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명문세가의 후기지수들이라면 또 모를까, 그가 가지고 있는 돈은 기껏해야 열하고 닷 냥 정도다.
신유강을 기다리면서 상당한 금액을 썼으니 곧 알거지 신세를 면치 못할 터.
이런 상황에 객잔에서 칼부림까지 했다가는 바가지를 써도 단단히 쓸 것이 분명하다.
도우겸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쓰면서 칼을 회수했다.
“의기양양한 천하의 쌍검룡 ‘소협’께서 아녀자의 한마디에 칼을 거두시는구려. 공처가가 되겠소이다.”
말을 내뱉은 것은 다름 아닌 진자명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코 칼을 거두려 하지 않았던 도우겸이 진소소의 한마디에 칼을 회수했으니, 그것을 빗대 비꼰 것이다.
또한 진소소와 도우겸이 마치 부부의 정을 나눈 것처럼도 들리는 말이었기에, 어찌 보면 진소소마저 깎아내리는 말이다.
그 때문인지 후기지수들 중 여인들이 쿡쿡 웃음을 지었다.
지난 동안 도우겸은 하루에 한 번씩 객잔을 찾아왔고, 그 이유가 무엇이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진소소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뭐 눈에는 뭐밖에 보이지 않는다더니 공자께서 딱 그 짝이시오.”
눈살을 찌푸린 진소소가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 그보다 먼저 말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백호영준이었다.
진소소에 대한 나쁜 말을 들은 탓인지 그의 눈빛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진자명을 향해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를 기세였다.
그러나 진자명은 백호영준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고작해야 객잔 종놈 따위다. 뭐라 한들 개가 짖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진자명은 여전히 백호영준을 무시한 채 도우겸을 바라봤다.
“어떻소이까? 지금 이 자리에서 한판 어울려 보시겠습니까?”
“밖으로 나와라, 네놈!”
“하하하! 왜 이러시오? 설마 부서진 값을 치르지 못하여 밖에서 어울리자는 소리오? 천하의 쌍무검제의 진전을 이었다는 분께서 참으로 한심하시오.”
“당신이 더 한심하네요.”
백호영준이 진자명을 바라보며 이를 갈고 있자, 결국 참다못한 진소소가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결국 지던 이기던 간에, 진자명이 도우겸을 엿 먹이려 하고 있다는 의도가 너무 빤히 보였다.
그러나 진자명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그 말을 받아넘겼다.
“오호……. 소저, 지금 낭군을 감싸시는 겁니까? 하하하하!”
진자명의 행동은 누가 봐도 눈살을 찌푸릴 만했다. 하지만 그의 뒤를 받쳐 주는 가문이 하북진가인지라 섣불리 나서는 이가 없었다.
모용후는 물론 제갈가후마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진자명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 주는 예였다.
결국 참다못한 당소혜가 욱하며 소리를 쳤다.
“웃기지 마세요! 언니한테는 저런 사람보다 더 대단한 연인이 있다고요!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요? 저런 쓰레기와 우리 언니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나름대로 진소소를 감싸주려 나선 당소혜였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도우겸을 쓰레기 취급하는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도우겸의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졌다.
“당 소저, 내가 이곳에서 머문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저 여인의 부군되는 이를 본 적이 없소. 아니, 그보다 이곳에 오는 대부분 남자들이 저 여인을 노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소?”
“이익! 진 소협께서 말이 심하시네요!”
“진 소협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요.”
한때 진소소에게 깨졌던 언미연 또한 한껏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은근슬쩍 당소혜를 바라보는 눈빛은, 사람을 무시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의 그것이었다.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후후…….”
“뭐, 뭐라고!?”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은 과거 당소혜가 후기지수들에게 꼬리를 쳤던 일을 되짚는 말이었다.
즉, 객잔을 운영하는 진소소 또한 그러하다 빗대어 말한 것이다.
잔뜩 얼굴을 붉힌 당소혜가 앙칼지게 눈을 치켜떴다.
옆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호영준 또한 울화가 치민다는 듯, 게슴츠레 눈을 치뜨며 그들을 바라봤다.
순간 눈동자가 붉어졌으나, 다행히 객잔 현 상황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죽여 버리겠어!”
어리숙한 성정을 지니고 있는 당소혜였지만, 이 정도로 직접적인 욕을 알아듣지 못할 만큼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소검(小劍)이 뽑혀 있었고, 흉흉한 기세는 당장이라도 바닥을 박차고 언미연을 향해 몸을 날릴 듯했다.
그러나 당소혜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말 꼬랑지처럼 뒤로 묶어 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던 탓이다.
“아악!”
“너는 가만히 좀 있어라. 왜 그렇게 성격이 지랄 방정이냐? 그러니까 여기저기 차이고 다니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객잔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진소소는 물론 백호영준, 도우겸과 당소혜마저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신유강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언미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 유강!?”
진소소는 너무 놀라 당황을 금치 못했다.
누군가 객잔으로 들어오는 기척은 느끼고 있었지만, 언미연의 발언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탓에 미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신유강이었다니!?
진소소는 너무 놀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하. 소소, 오랜만이군. 몇 달 안 봤는데 더 예뻐졌어.”
그저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신유강은 진심으로 그리 말했다.
몇 달 만에 본 진소소는 한층 더 아름다워져서,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신유강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숨을 골랐다.
