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상대가 극강의 고수가 아니고서야, 다가오는 그녀의 기척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며, 대부분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서걱!
이어진 소리는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청랑이 쥐고 있는 검이 어느새 신유강의 목을 파고들고, 그의 피를 머금은 채 빠져나왔으며, 피육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랑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맺혔다.
“……!”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잘렸던 신유강의 목이 저절로 붙기 시작하더니, 시퍼렇게 죽었어야 할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와 동시에 신유강은 매섭게 주먹을 휘둘렀다.
퍼걱!
“아프잖아!”
목이 잘려 나가는 고통이 온몸을 엄습하자 신유강은 소리를 질렀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다 나올 정도였으며, 반사적으로 휘두른 주먹에는 저도 모르게 힘을 가득 주었다.
굉장한 소리와 함께 청랑의 안면에 주먹이 틀어박히고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쿵!
“크흑.”
믿을 수 없는 일에 멍하니 서 있던 청랑은 코뼈가 주저앉는 고통을 느끼며 뒤로 날아갔고, 이내 벽에 부딪치며 신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더럽게 아프네!”
신유강은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쳤다. 광마도에게 목이 잘리는 경험을 겪었지만, 지금 이 공격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목을 갈랐던 광마도와는 다르게 그녀는 상당히 미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끔찍하게 칼날이 목을 스치는 느낌을 확연하게 느꼈는지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신유강은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고 있는 청랑을 향해 달려갔다. 신법을 사용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무식한 멧돼지처럼 돌격하며, 냅다 발을 뻗어 청랑의 머리를 노렸다.
“……!”
그러나 무인으로서 경험이라면 신유강보다 청랑 쪽이 더 우위에 있다.
고통스런 신음을 삼키고 있던 청랑은 달려오는 신유강을 바라보며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전신에 흑운무를 둘러싸고 움직인 그녀는 곧 신유강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신유강의 발은 허망하게 벽을 찼다.
퍽!
“빌어먹을!”
신유강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로 돌았다.
평범한 무공이 아니다.
지난 번 육평초가 보냈던 살수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종류가 아니다. 그보다 더욱 강하며 확연하게 높은 수준의 은신술이었다.
신유강은 다시 인상을 쓰며 주먹을 뻗었다.
청랑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한 번 보았으니 그걸로 싸움의 승패는 갈렸다.
빠각!
“컥!”
흑운무 속에 몸을 숨긴 청랑은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신유강과 거리를 상당히 벌렸다. 그런데 눈을 껌뻑이는 순간, 신유강이 눈앞에 있으며 그 주먹이 또다시 얼굴에 박혔다.
골이 흔들리는 느낌과 더불어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청랑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 번 발을 놀리며 거리를 벌리려 했는데, 돌연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또 안면에 주먹이 박혔다.
‘뭐……?’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가득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우습지도 않은 일이냐 생각하며 고통 속에서 눈을 굴려 신유강의 얼굴을 바라봤다. 날아오는 주먹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피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경멸감마저 들 정도다.
빠각!
“커컥!”
코뼈가 무너지며 이빨이 날아갔다.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고작 삼류 무사의 주먹이 어찌 이리도 셀 수가 있단 말인가?
청랑은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히죽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신유강의 얼굴이었다.
빠각!
널브러진 청랑을 바라보고 있는 신유강의 표정은 삐딱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목숨을 위협 받았는데 기분이 좋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육평초 그놈인가?”
놈이 갑작스레 사라진 탓에 행방을 전혀 파악할 수 없지만, 육평초 말고는 이 사천 땅에서 딱히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가 청랑의 배후로 육평초를 떠올리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신유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지난 번 살수를 보냈을 때 확실하게 처리했어야 했는데, 초라하기 짝이 없는 육평초의 얼굴을 보며 동정심이 든 것이 잘못이었다.
신유강은 한 번 베였던 목을 쓰다듬으며 힐끗 쓰러진 청랑을 바라봤다.
실패를 했다고는 하나 눈앞에 있는 이는 살수다.
더욱이 조금 전 그 무공들은 흑영이나 흑호마저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만약 회귀신공을 사용하지 못할 때 덤벼든다면, 이렇다 할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죽어 나갈 것이 분명했다.
신유강은 무언가 마음을 먹었는지 쓰러진 청랑을 향해 다가섰다.
정신을 잃었음에도 아직까지 손에 쥐고 있는 그녀의 검을 빼앗아 든 그는, 천천히 칼을 집어 들어 목을 겨누었다.
삭초제근이라 했다.
후환이 될 것 같은 존재는 그 뿌리를 뽑아 놔야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다.
“응?”
그러나 막 검을 뻗어 청랑의 목을 가르려 했던 신유강은, 무언가를 발견하였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복면을 벗겼다.
상대가 생각했던 것보다 왜소한 체구였지만, 망설임 없이 검을 뻗는 단호함과 고통을 잘 참아 내는 것을 보며 틀림없이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상한 생각이 들어 복면을 벗겨 보니 그것이 아니다.
