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살아 있다.
그것만으로 감지덕지다.
“지존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거처에 계신 것으로 압니다.”
“……함께 있던 소동은 어찌 되었느냐?”
현 마교에 소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교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탑으로 오른 그의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마존이 소동을 독차지, 혹은 죽인 것이 아니냐는 말 또한 은밀하게 돌고 있었다.
의원 또한 그 소리를 들었던지라 살짝 풀이 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동은 잘 모르겠으나, 지존의 객분들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갔다?”
황염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내시처럼 얇은 그의 목소리가 방 안으로 울려 퍼지자, 의원은 저도 모르게 파르르 몸을 떨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 말 그대로입니다. 저희 또한 소동의 소문을 듣고 의술의 자문을 구하고자 했으나, 지존의 거처는 물론 그 어떠한 곳에서도 소동을 찾지 못했습니다.”
의원은 매우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천하의 금의신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할 수 있었는데,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존에게 직접 묻지는 못하니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반면 황염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소동이 사라지고 대신 이상한 청년이 나타났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이.
그러나 적의를 가지고 마교에 침입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고, 그를 대하는 마존의 모습 또한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황염은 무언가가 번뜩 생각난 듯 소리쳤다.
“뇌, 뇌옥에 있던 죄수들은!?”
“소, 소인이 알기로는…… 개, 객분들과 함께 마교를 벗어나셨답니다. 이미 교 내에 파다한 소문이니 누구에게 물어보셔도 같은 대답을 할 겁니다.”
의원은 심장이 벌렁이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뇌옥에 있던 죄수들이 나갔다는 말을 하자마자 황염의 눈에서 시퍼런 광망이 번뜩였기 때문이다. 하기야 교를 배신하고 잡혀왔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살아 나갔으니 응당 놀랄 일이다.
황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흑영이나 흑호에 대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마존의 거처에 들어섰을 당시 보았던 그 청년.
그가 입고 있던 흑룡의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생생하여 지워지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빨리 부교주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 * *
온갖 소문이 오가는 곳이 바로 중원무림이라는 곳이다.
특히 신진고수(新進高手)의 등장은 어디를 가도 빠질 수 없는 이야기.
입으로 먹고 사는 호사가들에게 있어, 이는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라 할 수 있었다.
사천성 성도에 있는 기연객잔.
한 호사가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청해성에서 나타난 신진고수 둘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그들 중 한 명이 쌍무검제의 후인이라는 소리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그 쌍검룡 또한 십 초도 버티지 못하고 패배했습니다. 그 쌍검룡을 굴복시킨 자가 누구냐? 바로 정체조차 알려지지 않은 권룡! 권룡이라 하더이다!”
“오오, 정말 대단한 자인가 보군.”
“쌍무검제의 후인이라면 천하를 약속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자일 텐데 고작 십 초도 안 되는 사이에…… 놀랍군.”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렸다.
그들은 쌍검룡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쌍무검제가 누구인지는 아는 만큼, 칠제(七帝)의 제자인 쌍검룡을 우러러보는 것은 당연했다.
한데 그가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이에게 순식간에 당했다고 한다.
중원에 또 다른 고수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오히려 무림과 동떨어진 이들이기에, 그 비정하고 위험천만한 곳에 품고 있는 환상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 항상 찬물을 끼얹는 이는 있기 마련이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쌍검룡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고작 청해 낭인대회에서 이긴 것이 무에 대단하다고…….”
객잔 한쪽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모용후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곤륜에서 개최하는 무림대회는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명문가의 후기지수들은 그곳에 참석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할 정도로 초라한 무대인 데다, 출전하는 것은 고작해야 떠돌이 낭인들이다.
후기지수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당소혜가 출전하여도 충분히 우승을 거머쥘 정도로 수준이 낮다.
곤륜대회는 단순히 군소방파와 낭인들을 위한 대회다. 그런 곳에서 우승했다 하여 그자를 고수라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용후의 말에 호사가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 또한 모용후가 하는 말이니만큼 어느 정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에서 대회가 벌어지면 그 이야기가 사천까지 흘러드는 것은 매년 있는 일이지만, 사실 거기에 신경을 쓰는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다만 쌍검룡이라는 인재와 권룡에 대한 소문 탓에 조금 과하게 흥분한 것이다.
“찬물을 끼얹는 데 도가 텄네.”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진소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며칠 전부터 객잔을 찾아오던 호사가들이 후기지수들의 참견에 입을 다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입으로 먹고사는 호사가들은 객잔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간혹 호사가들이 뜸을 들이면 술과 안주들을 시켜 주기 때문이다.
한데 후기지수들 때문에 그러한 이득이 전부 날아가 버리니 진소소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용후나 제갈가후, 그리고 진자명이 객방을 잡으면서 상당한 양의 은자를 뱉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모, 저것들 내쫓는 게 낫지 않습니까?”
