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第一章. 천마강림(天魔降臨)
마존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유강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삐딱하게 침상에 누워 있는 이는 바로 천하제일인이란 칭호를 얻은 절대강자.
그 어떠한 기세조차 풍기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유강은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신음을 삼켰다.
그러나 좌시할 수 없는 말이 나온 것은 사실이기에, 신유강은 깊게 숨을 들이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선자?”
현재 현선자를 알고 있는 자는 고작해야 사라진 석무자 정도일 것이다. 그 외의 누구에게도 입에 담지 않았으니만큼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런 상황에 마존의 입에서 그 이름이 거론되니 놀라울 따름.
하지만 신유강은 내심(內心)을 쉬이 밖으로 드러낼 만큼 바보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존 또한 마찬가지.
마존은 신유강의 행동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슬그머니 손가락을 움직였다.
단순히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기묘한 검붉은 기운들이 매섭게 신유강의 전신을 향해 쏟아졌다.
퍼퍼퍼퍽!
신유강은 식은땀을 흘렸다.
전신을 꿰뚫을 것만 같은 십여 개의 빛살들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는 듣는 것만으로 섬뜩했다. 금방이라도 목숨을 잃을 것 같은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것이다.
죽는다?
회귀신공을 익히고 있는 자신이?
지금까지 그러한 생각을 해 본 적조차 없었기에 그 공포는 더욱 확연하게 와 닿았다. 아니나 다를까, 슬쩍 뺨을 스친 빛살 때문에 가늘게 난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담이 좋은 줄 알았더니 은근히 겁쟁이로군. 현선자, 그자의 무공을 익혔으니 이 정도로는 죽지도 않을 텐데 말이지.”
마존은 마치 신유강이 익히고 있는 회귀신공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신유강이 가늘게 눈을 뜨며 마존을 바라봤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빌어먹을, 당신 누구요?”
“그 따위 모습으로 본좌의 이름을 알려하는 것인가?”
이미 소동의 모습이 본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마저 간파한 듯 마존은 서슴없이 입을 열었고, 신유강은 끄응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간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마존은 그저 끌끌 웃음을 짓고 있었고, 신유강은 두렵기 짝이 없는 천적의 앞에서 태연함을 유지하려 애를 쓰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내 체념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신공의 기운을 풀어냈다.
후우욱!
전신에 흐르던 기운들이 모조리 단전으로 가라앉으며, 신유강의 몸이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갔다.
누가 봐도 놀라워해야 함이 마땅할 기묘한 상황.
그러나 마존은 그저 흥미로운 것을 보았다는 듯한 표정뿐이었고, 그 이외의 감정은 전혀 없는 듯 덤덤하기만 했다.
“되었소?”
신유강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눈빛은 여전히 마존을 향해 있었으며, 꺾이지 않겠다는 듯 앙칼지게 입술을 깨문 모습은 과연 신유강답다 할 만했다.
그러나 마존은 신유강의 눈빛이나 표정, 그리고 겁 없이 내뱉는 말투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지었다.
“참 건실한 놈이로군! 하하하.”
마존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의미를 알지 못했던 신유강이었으나, 곧 자신의 모습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의 주위에는 본래 소동이 입고 있었던 장삼이 여기저기 찢겨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면서 작은 옷이 찢겨진 것인데, 마존에게 온 신경을 빼앗기고 있었던 터라 차마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유강이 인상을 쓰며 봇짐에 넣어 두었던 옷을 주섬주섬 꺼내려 했다.
그 모습이 볼썽사나웠던 것인지, 지금까지 웃고 있던 마존이 휙 하고 무언가를 던졌다.
“입어라. 추하기 짝이 없으니.”
마존이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흑색 비단 장포.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이었으나, 그 속에 수를 놓아 새겨진 검은 달과 흑룡(黑龍)은 틀림없이 마교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신유강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내가 입어도 되는 것이오?”
“하하하, 본 마존이 네놈에게 입으라 했으니, 네놈이 입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유강은 마존이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거친 싸구려 장삼보다는 부드러운 비단 옷에 더 익숙한 신유강은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마존을 주시하며 옷을 걸친 신유강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막상 입고 보니 너무 컸던 탓이다.
마존이 픽 웃었다.
“딱 맞는군.”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크오. 어디를 봐서 이게 딱 맞는 것으로 보이오?”
“그 정도가 적당한 것이다. 보기에는 뭔가 있어 보이는 것 같지 않으냐.”
마존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흑룡의를 걸친 신유강을 보며 낄낄 웃었다.
사실 지금 신유강이 입고 있는 것은 마교에서도 오로지 두 사람만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십만마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천마!
그리고 그 다음 세대의 천마를 상징하는 이.
즉, 소교주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신유강은 그저 어색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그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 보도록 합시다. 당신은 누구요?”
“마탑에 올라와 그곳 주인에게 누구냐 물어보는 네놈은 누구더냐?”
