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됐으니까 그만 돌아가요.”
“여기까지 나왔는데 말입니까? 기왕이면 제게 사천 구경 좀 시켜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소혜는 느끼한 그의 목소리에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듣는 이를 이토록 언짢게 만들 수 있는지 참 대단했다.
속으로 역겹다고 욕을 하면서도 당소혜는 남궁상을 바라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사천 구경은 저기 지나가는 똥개와 함께 하세요, 남궁 소협.”
남궁상이 당소혜가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웬 똥개 두 마리가 설렁설렁 주변을 지나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자거리를 돌며 떨어진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똥개다.
남궁상은 인상을 쓰며 당소혜를 바라봤다.
“지금 제게 똥개와 어울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였는데, 어쨌든 전 공자와 볼일이 없으니 빨리 가시라고요.”
남궁상은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대 남궁세가에서 태어나 이렇게 무시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같은 팔대세가이지만, 후지기수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바로 당소혜다.
‘꼴에 좀 예쁘다고 자존심을 세우는군. 눈앞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쳐도 모자랄 판국에…….’
기분이 나빠진 남궁상은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그녀가 바라보고 있었던 객잔을 향해 말이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선 두 명의 남자 때문에 진소소의 모습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그에 따라 남궁상의 눈에 뜨인 것은 신유강뿐이었다.
‘혹시……?’
남궁상은 더욱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당소혜를 바라봤다.
여전히 그녀는 노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상은 그녀가 객잔에서 일을 하는 저 점소이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물론 당소혜는 진소소를 보고 있는 것이지만, 어쨌든 남궁상은 진소소가 보이지 않으니, 신유강을 보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신을 옆에 두고 다른 남자에게 시선을 준다는 것게 자존심이 상한 남궁상은 조용히 신유강을 향해서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당소혜가 놀라 소리쳤다.
“어디 가요?!”
‘아무래도 내 천직은 점소이인가 보네.’
신유강은 생각했다.
그와 진소소가 노점에서 몇 달 동안 벌어들인 수익은 가히 어마어마했다.
그가 천운객잔에서 몇 년은 꼬박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그것이 대부분 진소소 덕분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 덕분에 여전히 노점은 작지만 몰려드는 손님들 탓에 인산인해(人山人海)라 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점소이 노릇을 하고 있는 신유강은 손님만 앉았다 하면 방긋방긋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것은 반사적인 행동과도 같았다.
“소채 하나요!”
말하는 것 또한 일을 하지 않을 때와 일을 할 때 상당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었다. 한마디로 천성이 점소이 체질이라는 것이다.
신유강은 진소소가 만들어 놓은 소채를 손님에게 가져다 주고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 둘이 험악한 인상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보였다.
“어서옵쇼.”
마교에서도 더러운 성질로 정평이 나 있는 흑영대 부대주 흑호는 험악한 표정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처음에는 그를 무서워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 흑호의 접대에 웃음을 짓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 반대쪽엔 흑영이 무뚝뚝하게 소면 두 그릇을 손님 앞에 내려놓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소면을 시켰던 젊은 여인들이나, 나이가 있는 미부(美婦)들이 얼굴을 붉히는 것이 보였다.
사실 흑영은 상당히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남자답게 생긴 데다 근육 또한 우람하니, 여인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신유강은 잘생기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를 보러 오는 여인들은 없었다.
기이하게 신유강의 얼굴을 보러 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들에게는 진소소가 접대를 하였고, 그 뒤로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금 신유강은 점소이, 그 이상 혹은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유강, 이리 와 봐요.”
진소소가 부르는 소리에 신유강은 퍼득 정신을 차리며 쪼르르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자신을 부른 이유를 물으려던 순간, 무언가가 그의 입 안으로 쏙 들어왔다.
“이건?”
신유강은 으적으적 입안에 들어 있는 것을 씹더니 곧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기인 것 같은데 부드러우면서도 입안에 가득 퍼지는 맛이 절묘했기 때문이다.
“새로 만든 꼬치예요. 어때요?”
싱글싱글 웃음을 짓는 진소소의 앞에서 신유강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너무 맛있었던 탓에 다른 말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이네요. 유강의 입맛은 살짝 까다로워서 고생이에요. 정말.”
“제 입맛이요?”
“어머, 모르셨어요? 이곳에서 파는 음식들 전부 유강의 입맛에 맞춰진 거예요.”
신유강은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던 말을 듣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와 동시에 진소소를 보기 위해 몰려든 남자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에 침을 뱉었고, 음식을 먹던 이들은 젓가락을 내려놓기도 했다.
신유강은 그 모습을 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면서도,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진소소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더욱 요리에 박차를 가하였고, 그것 때문인지 신유강을 향해 쏟아지는 남자들의 시선이 참으로 매서워졌다.