사모라 부르며 쪼르르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백호영준이다. 작은 촌에 복호문이라는, 문도가 한 명뿐이 없는 기괴한 문파의 문주답지 않게 점소이 복장이 참 잘 어울렸다.
물론 그렇게 옷을 입고 있다 하여 실제로 점소이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객잔 내에 산재한 잡다한 일을 도맡아서 하니 이제 와서는 없어선 안 될 이가 되었다.
슬쩍 백호영준을 본 진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강이 오면 알아서 내보내겠죠.”
신유강이 신강으로 떠난 지 어언 다섯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은 이상, 거리를 감안한다면 슬슬 돌아올 시기가 된 것이다.
진소소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객잔은 여전히 바쁘지만 무언가 휑한 느낌이 든다. 다섯 달이 넘었으니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신유강의 빈자리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과 당소혜가 몇 달 동안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 넓은 집에 혼자 있었다면, 그녀는 아마 외로움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에이, 빌어먹을!”
그런 생각을 하며 쓸쓸함을 느끼고 있었던 진소소의 귀에, 마치 흑호처럼 거칠게 말을 내뱉으며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등에는 두 자루의 검, 나이는 얼핏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있는 것이 한 성깔 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진소소는 또다시 골치 아픈 이가 들어온 것은 아닌가 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서 오세요. 자, 이쪽으로.”
다른 점소이들이 바쁜 탓에 결국 진소소가 직접 그 남자를 향해 말을 건넸다.
일 층의 빈자리로 안내해 주니 남자가 거칠게 자리에 앉았다.
“독한 화주 한 병하고 오리 구이.”
“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그다지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진소소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등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가 그녀를 붙잡았다.
“이봐, 계집. 혹시 신유강이라는 놈을 아는가?”
신유강이라는 말에 객잔에서 일하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남자를 향해 돌아갔다.
대부분 유강의 친구들이었고, 그중에는 청랑과 당소혜의 시선마저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남자가 꽤 당황했다.
“뭐, 뭐야? 내가 이상한 것이라도 물었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자를 무슨 일로 찾는 거죠?”
“그런 게 있으니 아는지 모르는지 그것만 말해 주면 고맙겠군.”
“물론 잘 알지요.”
진소소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객잔에 있는 이들 중 몇몇을 제외하면 신유강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호오? 그것 참 다행이군. 그럼 그자가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 주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런 걸 함부로 알려 주는 건 좀…….”
진소소는 싱긋 웃으며 거절했다.
눈앞의 사내가 신유강의 적인지, 혹은 백호영준과 같이 여행 중 친해진 사람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눈빛과 등에 차고 있는 두 자루의 검을 보아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굳이 나서서 설명해 줄 정도로 진소소의 성격은 좋지 않았다.
“좋아, 이것을 주지.”
탁!
남자는 탁자 위에 은자 한 냥을 올려놓았다. 고작해야 신유강의 위치를 묻는 질문 하나에 한 냥이라면 상당히 비싼 값을 치른 것이다.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진소소가 이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은자 한 냥을 손에 쥐었다.
“물론 신유강에 대해서는 잘 알죠. 아마 이 사천 바닥에서 저만큼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되네요.”
진소소는 그리 큰 흥미가 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녀가 쥐고 있던 은자를 휙 던지자, 그것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호야의 손에 쥐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은자를 던진 것이지만, 호야는 그녀가 자신에게 이 은자를 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진소소가 손님들에게 따로 돈을 받는 경우가 생기면 점소이들에게 틈틈이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호오, 무공을 익혔나 보군. 아니, 아니지.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그 신유강이라는 놈이 사천에서 제법 유명한가?”
“으흠…… 글쎄요. 나름대로 유명하기는 하죠.”
어린 나이에 사천십대거부 중 한 명이 되었고, 무공 또한 어느 정도 가능하며, 외모조차 뛰어나 근방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진소소에게 파리가 꼬이는 만큼 신유강에게도 꼬였다. 생각하니 또다시 불쾌한 기분에 휩싸인 진소소가 아미를 찌푸렸다.
“듣기로는 그놈이 객잔을 한다던데, 그럼 그 객잔이 어디인지도 알겠군.”
“풉!”
“쿡쿡.”
남자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신유강의 객잔에 들어와 그의 객잔을 찾는다 말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진소소 또한 상당히 웃기다는 듯, 소매 깃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모든 이들이 입을 쩍 벌리며 한동안 시선을 돌리지 못할 정도였다.
“뭐야!?”
남자는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쏘아봤다.
무인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비웃음을 머금었던 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객잔이 조용해지자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진소소를 올려다보았다.
한편 삼 층에서 진소소를 지켜보고 있던 몇몇 후기지수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이 나서지 않은 것은 진소소가 조용히 넘어가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객잔이라……. 물론이에요. 아주 잘 알고 있죠.”
방긋 미소를 지은 진소소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청해에서부터 사천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