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흑호는 벽에 기댄 채 삐쩍 말라 있는 흑영을 보며 말 했다. 내공을 사용할 수 없게 금제가 가해져 있는 상태에서 약 오 일 동안 온갖 독벌레들에게 물렸으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 아니냐.”
“나는 살 거요. 죽이고 또 죽여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요.”
“쯧쯧…… 꿈 깨라.”
“니미, 그게 할 말이요?”
“내가 틀린 말을 했느냐? 뇌옥에 들어왔으니 우리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너는 이곳에서 살아나간 놈이 있다는 소릴 들은 적 있느냐?”
“이 흑호가 그 첫 번째가 될 거요.”
흑영은 힘없는 눈빛으로 가만히 흑호를 바라봤다.
예전부터 무모한 멧돼지처럼 앞만 보고 돌진을 하는 놈이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을 보니, 차마 뭐라 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왜 반항을 안 했소?”
흑호의 물음 당연한 것이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죽을 것이란 걸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장원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를 하는 편이 한때 교에 몸을 담은 무인으로서 가장 어울리는 최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흑영은 얌전히 붙잡혔다.
흑호는 상대가 적호대라서 흑영이 그리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흑영대가 적호대보다 못하다고는 하지만, 그곳의 대주인 흑영은 천생 무인, 강한 자를 앞에 두고 굴복할 만한 성격을 지닌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우리가 싸웠다면 아마 그 아이들도 피해를 입었겠지.”
“그래서 우리 목숨 내준 거요? 걔들 목숨은 귀하고 내 목숨은 안 귀하오?”
“네놈 목숨과 그 아이들 목숨하고 같으냐?”
“그럼 뭐가 틀리오?”
“쯧쯧, 네놈과 나는 이미 살만큼 살았지만 그 녀석들은 아니지 않으냐. 더욱이 그 두 아이는 장차 무림을 진동시킬 만한 기량을 지녔다. 그런 아이들이 헛되게 죽게 둘 수는 없지 않느냐.”
“지랄, 한 놈은 도박에 미친놈인 데다 수련을 해도 해도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한 년은 수라보다 무서운 년인데 뭔 걱정이오?”
흑호의 거침없는 말투 때문인지 흑영은 오랜만에 웃음을 지었다.
흑호는 알지 못하지만 신유강이 도박에 중독된 것이 아니라는 걸 흑영은 안다.
한번 다녀올 때마다 상당한 양의 돈을 가져오니, 그가 결코 돈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수련을 시켜도 무공 수준이 상승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는 수긍을 하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두 아이들을 지켰으니 되었지 않느냐?”
“헹, 그보다 어서 여길 빠져나갑시다. 내가 구멍을 팔 테니 대주도 좀 도와주쇼.”
구멍을 판다는 말에 흑영은 실소를 머금었다.
“너는 이 땅을 파헤칠 자신이 있느냐?”
“계속 파다 보면 구멍이 생기겠지.”
그들이 갇혀 있는 뇌옥은 밖에서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이상 탈출이 불가능한 곳이다. 바닥은 흙으로 되어 있기는 하나 내공조차 쓰지 못하는 맨손으로 파지 못할 정도로 단단하였다.
외공을 익힌 고수하여도 한 치조차 파지 못하고 포기를 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을 가두고 있는 뇌옥 전체가 단순한 철이 아닌 한철로 이루어져 있는 탓에 초절정에 오른 이들이 사용한다는 강기라도 뿜지 않는 이상 부수는 것 또한 힘든 일이다.
그러나 흑호는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앙상하게 뼈만 남은 두 손으로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를 보여 주는 것 만 같았다.
“좋아, 도와주마.”
흑영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 * *
“에잇! 빌어먹을 자식!”
늦은 저녁 시간, 도우겸을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분을 삼켰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그 거지의 역겨운 얼굴 때문에 기녀들을 품에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기분이 좋지 못했다.
“대협,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사옵니까?”
“아무것도 아니니 조용히 술이나 따라라.”
시큰둥하기 그지없는 도우겸의 행동에 기녀는 삐친 듯 고개를 돌리면서도 조심스레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고 오늘 오후에 대협께서 한 거지와 설전을 벌이셨다지요? 호호호.”
쾅!
가뜩이나 거지라는 말만 들어도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 일을 이야기하며 웃는 기녀 때문에 도우겸은 거칠게 술잔을 내려 놨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잔과 함께 탁자가 부서졌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흐음, 그런 거지에게 들은 말을 뭘 그리 신경을 쓰고 계세요? 대협답지 않게.”
도우겸은 더욱 거칠게 술을 들이켜며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지 따위와 설전을 벌였다는 오명을 뒤집어썼으니, 기분이 나쁠 만도 하다.
“에이, 빌어먹을!”
“호호, 그래도 대단한 거지네요. 감히 천하의 쌍검룡 도우겸 대협 앞에서 그리 당당한 것을 보니. 혹시 개방의 호걸이 아닐까요?”
“개방은 무슨, 매듭은커녕 무공을 익힌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놈이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면 내가 단칼에 머리를 쪼갰을 게야.”
“호호호, 그도 그러네요. 아, 혹시 저 거지 아닌가요?”
씩씩 거리는 도우겸의 모습이 재미있기라도 한 것인지, 한참 동안 웃음을 짓고 있었던 기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한 거지를 가리켰다.
늦은 밤이긴 하지만 환한 등불로 밝혀진 홍등가의 거리였으니, 그 초라한 행색이 눈에 띄는 것이다.
도우겸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창을 내다보았다.
이윽고 기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설렁설렁 홍등가 거리를 걸으며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신유강이 보였다.
“이놈!”
