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크흠…….”
“험험…….”
흑영과 흑호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웃는 낯짝으로 사람을 더럽게 깐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연무는 물론이죠. 그리고 가능하다면 집안 식구를 조금 더 받아야 겠어요.”
“집안 식구?”
집안 식구라는 말에 신유강은 벙찐 표정을 지었고, 흑영과 흑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결코 평범한 이를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느 정도 세력과 힘을 가진 사람. 으음, 그러네요. ……당소혜 정도면 되려나?”
“자, 잠깐! 설마 장원에 정파의 개들을 풀어놓을 생각은 아니겠지?”
흑호가 어이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진소소를 다그쳤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갈 생각이 가득한 진소소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하죠. 어떤 분들 때문에 우리 유강이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주…….”
“찬성이다.”
싱글싱글 웃음을 지으며 소소가 고사리 같은 주먹을 들어올리자 흑영은 식은땀을 흘리며 찬성했다. 순간 흑호의 시선이 맹렬하게 돌아갔으나, 흑영은 말을 바꿀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반대다!”
“왜요?”
“이래 봬도 난 마교인이야. 그런데 내 영역에서 정파의 개들이 돌아다녀? 어찌 되겠어? 당장 눈구멍에 칼을 박아 넣어 버리고 싶을 거라고!”
“참으면 되겠네요.”
진소소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애초에 지금까지 당소혜와는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고 있지 않은가.
“물론 꼭 정파인들이란 기준은 아니에요. 실력만 괜찮으면 누구든 상관없어요.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지만…… 그건 제가 알아서 하죠.”
“도대체 갑자기 객식구를 왜 늘리려는 거지?”
신유강 또한 어느 정도 짐작을 하는 바가 있기는 했으나, 칠 년 동안 네 사람이서 생활하다 객식구를 늘려야 한다고 하니 괜스레 거부감이 들었다.
“어떤 분 때문에 장원이 너무 넓어서 한기가 들 정도에요.”
“크큼!”
흑영이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무관은 곧 완성 직전이고, 무인들이 더 많이 들어올 것은 분명하니,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우리는 이 정도이니 건들지 마라, 하고 시위할 정도는 되어야 해요.”
진소소는 진자명을 떠올렸다.
아직까지 조용히 있기는 하지만, 무관이 들어서고 하북진가 쪽에서 사람들이 오기 시작한다면 틀림없이 진소소나 신유강에게 시비를 걸어올 것이 분명하다.
“확실히 납득할 만한 일이군. 하지만 당 소저는 어차피 무관에 입관할 테니 소용없지 않나?”
“아니, 소혜는 들어가지 않아요.”
당소혜가 입관하지 않는다는 말에 신유강은 두 눈을 껌뻑였다.
“그 녀석 실력이라면 들어가서 죽도록 배워야 할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쯧쯧.”
만약 당소혜가 이곳에 있었다면 신유강의 멱살을 잡았을 신랄한 한마디다. 진소소는 거침없이 쏘아 대는 신유강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여전히 당소혜에게는 가차 없다.
“소혜를 대신해서 백문 공자가 들어간다나 봐요.”
당백문.
당소혜보다 네 살 위의 오라비로 당가의 후계자나 다름이 없는 이다. 상당한 실력을 자랑하는 데다 얼굴 또한 준수하여,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명망이 있다.
“하긴 그 녀석이라면 들어갈 만하지.”
“그 녀석이라니? 네놈보다 나이가 많지 않던가?”
당소혜가 신유강보다 한 살 나이가 많으니 당백문과는 다섯 살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유강이 서슴없이 그 녀석이라는 것을 보며, 흑호는 살짝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지금까지 당소혜를 제외하면 누군가를 그러한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섯 살 많았나? 흑호는 모르겠지만 몇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이도 꽤 좋아요.”
사이가 좋다는 말에 진소소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당백문은 한때 진소소를 열렬히 사모하는 입장이었다. 수련을 하는 와중에도 간간히 객잔에 얼굴을 들이밀며 진소소에게 꼬시려 했는데, 한번 신유강에게 된통 걸려 죽도록 얻어맞은 사건이 있었다.
그 뒤로 객잔에 찾아오지 않았지만, 간간히 신유강을 만날 때마다 당백문은 그야말로 호랑이 앞의 쥐새끼처럼 벌벌 떠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어찌보면 남궁상과 비슷한 입장인 것이다.
흑영은 신유강의 표정과 진소소의 붉어진 얼굴을 바라보며, 대강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한 명은 당 소저로 결정한다 치고 다른 이들은 어찌할 거지? 아까 그 소녀인가? 나이는 어리지만 상당한 자질이 있더군.”
흑영은 지근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랑의 기척을 알아내지 못했다. 은신 능력에 있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여겼던 그의 자존심을 철저하게 뭉개는 수준이다.
마음먹고 키운다면 천하제일살수가 따로 없을 것이다.
“청랑 쪽은 잘 모르겠네요. 그건 저보다 유강이 알아서 해야 할 이지만, 물론 우리 쪽으로 와 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진소소는 매정한 시선을 신유강에게 던졌다.
마치 그런 소녀를 어디서 홀렸느냐, 라고 질문하는 것 같았기에, 신유강은 저도 모르게 큼큼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럼 나머지는?”
