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은근슬쩍 협박을 하는 진소소를 바라보며 흑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과도(果刀)였다.
틀림없이 저것으로 귀를 뚫어 버리겠다는 협박이 분명했다.
흑호는 말을 돌리면서 힐끔 진소소를 바라봤다. 혼기 꽉찬 젊은 처녀. 그것도 7년 전에 비해서 상당히 아름답게 자란 그녀는 중원제일미라는 칭호를 얻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무인들의 혼인이 일반인들보다 늦는다고 하더라도,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형편이니, 이미 사고가 났어도 진즉에 났어야 했다.
그러나 신유강이나 진소소나 혼인을 하지 않았다.
둘을 바라보고 있으면 평생을 함께할 연인임이 분명하지만, 신유강은 무언가 조심스러운 모습이었고, 진소소는 그런 신유강을 믿고 기다리는 것으로 보였다.
흑호는 벅벅 머리를 긁적였다.
“너 그러다가 그 녀석 다른 여자가 채 간다?”
“흥.”
“뭐…… 네가 다른 남자한테 갈 수도 있고…….”
“시끄러워요!”
진소소가 과도를 들어 올리며 살벌하게 말을 하자, 흑호는 찔끔 놀라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진소소 또한 안다.
그녀는 신유강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거나 혹은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그녀도 여인.
남자에게 먼저 혼인을 하자는 말을 하는 것은 조금 창피하지 않은가.
하여 신유강이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기이하게 신유강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인지 선뜻 말을 하지 않았다.
진소소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두 볼을 가득 부풀렸다.
생각해 보니 괜히 화가 난다.
* * *
“너 어디가?”
장삼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객잔으로 향하고 있던 신유강은, 돌연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당소혜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또 도박하러 가?”
신유강이 가는 길 끝에는 당연히 객잔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매일같이 도박이나 하러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탓에 당소혜는 당연하다는 듯 도박장을 언급했다.
그러나 신유강은 뚱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객잔, 그리고 너희 집은 이 반대쪽이다.”
귀찮게 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빙 돌려서 한 것이었다. 아무리 당소혜라 하더라도 그것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그녀는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를 쳤다.
“나는 언니 보러 가는 길이야!”
“그러니까 너희 언니는 네 집에 있잖아? 너희 집은 저쪽이라고.”
“너 맞을래?”
신유강은 당소혜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수차례 회귀 끝에 너무 오랜시간 보았기 때문인지, 여자로서의 매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따지자면 진소소가 더하다 여길 수 있으나, 애초에 진소소와 당소혜는 격이 다르다.
또한 그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팔대세가의 후기지수로 보이는 녀석이 덤벼들었을 당시, 천한 점소이가 어쨌다는 둥 말을 하던 그 모습을 말이다.
은근히 뒤끝이 있는 신유강이었다.
신유강은 더 이상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더니, 객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쭈뼛거리면서도 주인을 쫓아가는 강아지처럼 당소혜가 따랐다.
그 모습은 흡사 연모(戀慕)하는 사람을 따라가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며 소곤거렸지만 감히 입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상대가 사천당가에 막내 아가씨였으니, 잘못 입을 놀렸다간 그대로 이 세상과 하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네가 웬일로 도박장에 가지 않고 객잔에 나가는 거야?”
“장삼이가 쓰러졌잖냐. 그 구멍을 채운답시고 소소가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나가지 않아 봐.”
거기까지 말을 하던 신유강이 휙 하고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당소혜를 향해 얼굴을 내밀었는데,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인지라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주춤 물러섰다.
“어떻게 될 것 같아?”
“나, 나야 모르지…….”
진소소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당소혜는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석무자 다음으로 진소소를 잘 알고 있는 신유강은 안 봐도 뻔했다.
아마 하루 종일 그 잔소리와 매서운 눈빛을 받으며 지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어제는 외박까지 했으니.’
신유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보니……. 사천당가는 무엇이든 받으면 배로 돌려주는 게 원칙이었지?”
“그렇지.”
은혜는 배로 갚으며, 원한은 그 값에 열 배를 쳐서 돌려준다.
사람들이 사천당가의 가훈이자, 무림인들이 그들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아 하는 이유였다.
정파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나, 당가와 엮여 그 끝이 제대로 된 이들은 볼 수가 없다.
독이라는 것을 무공으로 사용하는 특성상, 폐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말이다. 아주 만약에 누군가 너희 집에 불을 지르고, 네게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을 죽이려 했다면 어떡할래?”
너무 당연한 물음에 당소혜는 콧방귀를 뀌었다.
애초에 사천당가를 건들 수 있는 자들은 없다. 물론 만약에라도 신유강이 말한 일이 터진다면 틀림없이 그 일을 저지른 자는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당소혜는 다부지게 질문에 대답을 해 줬다.
“똑같이 갚아 줘야지. 그놈이 누군지 알아내서 집에 불을 지르고, 열 사람은 죽여야 속이 풀릴 것 같아.”
