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가뜩이나 기분이 심란해 죽겠는데, 쓸데없는 소리로 마음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돌아오려나?”
* * *
진소소가 신유강을 그리워하며 한숨을 토해 내고 있을 무렵, 신유강은 사천 성도를 벗어나 청해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챙겨 오지 않았기에, 피죽 한 그릇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는 그였으나, 꼬르륵거리는 뱃속 소리와는 다르게 그는 꽤 건강해 보였다.
“하아…….”
신유강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산길을 걸으며 한숨을 토했다.
끝없이 늘어져 있는 첩첩산중이니, 간간이 칡과 나물을 뜯어먹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칠 일 동안 계속되니 진이 다 빠질 지경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사천성을 떠나기 전에 장원에 들려 여비를 좀 챙겨 올 걸 그랬다며,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 그였다.
더욱이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적호대원들에게 고문당해 넝마가 된 옷이었다. 시뻘건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탓에 대로를 걸을 때도 사람들이 쉬쉬하며 도망을 치기 바빴다.
“그런데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기는 한 건가?”
대로(大路)를 타고 가다 작은 소로(小路)로 빠져든 것이 잘못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산을 타면 금방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산길이 험한 데다, 산을 내려가고 있기는커녕,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신유강은 아그작 칡뿌리를 씹으며 힘없이 걸었다.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어떻게든 산을 내려갈 수 있겠지만, 워낙 깊게 들어온 탓인지, 아니면 원래 이 산에 사람들이 살지 않는 것인지,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신유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었다.
흑영과 흑호를 구하기 위해 신강으로 향한다.
가서 어쩐단 말인가?
십만 마도인들을 상대로 주먹질이라도 할 것인가?
바로 얼마 전까지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신유강이었지만, 적호대 대주인 율초언에게 패배한 뒤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그의 기나긴 인생 동안 회귀신공으로 상대했던 자들 중 가장 강한 상대는 틀림없이 광마도였다.
그러나 쉽사리 제압을 했던 광마도와 율초언은 격이 달랐다.
내공 한 줌 사용하지 않고 몰아치는 주먹과 발길질은 도무지 막아 낼 재간이 없었다.
회귀신공을 사용하려 해도 상대는 그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신유강의 몸이 율초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였고, 마치 그에게 겁을 먹은 듯 움츠러든 것 같았다.
신유강은 인상을 쓰며 잘근잘근 칡뿌리를 씹었다.
생각해 보니 괜스레 울화가 치민 것이다.
“다음번엔 반드시 이긴다.”
율초언에게 이기기 위해서 더욱 수련에 박차를 가해야 함이 옮기 때문에, 신유강은 신강으로 향하는 지난 칠 일 동안 연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단순히 회귀신공을 사용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석무자의 무공, 그리고 기연고서점에서 외워 두었던 무공들을 하나하나 되짚기 시작한 것이다.
이 험난한 산길을 택한 이유 또한 그중 하나다.
가장 빠르게 청해 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험준한 산을 타면서 조금이라도 체력을 늘리기 위함이었다.
이번 사태로 신유강은 회귀신공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게다가 자신이 그것을 완벽하게 다루지 못하는 이상, 율초언이나 그 이상의 존재들과 무슨 일이 생겼을 시, 신유강은 진소소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유강의 기억력은 무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연고서점에 있는 책들을 아무리 많이 읽었다 하더라도, 그는 천재가 아니었기에 그것들을 모두 완벽하게 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여 신유강은 현재 석무자의 무공과 몇 가지 권장지각술을 파고들고 있었는데, 애초에 회귀신공은 내공과 비슷하지만 내공이라 볼 수 없으니, 어느 정도 흉내를 낼 수 있으나 완벽하게 그것을 익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유강은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만능처럼 보이나 결코 만능이 아니다.
신유강의 눈에는 서서히 회귀신공에 단점이 보이고 있었다.
“으아아악!”
그때 멀지않은 곳에서 누군가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신유강이 퍼뜩 상념을 깨고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한 어린아이가 발 빠르게 도망을 치고 있었고, 그 뒤를 거대한 곰 한 마리가 매섭게 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신유강은 재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그리 빠르다 할 수 없는 신법이지만, 어린아이와 곰 사이에 끼어들 정도는 되는 속도였다.
돌연 신유강이 앞을 가로막자,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던 곰은, 그 무지막지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매섭게 휘둘렀다.
부웅-!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더불어 곰의 발톱은 신유강의 전신을 갈가리 찢어 버릴 듯 휘둘러졌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그 소리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빠르다’
그러나 신유강은 그것을 바라보며 슬쩍 몸을 움직였다. 빠르기는 하지만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수준으로 따지자면 당소혜 정도는 될 법한 움직이다.
후웅!
곰의 발톱은 어김없이 허공을 갈랐다.
크아앙!
그것이 분했던가?
곰은 더욱 큰 포효를 내지르며 신유강을 향해 쏜살같이 다가와 다시 한 번 발톱을 휘둘렀다. 조금 전보다 더욱 강한 힘이 실려 있는 것 같은 그것은, 또다시 매섭게 신유강을 향해 쏟아졌다.
신유강은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고 옆으로 돌아서며 곰의 앞발을 피해 내고는, 순식간에 곰의 옆구리를 노리며 주먹을 뻗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이다.
