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호오…… 별의별 꾀를 다 내는군.”
“……!”
순간 백호영준과 호야는 잔뜩 얼굴을 굳히며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조차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둘을 둘러싸고 있었다.
“누구……!”
당황한 백호영준이 잽싸게 입을 여는 그 순간, 흑의인 중 한 명이 몸을 움직였다.
그의 발이 번개처럼 움직여 백호영준의 턱을 가격했다.
빠악!
“커억!”
“도망갈 생각은 물론이고, 함부로 입을 열지도 말거라. 마음 같아선 네놈들을 죽이고 싶지만 내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니.”
백호영준과 호야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삼 갑자라는 어마어마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백호영준이지만, 조금 전 턱을 얻어맞은 그 순간부터 저항을 완벽하게 포기해 버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은 빠르기다.
아무리 강한 내공을 가지고 있다 한들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백호영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기회를 엿봐야만 했다.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려 단 한 방이라도 맞춘다면 틀림없이 저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의인들은 결코 멍청하지 않다.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히죽 웃음을 짓는 그 순간, 흑의인들이 순식간에 몸을 날리며 백호영준과 호야를 제압했다.
“으악!”
“커컥!”
“쓸데없는 잔머리 굴리지 마라. 네놈의 생각 따위 훤히 들여다보이니.”
“누…… 누구시오…….”
“나는 율초언이라 한다.”
“나, 나는 당신을 모르오.”
“하하하, 적호대라고 하면 알겠나? 이래 봬도 그곳의 대주를 맡고 있는 몸이다.”
적호대라는 말에 백호영준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 단체를 모르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대천산을 장악하고 있는 천산마교의 칠대무력단체 중 한 곳이니만큼, 무공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조차 그 이름을 들어 봤을 정도다.
“대, 대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비…… 비급이라면 이미 신유강의 손에…….”
“그따위 저급한 비급은 필요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네놈들을 온전히 마교로 데리고 가는 것뿐이지.”
“마…… 마교?”
“영광이라 생각해라 쓰레기들. 부교주께서 친히 네놈들을 잡아 오라 하셨으니.”
“부, 부교주…….”
율초언은 기실 이번 임무가 영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마인이라 불리는 그들이지만, 흡혈광마처럼 무인의 자긍심조차 없는 짓 따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부교주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들을 잡아 오라 명을 내렸다.
율초언은 더욱 험악하게 표정을 구겼다.
‘마존의 명은 신유강의 감시……. 부교주의 명은 이들의 포획…….’
절대자와 그 옆을 보좌하는 이의 명령이 따로 내려왔다.
더욱이 적호대가 마존의 명령을 받고 사천에 와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교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하…… 부교주! 드디어 칼을 뽑으려 하시오?’
부교주는 지금 율초언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곧 있으면 교주의 직위가 바뀔 것이다.
소교주였던 이가 드디어 천마 위에 오를 것이니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새로 등극한 교주의 자리를 굳건하게 굳히려 하는 것일터다.
또한 마존의 명령을 받고 있는 율초언에게 명령은 내린 이유는, 아직까지 굳건하기 짝이 없는 마존의 권력을 흔들 속셈인 것이다.
율초언은 혀를 찬 후, 또르르 눈을 굴리고 있는 백호영준과 호야를 번갈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해를 끼치지는 않을 테니 머리 굴리지 말거라. 네놈들의 잔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율초언은 히죽 웃었다.
* * *
한동안 장원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신유강은 어느새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침상에 몸을 눕혔다.
최근 들어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터진 탓에, 이렇게 홀로 태평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의 일이다.
청랑을 시작으로 율초언, 그리고 백호영준과 호야.
또 누군가 있었던 것 같았으나 잘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넘어가고, 이어 황염이나 마존을 만나면서, 그리고 신강에서 이곳까지.
마치 한평생 인생에서 겪어야 할 모든 일들을 이 짧은 몇 개월 안에 다 겪은 것만 같았다.
물론 따지고 보자면 회귀를 하던 시기가 더욱 힘들고 죽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하아아…….”
신유강은 푹 한숨을 내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눕히고 싶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천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장본인들.
그들을 찾아내지 않는 이상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신유강은 당소혜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참하기 그지없는 몰골로 죽어 가던 당시의 일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울컥하며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만약 그럴 리는 없겠지만 진소소가 그리되었다면?
신유강은 아마 미쳐 날뛰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에 숨었을까.”
아무리 넓다고는 하지만 일개 성도.
용모파기가 뿌려진 시점에서 소란조차 피우지 않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틀림없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이 장원이나 객잔 후원 어딘가에 숨은 것은 아닌가 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도 쉬이 발견되지 않는 곳.
그리고 안전하게 몸을 쉴 수 있으며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곳.
신유강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갔다.
‘응?’
그러고 보니 한 곳 있지 않은가.
그곳이라면 그야말로 등하불명(燈下不明). 더욱이 낭인이나 당가, 혹은 청성과 아미조차 생각지 않을 곳이 말이다.
벌컥!
신유강은 왜 그곳을 지금에서야 떠올렸는지 의아해 하며 방을 나섰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진소소가 당소혜와 함께 쓰고 있는 방이다.