“아 참, 유강. 이거 좀 중 의원님 댁에 가져다주시겠어요? 오늘 아침에 부탁을 받은 건데, 제가 지금 손을 놓지 못해서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던 진소소가 건네준 것은 중 의원이 먹을 음식들이다.
아직까지도 의방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중 의원의 끼니를 챙겨 주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상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신유강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소소는 다시 요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사실 중 의원이 있는 곳은 저자거리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신유강의 걸음으로 족히 이각은 넘게 가야 했다. 그동안 자리를 비워야 하니 아직 신유강에 비해 일이 서툰 흑영이나 흑호를 시키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진소소가 일부러 신유강에게 일을 맡긴 것은 그를 조금이라도 쉬게 하려는 그녀의 따뜻한 배려였다.
어쨌든 신유강은 음식을 들고 발 빠르게 의방으로 향했다. 저자거리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과거 천운객잔이 있던 터가 보였고, 그곳을 지나가는 신유강의 한숨을 쉬었다.
“잘 있나 모르겠네.”
얼굴조차 보지 않고 떠나 버린 손약란을 떠올렸다.
손금운은 뭔가 큰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실성한 사람 같았고, 신유강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조용히 하남으로 떠난 것이다.
천운객잔의 터는 이미 다른 사람 손에 헐값에 넘어갔다.
비록 좋은 기억보다 좋지 않은 기억이 많은 곳이긴 하지만, 천운객잔은 그야말로 신유강에게 천운을 가져다 준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신유강은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아니라고요!”
휑한 공터만 남아 있는 천운객잔을 바라보며 잠시 감상에 젖어 있었던 신유강은 돌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얼굴의 소녀가 보였다.
그 옆에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남자가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자는 신유강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며, 소녀는 그것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단순히 이야기만 한다니까 왜 그러시오?”
“무슨 이야기를 해요? 고작 점소이한테!”
“아까부터 당 소저가 저 점소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지 않았소? 그러니 내가 저놈보다 더 낫다는 것을 소저에게 보여 주어야만 직성이 풀리겠소.”
남궁상은 어이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당소혜가 말리지 않았다면, 당장 달려가 신유강의 멱살이라도 부여잡을 기세였다.
“이봐, 거기 점소이! 이리 와 봐라.”
대뜸 소리를 치며 신유강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고 있는 남궁상은 기세가 등등했다.
신유강이 자신보다 급이 낮다고 생각되었기에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 모습에 신유강은 혀를 내둘렀으나, 힘을 가졌어도 평생 점소이 일을 하면서 몸에 밴 습성은 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새 그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남궁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불렀다. 네놈은 여기 계신 당 소저를 아느냐?”
사람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입을 연 남궁상의 모습이 부끄러웠던 당 소혜는 결국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괜히 자신 때문에 애꿎은 점소이가 피해를 입을 것 같았기에 불안감이 가득하였으나, 남궁상이 과연 무슨 짓을 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신유강은 슬쩍 아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에 살면서 당가의 아가씨를 모를 리가 없지요.”
“놈! 네놈 따위가 감히 뉘 앞이라고 고개를 끄덕인단 말이냐!”
아무것도 아닌 일에 소리를 치는 것을 보니 남궁상은 단단히 심기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생트집을 잡고 일갈을 내지른 남궁상은 세차게 손을 휘둘러 신유강의 뺨을 치려고 했다.
오랜 시간 무공을 익혀 온 그의 손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신유강 또한 지난 몇 달 동안 객잔 일만 한 것이 아니다.
때론 흑영, 흑호와 비무를 하였고, 하루가 멀다 하고 진소소에게 단련을 받았다. 그렇다고 하여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신유강은 반사 능력이 탁월하다.
그는 슬쩍 고개를 뒤로 젓히는 행동만으로 세찬 남궁상의 손을 피해 버렸다. 기세등등했던 남궁상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애초에 신유강이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못했기에 힘을 과하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 이 녀석이!”
남궁상은 시뻘게진 얼굴로 신유강을 노려봤다.
당소혜에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국에 어이없이 헛손질을 하게 만들었으니 그 분노가 오죽할까?
“죽고 싶으냐?!”
“죄송합니다만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신유강은 더 이상 이들을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가뜩이나 광마도와 얽혀 좋은 꼴을 보지 못했으니, 더 이상 무림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당소혜의 옆에 있는 것만 봐도 이 무례한 남자는 틀림없이 큰 배경을 가진 인물일 것이다. 신유강이 가장 꺼리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다.
당소혜와 어울릴 만한 큰 배경을 가진 곳은 십중팔구 팔대세가였고, 그렇다면 당연히 하북진가 또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곳은 진소소의 본가였으니, 되도록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 수 재간이 있다고 아주 겁을 상실했구나. 어디 한 번 이것도 피해 봐라.”
남궁상은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더욱이 상대는 같은 팔대세가 인물도 아닌, 길거리에서 음식이나 파는 점소이였으니,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