓 또한 거칠기 짝이 없다.
신유강의 의견만 아니었다면 애초에 구해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진소소는 정파의 인물이다.
물론 세가에서 오랫동안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정파의 인물이라는 것에 한 치 의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그녀였기에 마교인들을 바라보는 눈이 고울 리가 없다.
“밥이라도 만들어 놓고 가든가. 굶겨 죽일 셈이냐!”
거침없이 고함을 지르는 흑호를 바라보며 신유강은 웃었다.
오늘 아침에 부랴부랴 나가는 통에 이들이 먹을 음식을 전혀 만들지 않았다.
“이거라도 좀 드십시오. 조금 전 만든 것이니 따뜻할 겁니다.”
장사를 접기 전에 만들어 놓았던 음식이다. 대충 팔다남은 것들을 섞어 만든 조잡한 것이긴 하지만, 진소소가 만든 것이니 그 맛은 장담할 수 있었다.
흑호는 신유강이 가지고 온 그릇을 받아 들고는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어찌나 배가 고팠는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조차 알 수가 없을 정도다.
흑영은 그것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운기를 하며 내상을 치유해 보긴 하였지만, 워낙 기이한 무공에 당한 터라 아직까지도 제대로 운신을 못했기에 흑호처럼 밥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유강은 그것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더니, 이내 밥을 떠먹여 주기까지 했다.
마치 부모의 병 수발을 들어 주는 듯한 모습이다.
진소소는 살수를 쓴 이들이 뭐가 예뻐서 저러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본 신유강의 성격은 단호할 때는 단호하나, 평소에는 모질지 못했다.
천성이 착하다는 소리다.
“아직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십니까?”
“커컴…… 이상하게 운기를 해도 잘 안 되더군.”
“흐흐흐, 대주. 이러다 평생 불구로 사는 것 아뇨?”
“이 잡것이 어디서 그런 불길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정말로 죽고 싶으냐?”
“아니, 그렇잖소. 나는 금방 일어났는데 대주만 그러니까…… 솔직히 맞기는 대주보다 내가 더 많이 맞았수.”
“자랑이다, 이 새끼야.”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신유강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가 흑영보다 흑호를 더욱 심하게 때리긴 하였다.
갑자기 진소소에게 칼을 겨누었기에 눈에 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귀신공의 힘이 더욱 강하게 들어간 것은 흑영 쪽이었고, 그 부작용으로 벌써 십여 일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여기 의원 놈이 사기꾼 아니야?”
“아닙니다. 중 의원님은 사천에서 제일가는 의원이세요.”
사천제일의 의원이라는 말에 흑호는 콧방귀를 뀌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의방의 주인이 퍽이나 뛰어난 의원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그때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것은 진소소의 목소리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흑영의 고개를 재빠르게 돌아갔다.
“방법이 있는가?”
“예, 한 번에 말끔히 나을 수 있는 방법 있긴 해요.”
“그, 그것이 뭔가?”
“흔히 말하는 영단이라는 것을 먹으면 되는 거죠.”
불가능한 말을 하는 진소소를 보며 흑영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곤 질끈 눈을 감았다.
영단이라 불리는 것들은 구하는 것이 워낙 힘들다.
마교에서도 최상위 권력자들만 가지고 있을 뿐이고, 심지어 현 천마인 사마혁 또한 고작해야 다섯 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것을 고작 마교의 중상위 계층이라 할 수 있는 흑영이 가지고 있을리가 없다.
“킬킬, 대주. 저 계집이 당가나 아미, 청성을 털라는 소리 같은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그렇지. 개소리지. 그거 훔치려다가 맞아 뒤지겠다. 흐흐.”
그 말에 진소소는 뾰로퉁한 표정을 짓더니, 품 안에서 새하얀 단약 하나를 꺼내 그들에게 내밀었다.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방 안에 향긋한 냄새가 가득 퍼졌다.
보기만 해도 청량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흑영과 흑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 그것은?”
“영단이에요.”
“정말인가?”
흑영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눈앞에 자신의 몸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만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물밑 듯 솟구친 것이다.
“그것을 나에게 준다는 말인가?”
“물론이죠.”
진소소가 싱긋 웃음을 지었고 흑영화 흑호가 입을 쩍 벌렸다. 영단은 그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다.
특히 이처럼 청량함을 풍기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귀한 것을 둘의 목숨을 노렸던 자신들에게 준다고 하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흑영은 고마움과 자책감에 몸을 맡기며 주륵주륵 눈물을 흘렸다.
“물론 공짜는 아니에요. 금 천 냥.”
이어지는 진소소의 말에 눈물을 흘리던 흑영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려 진소소를 바라봤고, 흑호 또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금 천 냥이 뉘집 개 이름이던가?
평생을 마교에 몸 바쳐 일한다 해도 모을 수 없는 금액이다.
그 값에 저것을 살 수 있는 이들은 중원의 십대 거상들이나 가능할 것이다.
“처, 천 냥이라니…….”
“선기단. 소림의 대환단조차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영단을 천 냥에 먹을 수 있다면 싼 것 아닌가요?”
선기단이라는 말에 흑영은 또다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삼백 년 전 등장한 영단으로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현재도 고작해야 몇 알 남아 있는 것뿐이고, 그 소유주가 누구인지 밝혀지지도 않은 영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