왼쪽 이마부터 눈 밑까지 긴 검상이 자리를 잡고 있기는 하지만,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물론 지금은 피떡이 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물론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죽이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위협이 된다면 여인이든 노인이든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신유강이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애잖아?”
많이 쳐줘야 열일곱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그러나 얼굴 전체가 워낙 어려 보이는 탓인지, 신유강의 눈에는 열다섯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어린아이가 살수라니?
신유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물론 진소소 또한 어렸을 때부터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는 무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석무자에게 무공을 배웠기 때문이고, 평범하게 자랐다면 당소혜보다 조금 높은 경지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런 어린아이가 그 정도 실력이라니.
목에 가져다 대었던 검을 슬쩍 긋기만 한다면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하나, 신유강은 짧은 한숨과 함께 검을 거두었다.
“되는 일이 없군.”
결국 신유강은 청랑의 몸을 둘러업고 움직였다.
워낙 체구가 왜소한 탓인지 사람을 둘러업었다는 느낌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가볍다. 입고 있는 옷 때문에 명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느껴지는 감각으론 뼈밖에 없는 송장을 업고 있는 기분이다.
그만큼 제대로 먹지 않고 지냈다는 것이다.
힘든 수행을 한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유강이 보기에는 단순히 수행만으론 이렇게까지 마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모르는 고생을 하고 있거나, 이 여아가 모시고 있는 자가 손금운 같은 악독한 놈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신유강은 투덜거리며 객잔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청랑을 동정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신유강을 고개를 저을 것이다. 이건 동정이라기보단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처럼 착잡함과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었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길을 이용하여 기연객잔으로 간 신유강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후문으로 향했다.
후원이 있는 곳을 지나 주방 안으로 들어가자, 콧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만들고 있던 장삼이 깜짝 놀라 신유강을 되돌아봤다.
“깜짝이야. 이놈아, 기척 좀 내고 다녀라.”
한 차례 힐끗 신유강을 바라본 장삼은 퉁명스런 표정으로 그리 말을 하며, 다시금 요리에 집중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곧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듯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너, 너…….”
“뭐가?”
“나, 납치까지 하냐?”
“미친 놈…….”
지난 번 신유강과 함께 장원을 불태웠던 장삼은 신유강이 생각했던 것보다 나쁜 축에 속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그가 등에 어린 소녀를 둘러업고 들어왔으니,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먹을 것 좀 만들어 올려 보내라. 방에 있을 테니까.”
툭 하고 내뱉은 말에 장삼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유강은 슬그머니 삼 층에 있는 객실로 움직였다. 후원은 점소이들이 쓰는 곳이기에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객실 안으로 들어가 널브러져 있는 청랑을 눕힌 신유강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회귀신공을 얻은 뒤로 한숨을 쉬는 횟수가 상당히 줄었는데, 요즘 들어 다시금 늘어나는 기분이다.
끼이익.
그때 객실에 문이 열리며 진소소가 안으로 들어섰다.
객잔 정문에서 당소혜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그녀는 돌연 장삼이 찾아와 알 수 없는 말을 떠든 탓에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았다.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눈을 흘겼다.
“유강,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말투는 나지막하나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침상에 누워 있는 소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이빨은 몇 개가 나갔고, 코뼈가 주저앉았으며 얼굴은 피로 떡칠이 되어 있다.
척 보아도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 같았고, 상당한 수준에 오른 것으로 보였다. 그런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이는 그녀가 알기론 오직 한 명이다.
진소소는 게슴츠레 신유강을 바라봤다.
“조금 전 나를 죽이려 하더군.”
“그 말을 믿으라고요?”
진소소는 영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신유강이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이기에 그저 뾰로통한 시선을 보냈다.
“상당한 실력이야. 흑영이나 흑호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말이지.”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말을 하니 진소소 또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살수라면 응당 죽였어야 함이 옳은 일이건만 어째서 살려 두었는지 알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곧 그녀의 의문이 풀렸다.
처참하게 뭉개져 있는 소녀의 얼굴에 신유강이 손을 가져다대자, 기이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부러졌던 이빨과 주저앉은 코뼈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진소소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입을 벌렸다.
신유강이 익히고 있는 무공이 무엇인지 그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단순히 회귀신공이라는 이름을 들었기에 몇 가지 추측을 할 뿐이다.
그중 하나가 과거 흑영을 고쳤던 것이었는데, 그것을 실제로 눈으로 보니 쉬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진소소는 다소곳하게 신유강의 앞에 앉아 마음을 추슬렀다.
지금은 신유강이 가지고 있는 무공보다 이 아이에게 시선이 더 갔기 때문이다.
“어린 애네요. 그런데 어디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낯이 익은 얼굴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진소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십 년 전 기연고서점에서 있었던 일을 끄집어내기에는 세월이 너무나도 많이 흘렀다.
“더욱이 유강이 그런 말을 할 정도이니…… 꽤 강한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이런 아이를 키웠는지 궁금하네요.”
진소소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한 모습이다.
무공은 일류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유강이지만, 막상 진심으로 대련을 한다면 진소소 또한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그것이 바로 신유강이 가지고 있는 회귀신공 덕분이라는 것을 진소소는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