누가 당가의 직계 아니랄까 봐 가훈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한 모습이었다.
신유강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대단한 자라면?”
“얼마나 대단한데?”
“대운상단 정도?”
대운상단이라는 말에 당소혜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니 어제 아버지에게 그들에 대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정작 그들이 자신이 때려눕힌 이들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내 입장에선 딱히…… 솔직히 대운상단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우리 집안이 더 대단하거든.”
무림에서 정파의 세가 가장 불안한 지역이라 불리는 곳이 바로 사천이다.
그럼에도 마교에게 이 땅이 넘어가지 않은 것은 사천당가에 힘이 컸다.
마교 측에서도 독을 쓰는 고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당가만큼 대단한 이들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청성이나 아미를 부수는 데 필요한 인원이 열 명이라 가정을 한다면, 사천당가를 부수는 데 필요한 인원은 백 명이었다.
치명적인 독을 쓴다는 것 하나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럼 반대로, 네가 내 입장이고, 대운상단이 그런 짓을 했다면 어떻게 할래?”
결코 흘려 들을 수 없는 말이 나왔다.
근 칠 년 동안 신유강을 지켜보았던 당소혜는 그가 결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번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데다, 능력 또한 대단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남궁상과 일전을 벌이던 그 모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그녀의 머릿 속에 박혀 있었다.
놀고 있지만은 않았을 테니, 아마도 지금은 더욱 그 실력을 높였을 것이다.
“설마 대운상단이 너희 객잔에 불을 지르려고 한 거야?”
가던 길을 우뚝 멈추고 묻는 당소혜를 바라보며, 신유강은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입을 다물라는 행동이었다.
당소혜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새 그 소리를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근방에서 신유강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대운상단이 불을 지르려 했다면, 그 대상이 틀림없이 기연객잔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지, 예를 들자면.”
조용한 소리로 중얼거리자 당소혜는 게슴츠레 눈을 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는 확신을 가진 것이다.
“그놈들이 미쳤군! 어쩜 그래?”
“입 다물라고. 입, 입, 입!”
“우웁!”
한때는 신유강이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었던 당소혜는 지금 고양이 앞에 쥐와도 같은 모습이 되었다.
신유강은 거침없이 당소혜의 입술을 잡아 늘렸다. 그것이 어찌나 아픈지 찔끔 눈물을 흘렸지만, 신유강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천당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틀림없이 분노해 신유강을 가만히 안 놔둘 것이 분명한데도 당하는 당소혜도, 행하는 신유강도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파!”
“소소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거다. 객잔은 멀쩡하고, 다친 사람도 없으니까.”
당소혜는 그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을 지르려 했다는 것은 일을 저지르던 도중 붙잡혔다는 소리인데, 사천 바닥엔 아직까지 그 어떤 소문도 돌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육평초는 좀 있으면 당초운을 만난다.
만약 그러한 짓을 진짜로 벌였다면 신유강이나 진소소의 성격상, 걸린 즉시 아작이 날 것이 분명하니, 밖에 나오지 못하거나 혹은 관아에 끌려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수가 아니라는 소리인데, 그것도 웃긴 것이 객잔은 멀쩡했다.
당소혜는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입을 열려고 하자 신유강이 인상을 쓰며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객잔이 보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 쓸데없는 소리는 입에 담지 마라.”
“알았다니까!”
단호하게 대답을 하는 당소혜였지만, 콧노래를 부르며 걷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신유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가 아빠한테 말해서 혼내 줄까? 지금 대운상단 사람들을 만나러 가셨는데.”
“당 가주께서? 왜?”
사천당가의 가주가 직접 대운상단의 육평초를 만났다는 것은 결코 흘려 들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대운사단이 아무리 이름 높은 상단이라고는 하지만, 상단주도 아닌, 소상단주를 만나기 위해 당가를 이끄는 당초운이 움직인 것이다.
신유강은 그 부분이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림맹에서 사천에다 새로운 지부와 함께 후지기수들을 기르기 위한 무관 같은 걸 짓는다고 했거든. 그 일 때문에 아빠가 대운상단 사람들을 만나는 건데, 아무래도 자리 구하기가 힘든가 봐.”
“사천에?”
“그래,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천은 정파 땅이지만 세가 약하잖아? 그래서 새로운 무관과 학관을 지어, 사천을 더욱 튼튼하게 방비하려는 심산이겠지.”
정확히 맥을 짚는 당소혜의 말에 신유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러한 이유라면 육평초가 왜 자신의 객잔을 손에 넣으려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성도에서 가장 자리가 지리적 위치가 좋은 땅이 천운객잔 인근이었다.
육평초가 달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유강은 인상을 찌푸렸다.
몰랐을 때는 단순히 화재를 막으면 지레 겁을 먹고 포기를 할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사정을 알게 되니 아무래도 그러한 방법으로는 택도 없을 것 같다.
무림맹에서 직접 주관을 하는 일이니, 어마어마한 돈이 오갈 것은 분명하고, 대운상단이라면 결코 포기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