“차차 알아봐야죠. 장원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고 능력이 좋은 이들.”
“명문세가라도 만들 심산인가?”
흑영은 살짝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 정도 사람들이 모인다면 팔대세가 부럽지 않은 대단한 세를 자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이없다는 듯 말을 한 흑영과 달리, 진소소는 그 아름다운 얼굴로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답이네요.”
第五章. 흡혈마공(吸血魔功)
아침을 마치고 신유강이 객잔으로 들어서자 우레와도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워낙 갑작스런 일인지라 너무 놀란 신유강이 어벙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사천에서 본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네놈이 해낼 줄 알았다. 설마하니 그 정도 실력을 지녔을 줄이야. 하하하!”
“이제 도박이나 하는 쓰레기가 아니라, 권룡이라 불러야겠어.”
여기저기 엄지를 치켜세우며 사람들은 뿌듯함을 금치 못했다. 어려서부터 보았던 신유강이, 이제는 중원에서 알아주는 별호를 얻은 무인(武人)이 된 것이다.
물론 사천에 무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 턱이 높고 함부로 말을 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이들이었는데, 신유강은 마치 부모의 심정, 혹은 친구라는 점에서 더욱 뿌듯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유강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꾸벅꾸벅 예를 다했다.
그것이 그리 좋아할 만한 일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 했으나, 사람들이 워낙 난리를 피우자 어쩔 수 없이 분위기를 타는 것이다.
“자자, 너무 우리 유강을 괴롭히지 마시고 밥이나 드세요.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다고요.”
결국 보다 못한 진소소가 상황을 정리하려 나서자 사람들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낭군을 지키려는 여인처럼 필사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약 이각 정도가 되서야 겨우 분위기를 진정시킬 수 있었고, 신유강은 사람들 손을 벗어나 평온을 얻을 수 있었다.
“……저기, 할 말이 있습니다.”
한차례 폭풍이 가시고 탁자를 정리하고 있는 신유강의 곁에,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청랑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마치 진소소나 당소혜의 눈치를 살피듯 여기저기 눈알을 굴리고 있는 그 모습은, 고양이 새끼처럼 귀엽기 짝이 없다.
신유강은 걸레질을 멈추고 청랑을 바라봤다.
그러나 눈빛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홍화에 대한 기억때문이다. 그것이 그리 좋지 않은 탓에 자연스레 그녀를 대하는 것 또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지난번 약속 잊지 않으셨지요?”
“아, 홍화의 이야기인가? 그 녀석 아직도 살아 있나?”
툭 하고 말을 내뱉은 소리에 청랑의 기가 죽었다.
순간 무언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신유강이작게 한숨을 내쉬며 슬쩍 몸을 틀어 청랑을 마주 보았다.
“홍화에게는 오늘 저녁에 가도록 하지.”
“아니, 그게…….”
청랑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런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홍화는 현재 사천 하오문에 있지 않다.
윗선에서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하오문에서 쫓아냈고, 결국에는 그 종적마저 사라진 탓이다.
아마도 홍화를 견제하고 있었던 무리들이 혹시나 그녀의 정신이 온전해지는 것을 경계하여 처리한 것이 분명했다.
홍화를 지키고 있어야 함이 마땅했던 청랑은 그 죄책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물론 신유강과의 약속 또한 소중하나, 홍화는 청랑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가족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그 약속은 없었던 것으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홍화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군.”
신유강의 말에 청랑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것을 본다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강 눈치챘을 것이다.
신유강은 홧김에 저지른 일로 사람이 하나 죽었다는 것에 씁쓸함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녀가 하려 했던 행동에 비한다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너는 어쩔 거지? 원래부터 하오문 문도였으니 돌아갈 생각인가?”
청랑은 할 말이 없었다.
하오문에서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홍화뿐이다.
또한 그녀 외에 다른 이의 시중을 드는 것 또한 그리 내키지 않는 상황.
또한 청랑이 지금 신유강에게 말을 건넨 것은 당시의 약속을 잊어 달라는 한마디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객잔에서 나가야 될 것 같은 상황이 온 것이다.
애초에 홍화의 옆이 아니면 청랑은 갈 곳이 없다.
실력이 있으니만큼 살수 단체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더듬거리며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 지금까지 조심스레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진소소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뭐해요. 안 치우고?”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신유강이 아닌 청랑이다.
대뜸 다가와 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질책에, 청랑이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진소소의 실력이라면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한 달 은자 스무 냥씩 주는데 농땡이 피우면 확! 쫓아내 버릴 거예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그 한 마디에 청랑이 힐끗 신유강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급히 등을 돌린 청랑은 열심히 탁자를 치우기 시작했다. 작디작은 몸으로 쫄래쫄래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운 새끼 고양이 같다.
“결국 원하는 객식구를 하나 얻었군.”
“호호, 무슨 소리에요. 저는 그저 일하라고 다그친 것뿐이에요.”
잡아떼는 것마저 일류급인 진소소는 정말이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여인이다.
신유강은 싱긋 웃음을 짓다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번뜩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객식구로 들일 놈들도 있지 않았나?”
“아아…….”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진소소는 단박에 눈치챘다. 저기 한쪽에서 작은 몸으로 열심히 음식을 나르는 점소이 호야와, 밖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장작을 패고 있는 백호영준일 것이다.
그러나 진소소는 곧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