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또다시 한숨을 내쉰 당소혜는 더욱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주위로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하여,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이이!
이어 세찬 바람이 한 차례 전신을 스치고 지나가자, 당소혜는 저도 모르게 파르르 몸을 떨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소소의 말을 받아들여 장원에서 하룻밤 묵는 것이 마음 편했을 것이다.
아니, 만약 신유강이 겁쟁이라 약을 올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나쁜 놈!”
퍽퍽!
당소혜는 가던 길을 멈추고 지면을 걷어찼다. 울분을 쏟아 낼 곳이 달리 없었기에 하는 행동이다.
“나쁜 놈! 개자식!”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결코 명문가의 여식이 할 법한 소리가 아니었으나, 울화가 치민 그녀의 입에서 나오지 못할 말 또한 없어 보였다.
스륵-!
그때,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
당소혜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이 찌릿찌릿 울리며 경고를 하는 듯했다.
당소혜는 휙 하고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짙은 안개뿐이다.
손에는 어느새 자그마한 비도 세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여차하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극성의 내력을 담아 던질 듯한 기세다.
스륵!
또다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기척은 확연하게 느껴진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무인의 감각이 또다시 곤두섰다.
그러나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움직일 때를 제외하고는 일말의 기세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당소혜는 마른침을 삼켰다.
큰일 났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오로지 그것 하나다.
이 야밤에 누군가 쫓아온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당가에서 나온 이들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것이 결코 아님을 깨닫고 있었다.
혹시 신유강이 자신을 놀리려 하는 것인가?
당소혜는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살기(殺氣)다.
이 찌릿찌릿한 감각은 틀림없이 살기였다.
신유강이 당소혜를 놀리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러한 살기까지 뿜어내는 이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스륵!
또다시 움직이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당소혜는 매섭게 비도를 던졌다.
퍽퍽!
세 자루의 비도가 꽂히는 소리가 참으로 우람차다.
만약 사람이 맞았다면 그 몸을 꿰뚫고 나갔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당소혜는 그것이 빗나갔음을 깨닫고, 다시금 비도를 꺼냈다.
스륵!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싶더니, 순간 안개를 뚫고 검은 인영이 그녀를 향해 매섭게 짓쳐 들었다.
촤악!
붉은 혈선이 허공을 가르며 아슬아슬하게 당소혜의 앞섶을 스쳤다.
당소혜는 놀란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머뭇거리고 있는 인영을 향해 매섭게 비도를 휘둘렀다.
극독이 발려 있는 비도다.
조금이라도 베인다면 틀림없이 죽는다.
캉! 캉! 캉캉!
그러나 그것들은 여지없이 막혔다.
인영의 모습이 순간 흐릿해지기 시작하더니, 곧 발아래에서 섬뜩한 느낌이 느껴졌다.
당소혜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빼며 비도를 던졌다.
캉캉캉!
세 자루의 비도가 무언가에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윽…….’
당소혜는 낭패스런 모습이 역력했다.
상대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배 이상 강했다. 더욱이 안개 때문에 시야 확보가 되지 않으니, 그나마 특기라 할 수 있는 비도술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
“누구야!”
억울하다는 듯 앙칼지게 소리를 내지른 당소혜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왼손에는 두 자루의 비도를, 오른손에는 소검을 꺼내 들고 있었지만,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죽는다.
당소혜는 그리 생각했다.
흡혈광마에게 죽은 이들처럼, 모든 내공을 빼앗긴 채 미라처럼 말라 죽을 것이다. 그러한 꼴을 부모와 친지들에게, 또는 진소소와 신유강에게 보여진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지경이다.
서걱!
“으윽!”
보이지 않게 다가온 무언가가 발을 노렸다.
마치 칼에 베인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며 전신이 휘청였다.
그 순간을 노렸던 것인가?
붉은 눈동자를 가진 인영이 히죽 웃으며 오른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다…….”
들려오는 말은 섬뜩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인간의 목소리인가?
가래 끊는 소리보다 더한 울림.
전신이 오싹해지며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은 그러한 느낌이다.
당소혜는 절망감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
텁!
이윽고 인영의 손이 그녀의 단전 쪽에 얹혀졌다.
그와 동시에 온몸의 힘이 빠지며, 전신을 뒤트는 충격이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당소혜는 괴성을 내질렀다.
죽는다.
틀림없이 죽는다.
단전에서부터 내공이 빠져나가는 더러운 느낌.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에게 손을 허락한 역겨운 느낌.
그와 동시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 보이는 죽음의 그림자는 그녀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있지, 얌전히 손을 놓으면 목숨 정도는 살려 줄 생각이 있는데 어찌하겠어?”
그 목소리는 마치 구원과도 같다.
“……!”
당소혜의 내공을 흡수하고 있었던 인영이 흠칫 놀라 몸을 틀었다.
쾅!
동시에 거친 소리가 들리며 인영의 몸이 붕 떠 저만치 날아갔다.
콰당!