마존의 대꾸에 신유강은 무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말 우습지도 않은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황염과 함께 탑을 오를 때부터 만나야 할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다.
더욱이 들끓기 시작하는 회귀신공의 기운은, 틀림없이 눈앞의 남자가 마존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듯했다.
한 차례 신음을 삼키며 골똘히 생각을 정리하던 신유강은,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름은 신유강이오. 출신은 모르고 지금은 사천에서 객잔을 꾸리며 조용히 살고 있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놈이지. 보통이라면 이런 곳에 올 일도 없는 그런 놈이오.”
본인의 의지라고는 하지만 마교에 발을 들인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신유강의 미간은 말하는 내내 찌푸려져 있었다.
“하하, 세간의 사람들은 이 나를 보고 대천마(大天魔), 혹은 마존(魔尊)이라 부른다.”
“그게 다요?”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지?”
천마라는 이름은 이미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조차 알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러나 신유강이 원하는 대답은 저런 당연한 것들이 아니다.
그가 천마라는 사실은 이미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신유강이 시선을 들어 올려 마존을 쏘아봤다.
“그런 당연한 말을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오. 어째서 현선자를 알고 있으며, 내가 그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은 어찌 알고 있는가,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오.”
“내가 알아선 안 될 사람을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구나.”
마존이 뜻밖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신유강의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 년 전 돌연 모습을 드러낸 천마는 그 어마어마한 신공과 힘으로 중원무림을 제패하고,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고 있는 자다.
반면 현선자는 분명히 존재했던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진소소는 물론 석무자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으니, 적어도 신유강은 현 중원에서 현선자를 알고 있는 이가 자신 외에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것이 설령 기연고서점에 들어갔던 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린 놈 가지고 놀면 재미있소?”
“끌끌, 암 재미있다마다. 내 평생 그곳에 들어간 이는 나밖에 없는 줄 알았거늘, 나와 같은 놈이 또 있다는 것에 놀랍고, 또한 삼 층에 올라간 이가 있다는 사실 또한 놀랍고 재미있다.”
마존은 진심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 금의신 소동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 마존이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다름 아닌 기연고서점에 대한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섰을 테지만 그 상대를 특정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데 금의신 소동은 마치 자신을 찾아 달라는 양 전 중원에 걸쳐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애초에 삼국시대의 명의라 불리는 화타조차 그러한 의술을 보인 적이 없는데, 고작 열 살뿐이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신의 경지에 오를 리가 없다.
그것이 마존의 생각이었고, 자연스레 기연고서점의 인물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마존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지금 마존은 들끓는 호승심을 억누르기 위해 상당히 애를 쓰고 있었다.
천 년 전, 천마를 유일하게 꺾어 낸 인물이 바로 현선자다.
저주받은 마공을 익혔기에 역사에서조차 사라진 이.
마존은 짧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지금은 아니다.’
천마신공을 익히면서 전해져 온 천 년 전의 기억이,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현선자의 후인을 죽이라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마존은 때가 아님을 안다.
지금의 신유강을 죽이는 것은 너무나도 아까운 일이다.
“……답을 줄 생각이 있는 것이오? 없는 것이오?”
“그저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 것뿐이다.”
“천년노괴(千年老怪)라도 된다는 소리오? 제대로 미쳤군.”
신유강은 피식 웃음을 머금으며 손사래를 쳤다.
석무자가 삼백 년을 산 괴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연고서점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마존은 오래전 기억이라 말했다.
현선자가 활동했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신유강은 자연스레 그 생각을 떠올리며 실소를 머금은 것이다.
천년이라니?
그 정도면 노괴도 아닌, 썩어 빠진 시체가 아니던가?
“하하, 천년노괴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본 마존의 나이가 그리 들어 보이더냐?”
“그리 안 보이니 물어보는 것 아니오.
“기연고서점……. 본 마존이 그곳으로 올라가 비급을 보았을 당시, 천마의 기억이 스며들었다는 뜻이다.”
마존은 씁쓸하게 웃음을 지으며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누군가의 기억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당하는 기분.
천 년 전의 천마와 지금 마존의 기억이 마구 뒤섞여 있으니, 본인이 천마인지 마존인지의 판단조차 제대로 서지 않는 것이다.
기연고서점에서 얻은 비급은 그에게 절대적 영광을 안겨 주었으나, 마존은 그것을 그리 기쁘게 생각하지 못했다.
마존의 씁쓸한 눈빛 탓에 신유강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칠 년 전, 회귀를 풀지 못하여 영원한 삼 일을 돌고 돌았을 당시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때 신유강에게 회귀신공은 저주의 마공이었다.
진소소를 만나게 해 주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결코 익히고 싶지 않았던 마공이었다.
어떨 때는 진심으로 죽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기연을 원하던 이들이 듣는다면 배부른 소리라 하겠지만, 실제로 이 기연을 얻은 신유강의 입장은 그리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