본래 당소혜의 방은 다른 곳에 따로 준비되어 있었으나, 이틀 전 일 때문인지 당소혜는 진소소의 곁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둘이서 함께 지내고 있는 셈이다.
신유강은 거침없이 걸어 그곳으로 향했다.
시간은 술시(戌時)가 다 되어 가고 있었기에, 안에서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왔다.
신유강은 아무런 생각 없이 문을 벌컥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당소혜와 청랑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신유강을 바라봤다.
다만 진소소는 이미 신유강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는 듯,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맞이해 주었다.
“어머, 지금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잠깐 할 말이 있어서.”
진소소의 웃음 때문인지 신유강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지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영 못마땅한 눈치이기 때문이다.
웃고는 있어도 말투가 그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신유강은 애써 담담하게 진소소의 눈빛을 받아넘기며, 침상에 벌러덩 누워 있는 당소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희 집 앞에 있던 그…… 폐가 알지?”
“아, 그 안 쓰는 땅 말이지? 물론 알지. 원래는 독초 재배를 하고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안쪽으로 모두 옮겨 심어서 안 쓰는 곳이야. 그런데 그게 왜?”
“아직도 그대로 있나?”
“으응, 당연하지. 독기 때문에 워낙 땅이 척박해서 쓸데가 없어.”
“알았다.”
신유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칠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히 부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곳만큼 숨기 쉬운 곳도 없을 것이다.
물론 백호영준과 호야가 그곳에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밑져야 본전, 아직까지도 폐가가 그대로 있다면 한번 가 보는 것 또한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같이 가요, 유강.”
진소소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도 그곳에 흡혈광마가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청랑 또한 따라가려는지 조심스레 일어섰고, 오직 당소혜만이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다.
“어딜 가는 거야? 설마 거기 가는 거야? 나도 데리고 가!”
세 사람이 줄줄이 방을 나서자 혼자 남은 당소혜는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원에 흑영과 흑호가 있지만, 그 둘과 함께 있는 것보다는 신유강과 진소소와 함께 있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어느새 네 사람은 장원을 벗어나 빠르게 사천당가를 향했다.
가장 경공이 느린 당소혜는 죽을상을 하고 있었으나,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춘다면 저들이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당소혜는 더욱더 경공에 박차를 가했다.
“대, 대체…… 우, 우리 집은…… 왜, 왜 가는 거야……!”
숨을 고르는 것조차 힘든지, 당소혜는 연신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기실 한마디 꺼내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지만, 궁금증이 머릿속에 가득하여 물어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그러나 대답을 해 주는 이들은 없었다.
그저 더욱 빠르게 발을 놀리며 거리를 벌리고 있을 뿐이다.
당소혜는 이를 악물며 더욱 박차를 가했고, 그렇게 약 이각여 정도 시간이 지났을 무렵, 어느새 사천당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위에는 사람이 없다.
대부분 인원이 흡혈광마를 잡기 위해 나섰으니 마치 빈집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만약 누군가 습격을 한다면 여지없이 무너질 것 같았으나, 세상 어느 누가 있어 천하의 당가를 건드리겠는가.
신유강은 발 빠르게 걸음을 놀려 폐가 쪽으로 향했다. 기실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몇 안 되는 곳인지라, 당소혜는 신유강이 어찌 저 길을 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질문하지 못했다.
숨이 워낙 거칠었던 탓에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긴가요?”
진소소는 눈앞에 있는 폐가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확실히 누군가 숨어 있기에는 절호의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사천당가가 주는 이름이 이름이니만큼 함부로 발을 들일 이들이 없을 테고, 당가 쪽에서도 설마하니 자신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에 누군가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신유강은 눈앞에 있는 몇 채의 폐가들을 지나치며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대부분 비슷한 곳이긴 했지만, 실상 사람이 쉴 만한 곳은 한 곳 외에 없었기 때문이다.
폐가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누군가 있는지 혹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저벅저벅 다가서며 조심스레 문을 열자, 훅 하며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윽!”
신유강은 인상을 쓰며 주춤 물러섰다.
지독한 시취(尸臭).
당장이라도 속에 있는 내용물이 올라올 것 같은 그러한 냄새.
진소소는 물론이고 청랑마저 참지 못하겠는지 인상을 쓰며 물러섰다.
“독……!”
당소혜는 그 냄새 때문인지 호들갑을 떨며 난리를 쳤다.
신경조차 마비시킬 것 같은 역겨운 냄새는, 그야말로 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유강은 고개를 저었다.
“명색이 당가의 여식이 독과 시취도 구분하지 못하냐? 당가의 앞날이 걱정이다.”
툭 내뱉은 말과 다르지 않게, 폐가 안에는 상당히 많은 시체들이 보이고 있었다.
하나같이 몇 달 전에 당한 것처럼 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최근에 당했던 이들군요.”
진소소 또한 코를 틀어막고 안으로 들어와 시체들을 살폈다.
쳐다보는 것조차 역겹기 그지없는 광경임이 분명하나, 시체들을 하나둘 자세히 살피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대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