“꺄악!”
신유강의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한 도우겸은 저도 모르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곁에 있던 기녀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물론이며, 호객 행위를 하던 기녀들 또한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도우겸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것은 신유강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돌연 들려오는 고함에 시선을 돌린 신유강은 마치 반가운 친우를 만났다는 듯 한껏 웃음을 짓고는 손을 흔들었다.
“낮에 보았던 그 대협 아니시오? 하하하, 청해에서 이름 높은 대협이라고 하더니, 이런 곳에서 계집질을 하는 것이오?”
“이, 이, 개새끼가…….”
“하하하, 낮에는 몰랐는데 상당히 입이 거친 분이시구려.”
거침없이 들려오는 말에 도우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라 해도, 참아 주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술까지 몇 잔 걸쳤으니, 이성을 가지고 행동할 리가 없었다.
“이놈! 정녕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에이, 왜 이러시나? 설마 거기서 뛰어내리기라도 하시려고?”
신유강이 있는 것과 도우겸이 있는 곳은 상당히 낙차가 컸다.
일류 고수라 하더라도 자칫하면 몸이 상할 만한 높이인지라, 그것을 눈치챈 도우겸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 순간, 뭔가 기이한 것을 느꼈다.
분명 처음 신유강을 보았을 때, 자신이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그 뒤로 크게 소리를 치지는 않았다.
더욱이 홍등가는 밤만 되면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이니,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이 많은 인파 속에서 도우겸의 목소리를 정확히 짚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놈! 무공을 익혔느냐!”
“뭐, 간단한 호신술 정도는 익혔소.”
태평하기 그지없는 신유강의 표정은 도우겸의 울화를 더욱 부추겼다.
도우겸은 입꼬리를 씰룩씰룩 움직이며, 시뻘게진 얼굴로 검 한 자루를 잽싸게 뽑고는 거침없이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오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화려한 모습에 넋을 잃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추락사를 할 높이에서 화려한 경공술을 이용해 빠르게 내려왔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까.
도우겸은 어느새 신유강의 앞에 서 있었다.
번뜩이는 칼날을 신유강에게 겨눈 그는 한껏 고함을 내질렀다.
“검을 뽑아라! 내 당장 이 자리에서 네놈의 목을 따 주마.”
쌍검룡이라 불리는 도우겸이 이름도 없는 거지에게 검을 뽑으라고 호통을 치는 것을 본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상황에 눈을 빛냈다.
곤륜대전에서 그의 실력을 보았던 이는 물론, 대전을 보지 못했던 이들 또한 이 자리에서 쌍무검제의 검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가득한 것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관심이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하하하, 싸우자고 시비를 건 것은 아니니, 부디 용서하시오.”
“이, 이놈, 감히 이 도우겸을 농락하는 것이냐?”
“지나가는 사람에게 먼저 소리를 친 것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오.”
신유강이 홍등가로 들어온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이미 인근에 있는 도박장에서 상당한 돈을 벌었지만, 진짜로 큰돈이 오가는 도박장은 보통 이런 홍등가 가장 안쪽에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괜한 싸움으로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이, 이 자식! 무인에게 수치를 주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슬쩍 목 근처로 들어오는 칼날을 손으로 잡은 신유강은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자신이 무인이라는 자각은 아직까지 없소만…… 이렇게 계속 위협을 한다면 나 또한 별수 없소이다.”
“놈!”
도우겸은 신유강을 위협하듯 검을 내질렀다.
반보만 더 움직인다면 그 자리에서 검날에 목을 꿰뚫릴 수 있는 상황임이 분명한 상황인지라,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자칫하다간 시체를 치우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여전히 태연하기 짝이 없다.
입가에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살을 파고들 것 같은 도우겸의 칼날을 조심스레 치웠다.
그 행위를 하는 동안모든 사람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킨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리 화 내지 마시고, 좋은 곳에서 술 한잔 즐기시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소? 같이 올라갑시다.”
도우겸을 만나 한참을 웃었더니 또다시 공복이 몰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우겸이 있던 곳을 보게 되었고, 그가 상당히 이름이 있는 무인이라 생각되니, 한상 거하게 차려 놓았을 것이라 예측했다.
“뭐, 뭐라?”
그러나 도우겸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는 표정이다.
서슴없이 칼날을 치우는 행동에도 놀라웠는데, 지금 보니 넉살도 좋고 간덩이도 상당히 부은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태연할 수가 있겠는가.
“네놈은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것이냐.”
“청해에서 이름을 널리 날리고 있는 쌍검룡 대협이라고 하지 않으셨소.”
대협이라는 말에 히죽 웃음을 지었던 도우겸의 안색이 굳어졌다. 은근히 비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녕 네놈이 나를 농락하는구나!”
“아니, 여기서 열 내지 말고 올라갑시다. 창피하게 길거리에서 싸움질하려고 들지 말고 말이오. 하하하.”
신유강은 너털너털 웃음을 지으며 기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움직였던 탓에, 남아 있던 도우겸이 분한 듯 얼굴을 붉혔다.
다급하게 등을 돌려 기루 안으로 들어서니, 냄새나는 꼴로 휘적휘적 도우겸이 있던 방을 향해 가고 있는 신유강이 보였다.
“멈춰라, 이놈!”
“하하하, 잡아 보시오.”
신유강은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헤픈 웃음을 지으며 계단을 올라갔고, 기루를 관리하는 파락호들은 도우겸 때문인지 함부로 신유강을 막지 못했다.
도우겸이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상황에서 신유강을 막았다가, 눈 먼 칼에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신유강은 어느새 도우겸이 있던 기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에는 세 명의 기녀들이 자못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