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벌레들을 있는 대로 잡아먹다 보니 떨어졌던 체력이 어느 정도 채워진 것이다.
“차라리 철창을 벌려 보는 건 어떠냐?”
“웃기는 소리 마슈. 내공도 없는데 그런 걸 어찌합니까?”
“네놈이라면 가능하지 않느냐? 근성으로 말이다.”
흑영이 클클 웃음었다.
마교로 잡혀 온 뒤 흑영은 삶을 포기했었다. 도망간다는 생각은 커녕, 이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삶을 끝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삶을 갈망하는 흑호를 보면서 그러한 생각을 떨쳐 버린 지 오래다.
비록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겠다는 의지를 지니니 죽음을 앞두고도 마냥 즐겁기만 하다.
죽는 순간까지 즐겁게 그렇게 살다 가는 것이 인생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흑영은 낑낑거리며 철창을 열려 하는 흑호를 보며 그저 웃음만 지었다.
“웃지만 말고 좀 도와주면 안 됩니까?”
“늙은 놈에게 바라는 것도 많다.”
“나도 늙은이야, 이 사람아!”
툭하고 반말을 내뱉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영은 싫은 기색 없이 웃음을 머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흑호가 귀여운 모양이다.
“으흠, 그럼 미약하나마 이 늙은이가 힘을 보태 주마.”
“대주, 지랄하지 말고 어서 잡으쇼. 일단 여기서 나간 다음에 객잔으로 돌아가 먹고 싶은 걸 다 먹을 거요.”
“호오…… 그러고 보니 소소의 요리가 그립긴 하구나.”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군침이 돌 지경이다.
그러나 우선은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사이, 흑호는 흐르는 군침을 닦아 내며 다시금 땅파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단단한 돌바닥을 맨손으로 파내려니, 살갗이 여기저기 벗겨져 보기만 해도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호는 열심히 땅을 팠다.
끼익.
그러는 사이, 돌연 뇌옥의 문이 열렸다.
흑영과 흑호는 흠칫 몸을 떨며 다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 갇힌 뒤 배식하는 이들조차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돌연 누군가가 들어왔다면, 그것은 흑영과 흑호의 목을 취하기 위함이 분명할 것이다.
“시벌…….”
흑호는 인상을 썼다.
뇌옥에 갇힌 뒤부터 어떻게 해서든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문 열리는 섬뜩한 소리가 귓전에 울리자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
죽음을 예감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전혀 다른,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쩡하네.”
상대가 흑의장포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순간부터 흑영과 흑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것을 입고 있는 이는 틀림없이 마존, 혹은 소교주일 터.
죄인인 그들은 얼굴을 쳐다보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꽤나 익숙했다.
흑호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어야 했다.
“어째 걱정하고 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지는군.”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탄이 섞여 있다.
나지막한 한숨마저 익숙한 목소리에, 지금껏 묵묵히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흑호가 힐끔 시선을 올려 상대를 바라봤다.
흑호의 시선이 발에서부터 몸통, 그리고 서서히 올라가 어느새 상대의 얼굴에 닿았다.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표정.
그러나 너무나도 익숙한 그 얼굴에, 흑호는 넋을 잃은 듯 입을 쩍 벌렸다.
“너, 너……?”
흑호는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이는 틀림없이 신유강이다.
신유강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흑호를 깔보는 듯한 눈빛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재수 없는 말투에 싸가지 엿 바꿔 먹은 행동거지는 틀림없이 신유강 본인이었다.
‘어째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 흑호가 저도 모르게 볼살을 꼬집었다. 찌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틀림없는 현실이다.
“뭘 그리 놀랍니까?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럼 인마! 내가 안 놀라게 생겼냐!?”
버럭 호통을 치는 흑호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전부터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던 흑영마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이윽고 익숙하다 못해 그간 눈에 선하게 그려졌던 신유강의 모습이 보이자, 흑영 또한 볼을 꼬집어 보며 이 상황이 현실임을 직시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귀신은 아니겠지?”
“총관 아저씨께서도 무슨 헛소리를 하십니까? 이제 집주인도 못 알아봅니까?”
“허, 허허…….”
흑영은 신유강과 진소소를 그리워한 나머지 환영이 나타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퉁명스러운 말투, 그 속에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신유강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환영 같은 것이 아닌 정말로 신유강이다.
“어째서 네가 이곳에…….”
흑영이 말끝을 흐리며 묻자 신유강은 싱긋 웃음을 지었다. 티 없이 깨끗한, 그 어떠한 의혹조차 날려 버릴 만큼 아름다운 웃음이다.
“구하러 왔죠. 왜? 싫습니까?”
흑영과 흑호가 어이없다는 미소를 보였다.
第二章. 사천풍운(四川風雲)
흑영과 흑호는 마존의 발아래 엎드려 있었다.
고개를 드는 것조차, 몸을 움찔거리는 것조차 불경스럽다는 듯, 그들은 땅에서 솟아난 바위처럼 그 자리에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떠올리는 것마저 황송스럽던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흐음…….”