퍼걱!
회(回)의 힘이 실려 있는 주먹에 맞자, 두터운 모피(毛皮)를 뚫고 들어간 기운이 근육과 내장을 그대로 꼬아 버렸다.
아무리 체격이 좋은 곰이라 하지만, 내부가 진탕이 되었으니 살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쿠쿵!
짐짓 주춤거리던 곰의 신형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고, 신유강은 그것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소혜 정도 수준이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소리군…… 이건 뭐,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내심 곰을 상대로 가상의 대결을 펼친 것이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쉬이 제압을 하는 것을 보니, 아직까지 회귀신공이 쓸 만하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어느새 바닥에 널브러져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소년이,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 어린아이라면 울고 불며 난리를 쳐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꽤 담이 좋은 아이인 것인지 어느새 진정한 상태였다.
“대단하구나. 죽을 뻔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을 보니.”
내심 자신의 어렸을 적 모습이 떠오른 신유강은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도 악바리 하나로 살았던 적이 있었지 않았는가.
“아, 아니에요. 꽤 놀랐어요. 게다가 이곳에서 곰은 처음보기에…….”
소년은 이 근방 야산을 뒤집어 헤치며 땔감으로 쓸 나무와 간간이 약초를 캐 내다 파는 것으로 생을 연명하고 있었다.
최근 곰이 나타난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집안 사정상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굶어 죽기 일쑤였기에, 어쩔 수 없이 산에 올랐던 것이다.
운이 나쁘면 곰을 만나 죽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멀쩡하게 살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정말로 곰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근방에 사느냐?”
“예, 대협. 여기서 한 시진 정도 내려가면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서 삽니다.”
대협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는 신유강은 두 눈을 반짝거렸다.
돈에 환장한 놈, 영약한 놈, 그것이 아니면 도박에 중독된 난봉꾼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었지만 대협이라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신유강은 히죽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야 하지? 내 며칠 동안 산을 헤맨 탓에 사람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다.”
“그,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안내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년은 신유강이 곰에게는 도통 관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며 황급히 말을 하며 품에서 자그마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이리도 큰 곰이니 모피만 가져다 팔아도 상당한 돈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으음.”
“혹…… 대, 대협께서 이것이 필, 필요하신 겁니까?”
막 손질을 시작하려 했던 소년은 돌연 들려오는 신유강의 신음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올려 다 봤다. 그러고 보니 곰을 잡은 것은 신유강인데, 묻지도 않고 손질을 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아니다, 괜찮으니 네가 가져라.”
“가, 감사합니다, 대협.”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소년은 어느새 단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리기는 하지만 단도를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두 번 짐승 가죽을 벗겨 본 솜씨가 아니다.
마치 숙련된 사냥꾼 같다고 할까?
신유강은 상당히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윽…….”
그렇게 이각 정도 시간이 지나고, 모피를 전부 벗겨 낸 소년은 곰의 피부를 가르고 안을 들여다보며 신음을 흘렸다.
단순히 주먹에 한 번 맞았을 뿐인데, 뼈와 내장이 진탕이 되어 건질 수 있는 것이 모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대, 대협께선 정말로 무공이 고강하신 듯합니다. 이처럼 큰 곰을 주먹 한 방에…… 이렇게 만들다니…….”
쓸개와 고기들을 기대하고 있었던 소년이었기에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하였으나, 대단한 사람에게 구함을 받았다는 생각에 곧 표정을 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소년은 힘겹게 모피를 둘러업었다. 곰 자체가 워낙 큰 데다 모피의 양 또한 상당했기에, 제대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소년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괜찮으냐?”
“괜, 괜찮습니다. 하나도 아, 안 무거워요.”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기는 하지만, 도움이 필한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이 아니라면 신유강이 모피를 가지고 갈까 두려워 건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산중에 대협 같은 분께서 어찌 길을 잃고 계셨던 겁니까?”
“산을 타고 넘는 것이 청해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엑?! 처, 청해 말입니까?”
청해라는 소리에 소년은 기겁을 하며 신유강을 바라봤다. 모피에 가려 잘은 보이지 않지만 상당히 놀라고 있는 것이 눈에 선할 정도다.
“청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그…… 그거야…… 지, 지금 시기에 청해라면…… 혹시 곤륜대전에 참석하려고 하십니까?”
“곤륜대전?”
신유강은 생전 처음 듣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곤륜대전은 중원의 무인이라면 모를 리 없는 단어였다.
그것은 구파일방이란 절대세력 중 한 곳인 곤륜파에서 해마다 벌이지는 대전이다. 비록 주최자인 곤륜이나 이름 높은 명문가, 문파가 참석하지는 않지만, 낭인이나 중소문파, 그리고 이름을 날리고 싶은 무인들이 참석을 하여 자리를 빛내기도 한다.
구파의 절대세력 중 한 곳인, 곤륜의 눈에 들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청해는 물론이고 감숙과 사천에서도 상당히 많은 무인들이 몰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게 있었나?”
소년에게서 모든 설명을 들은 신유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무인들이 모인다면, 참석하여 실전 수련을 해 보는 것 또한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고개를 저었다.
신강까지 남은 거리는 아직도 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