벽에 부딪힌 인영의 몸이 벽면을 부수고 처박혔다. 강한 충격을 받은 듯, 인영이 울컥 붉은 피를 토해 내며 괴성을 내질렀다.
“끄아아악!”
인영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쉼 없이 울부짖었다.
사람의 내공을 흡수하기 시작한 뒤부터 이러한 고통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상대의 내공과 생기마저 흡수하여 자신의 내공으로 만든 후 그것으로 몸을 보호하니, 금강불괴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뭔가?
모든 내공이 흩어지며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전신을 자극했다.
“웃기는 놈이군.”
신유강은 안개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인영이 처박혀 있는 벽면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말투는 한기를 머금은 것처럼 싸늘하기 그지없다.
북풍한설이라 말해야 옳을 정도.
신유강은 당장이라도 손을 쓸 것처럼 저벅저벅 인영을 향해 다가갔다.
서서히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상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다.
돌연 발밑으로부터 무언가가 매섭게 휘둘러졌다.
서걱!
“큭!”
무언가가 확연하게 몸속으로 파고드는 역겨운 느낌에, 신유강은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움직였다.
퍼걱!
분명히 상대를 걷어찼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괴물인 것인지 일말의 신음성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신유강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이놈은 위험하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명줄을 끊어 놓지 않는다면, 훗날 더욱 위험한 적이 되어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이다.
쾅!
그가 인영이 있던 장소로 매섭게 권을 휘두르자 벽면이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튀어 오르며 안개보다 더욱 짙게 시야를 가렸다.
그러나 느낌이 없다.
“도망쳤군.”
신유강은 쯧 하며 혀를 찼다.
일말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당소혜가 붙잡혀 있지만 않았다면 귀(歸)에 힘을 쏟아 잡았을 수도 있었지만, 워낙 상황이 급박했던 탓에 당장 떼 놓는 것에만 급급했다.
덕분에 이 꼴이다.
신유강은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당소혜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몰골로 힘겹게 호흡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잠깐이긴 하지만 상당히 많은 양의 생기와 내공을 빼앗겼는지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생기발랄했던 당소혜는 이미 없다.
이야기로 들었던 미라와 같은 몰골은 아니지만, 그것과 비슷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기지수들을 떼어 놓고 온 것은 정답이었다.
“후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신유강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第七章. 지부작족(知斧斫足)
“엉엉.”
당소혜는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두렵기 짝이 없었던 그 자리에서 생명의 은인인 신유강의 품에 파묻혀, 눈물 콧물을 질질 짜내며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찌나 안쓰러운지 신유강 또한 차마 단호하게 떼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 울어라.”
“그, 그치만……. 으…… 으아아앙!”
“죽은 것도 아니고 죽을 뻔한 일 가지고…….”
“으아아앙!”
“무인은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걸고 산다잖냐. 너는 무인이니까 이 정도 일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야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라는 말에 당소혜는 더욱더 신유강의 품에 파고들며 눈물을 짰다. 작고 고운 손이 그의 옷깃을 강하게 부여잡고 있었는데, 마치 결코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생명줄을 부여잡고 있다는 느낌이다.
신유강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으아아앙! 나…… 나…… 흐…… 흐흐흑……! 무인 따위 안 할래. 엉엉!”
지금까지 생명의 위기라는 것을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었던 당소혜에게 있어, 지금 있었던 일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으며,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당소혜는 신유강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것이 어찌나 가엽고 안쓰럽던지, 신유강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다, 당 소저, 괜찮으시오?”
신유강과 함께 마을 순시를 돌고 있던 후기지수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돌연 들리는 비명 소리를 알아챈 것은 진자명이 먼저였으나, 신유강의 신법은 그보다 몇 배나 빨랐다.
그러나 그것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다.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잔뜩 움츠러든 당소혜를 어떻게 해서든 안정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신유강의 품에서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궁상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봐야 했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제갈가후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지금은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게나.”
“그…… 그러지.”
남궁상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질투 같은 것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느낀 것이다.
천하의 팔대세가, 그것도 사천당가의 금지옥엽에게 손을 댈 정도로 대담무쌍한 흡혈광마를 조금이라도 빨리 잡아들여야 한다.
“당 소저. 말할 기분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혹여 소저를 습격한 것이 흡혈광마였소?”
제갈가후의 질문에 당소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유강의 품에 깊이 파묻혀 있으나, 그 작은 끄덕임을 보지 못한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때문인가?
지금까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진자명이 다급하게 한 발 앞으로 다서며 당소혜를 재촉했다.
“얼굴을 보았소?”
“……안개 때문에…….”
흡혈광마에 대한 그 어떤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당소혜의 입에서 나올 말들은, 어쩌면 흡혈광마를 잡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사천당과와 아미파, 그리고 청성파마저 나서고 있는 이 일을 먼저 해결할 수만 있다면 기천검 진자명의 위명은 권룡을 누를 것이다.
그러나 당소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안개가 짙게 끼인 상황인 데다 상대가 워낙 빨랐던 탓에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생전 처음으로 겪는 죽음의 공포에 공황 상태와도 같았으니, 기억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