황제가 앉는 옥좌와 버금가는 화려한 곳에 앉은 마존이 무료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조금도 흥미가 없다는 듯 무덤덤하고 무심한 눈빛이었기에, 오히려 곁에서 보고 있는 이들의 살이 떨려 올 지경이다.
배신자의 처벌을 결정하는 자리이긴 하나 수뇌부들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마존이 그들을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신유강과 흑영, 그리고 흑호가 전부였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로군.”
조용한 정적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는 살벌하기 그지없다. 이미 신유강과 거래를 끝냈다고는 하나, 교를 배신하고 나간 그들이 마음에 들 리 없는 것이다.
마존의 한마디에 흑영과 흑호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과거 흑영과 흑호가 상당히 높은 직위에 있었다고는 하나 그건 고작 일개대대(一介大隊)의 장에 지나지 않는다.
마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이리도 근거리에서 직접적으로 마존의 기세를 받은 것은 처음.
두 사람은 식은땀을 흘리며 거칠게 호흡했다.
머리로 숨을 쉰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잊어버릴 것만 같은 아득한 두려움이 전신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주인을 무는 개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것이 마교의 법칙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마존이 살벌하게 그들을 노려봤다.
심신(心身)을 옥죄는 한마디는 비수가 되어 흑호와 흑영의 심장에 날카롭게 꽂히는 것만 같았고,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두 사람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신유강이 힐끗 마존을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천마신공을 끌어 올린 그를 볼 때마다 전신의 회귀신공이 심하게 날뛰며 경종을 울렸다.
상대에 대한 두려움.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라 속삭이는 느낌.
신유강은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강자를 바라보며, 저 사람이야말로 이 강호의 중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마존의 입에서 느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용서를 해 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네놈들의 목숨은 본 마존에게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배신자로 낙인찍힌 이는 반드시 죽는다.
지금까지 그 법칙이 무너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존은 그들을 살려 준다 하고 있었다. 흑영은 어렴풋이 그 이유가 신유강에게 있음을 짐작했다.
쿵!
흑영이 바닥에 거세게 머리를 처박았다.
피와 살점이 튀어 올랐으나,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존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흑호 또한 머리를 땅에 찍으며 우람차게 대답했다.
십만마도 정점에 군림하는 천마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다. 하물며 흑영과 흑호 정도의 계급이라면 이리 지근거리에 있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마존을 이토록 근거리에서 배알했다. 그의 입에서 직접 용서한다는 말까지 나왔으니, 더 이상 마교를 두려워하며 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흑영과 흑호는 환희에 젖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심신을 가다듬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의 눈앞에는 십만마도의 하늘이 있는 것이다.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선심 썼다는 듯 말하는 마존을 보며 신유강은 그리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 아니다. 흑영과 흑호를 구하기 위해 마존과 한 거래는 왠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유강은 슬쩍 마존을 바라봤다.
당금 천하의 누가 있어 그의 상대가 될 수 있을까? 흔히 칠제(七帝)라 불리는 이들조차 마존의 상대는 아닐 것이다.
더욱이 천 년 전 천마의 기억을 온전히 이어받았으니 그야말로 천마 본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자.
한데 그렇다면 본인이 만들어 놓았던 천마도해의 위치를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마는 직접 찾으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신유강은 내내 꺼림칙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느냐?”
“딱히 없소.”
신유강은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마존과 관계되는 것은 약속한 천마도해를 찾는 것까지다. 그와 더 이상 깊게 연관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심정이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틀림없이 독이 될 자다.
신유강은 그리 판단했다.
“그럼 약속은 반드시 지키도록 하겠소.”
“호오, 벌써 떠나려 하는가?”
이미 신유강의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본 마존이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마교로 들어온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다.
객으로 초대한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마존의 이름을 생각하면 바로 등을 돌리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닐 터.
그러나 신유강은 단호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소. 이곳으로 급하게 오느라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으니, 하루 속히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흑영과 흑호가 눈앞에서 납치되는 것을 본 신유강은 진소소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길을 나섰다. 청랑에게 소소를 부탁하기는 했지만, 몇 달 동안 집을 비운 셈이니 아무래도 불안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마존의 눈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존 또한 그런 신유강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잠잠하나 정신을 잃은 황염이 깨어난다면 신유강에 대한 소문은 금세 퍼질 것이다.
능력이 부족하여 천마 위를 얻지 못한 부교주지만 그의 아들은 천재라 불려도 모자란 자.
신유강의 등장은 아마 부교주에게 상당한 자극이 될 것이다.
마존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럼 배웅은 하지 않겠다.”
* * *
“허억!”
부교주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마존에게 괜한 질문을 던졌던 황염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이곳은?”
“약전입니다, 황 대주.”
옆에서 들려오는 의원의 말에 황염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에 얻어맞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존의 성격이라면 자신이 죽었어도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