“놔, 놔!”
그때까지도 당소혜는 신유강에게 머리카락을 붙잡혀 있었다.
벗어나려 아등바등 몸을 움직이는 당소혜의 모습은 어찌 보면 강아지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게 재미있었는지, 신유강은 몇 차례 더 그녀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꾹꾹!
“아아악! 야!”
“아하하!”
신유강은 무척이나 즐거운 듯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태평스럽기 짝이 없는 그의 행동은 위화감 가득했던 객잔의 분위기를 정반대로 바꿔 버렸다.
어느덧 단골들이 한껏 목청을 젖히며 웃었다.
과연 기연객잔이라면 이러한 맛이 있어야 하지 않던가.
신유강은 그제야 당소혜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진자명과 언미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그쪽 분들은 누구시오?”
“예의가 없군요. 그러는 당신은 누구신가요?”
언미연은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후기지수들 중 가장 잘생겼다는 제갈가후나 진자명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다.
그 때문인지 당소혜에게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기묘한 감정이 치솟았을 정도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언미연을 보며 당소혜가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보란 듯이 신유강에게 착 달라붙고 싶은 당소혜였으나, 옆에서 게슴츠레 눈을 흘기는 진소소 때문에 그저 바람으로 그쳐야 했다.
“이 객잔의 주인인 신유강이라 하오. 그래서 그쪽은?”
“진주언가의 언미연이라 해요.”
“하북진가의 진자명이다.”
진주언가라는 부분에서 이들이 후기지수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북진가라는 이름이 나왔다.
신유강이 슬쩍 시선을 돌려 당소혜를 쳐다봤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싸늘한 눈빛이었다.
“어, 어쩔 수 없었어! 나도 몰랐으니까.”
“됐다. 너한테 뭘 기대한 내가 바보지.”
진소소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둘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대강 짐작된 것이다.
아마도 신유강이 당소혜에게 신신당부했을 테지만, 애초에 저 어설픈 당소혜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군. 그럼 묻겠소. 천하 명문 팔대세가의 자제분들께서, 왜 남의 객잔에서 돼먹지 않은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오?”
“소문이라니? 딱히 틀린 말은 한 것 같지 않은데?”
언미연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진자명이 검미를 찌푸리며 나섰다.
무공이라고는 반 초식도 익힌 것 같아 보이지 않은 자가, 이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말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내심 기분이 나쁜 것이다.
“하북진가의…… 진자명 소협이라 하셨소?”
“그렇다.”
“뒤지고 싶소?”
신유강의 한마디는 객잔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당소혜는 입을 쩍 벌렸고, 진소소 또한 당황을 금치 못했다.
흑호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 신유강의 입에서 나왔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놈! 죽고 싶으냐!”
진자명이 강한 살기를 뿜어내며 신유강을 쏘아봤다.
태어나서 지금처럼 열받은 적이 없었다.
가뜩이나 이곳 객잔의 여주인인 진소소는, 과거 하북진가에 있던 본처의 딸과 이름이 비슷하여 자꾸 눈에 거슬렸다.
그런 소소에게 진 것도 억울한데, 이번에는 그년의 남자까지 나서서 자신을 욕보이니 울화통이 터져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일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이놈! 이제야 만나는구나!”
지금까지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도우겸이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등에 차고 있던 쌍검을 뽑아 든 그가 강한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 대며 입꼬리를 말았다.
신유강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이놈! 청해에서의 일을 잊었다 할 셈이냐?”
“청해? 그러고 보니 낯이 익군. 혹 나에게 돈 빌려 간 적 있소?”
“이, 이 자식이!”
파각!
도우겸은 날뛰며 방해가 되는 탁자를 발로 쳤다. 순간 진소소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으나, 지금의 도우겸에게는 그것을 볼 여유가 없었다.
“청해에서 이 몸과 손을 섞은 것을 잊어버린 것이냐!”
그러나 신유강은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음을 삼켰다.
“죄송하오 정말로 기억이 안 나오.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신유강이 히죽 웃으며 되물었다.
그것은 완벽히 기억을 하고 있는 사람의 눈빛인지라, 도우겸도 신유강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눈치챘다.
“청해에서의 수모, 이 자리에서 갚아 주마.”
“글쎄, 그런 적이 없다니까.”
한편, 둘의 대화를 들으며 사람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후기지수들 역시 마찬가지다.
청해에서 쌍검룡이 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다.
그 상대가 누구던가?
신진권룡(新進拳龍)이라 불리는 고수로,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다.
그런데 지금 도우겸의 말을 듣자니 눈앞에 있는 신유강이 바로 그 신진권룡인 것 같지 않은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해할 수 없었던 당소혜가 결국 조심스레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신유강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저기 유강……. 혹시, 네가 권룡이니?”
“권룡?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애초에 신유강이 그러한 소문을 알 리가 없다. 당시 도우겸을 일방적으로 두들길 때, 사람들이 무언가 환호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을 쓸 만큼 세심하지 못한 탓이다.
당소혜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신유강의 표정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명문세가 출신의 자신조차 별호를 가지지 못했는데, 신유강이 앞서 그것을 가졌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후기지수들 또한 대부분 그 생각을 부정하는 눈치였다.
쌍검룡 도우겸은 진자명과 비슷하거나 그 우위에 자리한 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