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때문인가?
생전 처음 적호대를 눈앞에 둔 이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미와 청성은 물론 당가의 무사들, 그리고 낭인과 후기지수들이 그 이름만으로도 살벌하기 그지없는 적호대를 눈앞에 두고 기가 죽은 것이다.
수적으로는 사천 무림인들의 승리.
그러나 기세로는 적호대의 승리다.
“이보시게, 율 대주. 그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이 모든 일이 마교가 꾸민 일이라는 것인가?”
아미의 옥진 장문이 지그시 눈을 감고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흡혈광마를 잡기 위해 나섰으나 그 끝에서 본 이들은 다름 아닌 적호대.
마교의 사주라 생각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하,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린 그런 더러운 짓거리는 하지 않소. 우리 부교주께서 흡혈광마에게 상당한 흥미가 솟은 것인지 본 대주에게 부탁을 했을 뿐이오.”
더러운 짓이라는 말에 백호영준과 호야의 안색이 변했다. 자신들의 편이라 생각하고 따라왔는데, 율초언은 얼마든지 그들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말투였기 때문이다.
“흥! 그걸 믿으라는 것이냐! 네놈들이 정말로 저것들과 관계가 없다면 당장 저 두 놈들을 내어놓거라!”
당초운이 눈에 불을 켜고 일갈했다.
흡혈광마에게 당해 친우, 혹은 가족을 잃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목소리다. 하마터면 금지옥엽인 당소혜를 잃을 뻔했던 충격은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율초언은 되도 않은 말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방금 한 말 못 들으셨소? 나는 저들을 마교로 데리고 가야 하오. 그런데 당신들에게 넘길 리가 없지 않소.”
율초언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히 상대를 조롱하는 웃음소리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당초운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움직이려 했다.
그 순간 적호대 대원들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지옥에서 살아오던 이들이다.
당초운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는 하나 그 살기만큼은 천하제일이라 자부해도 될 것이다.
바들바들.
살기를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몸을 떨며 주저앉는다. 분명 자신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음은 명백한데, 기이하게도 덤벼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적호대다.
율초언이 그런 이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웃었다.
“너 이 개새끼!”
그때, 어디선가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그 소리에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 한쪽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맹렬하게 쏘아져 오는 것이 보였다.
율초언은 눈을 부릅떴다.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다가온 신유강의 주먹이 율초언을 매섭게 후려쳤다.
쾅!
매서운 폭음과 함께 그가 서 있던 자리는 그야말로 처참하게 변해 버렸다.
유유히 그 자리를 채운 신유강이 인상을 찌푸렸다.
“유강!?”
뒤따라오던 진소소는 꽤나 놀란 표정이다.
율초언을 본 신유강의 행동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느 때보다 격했기 때문이다.
“호오, 네놈이 이곳이 있다니 조금 놀랍군.”
신유강의 주먹에 맞은 것이 확실해 보였으나, 어느새 피했는지 율초언은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는 행동에선 여유마저 느껴졌다.
“실력이 조금 늘었군. 하지만 그 정도가 다는 아니겠지?”
율초언은 마치 신유강을 도발이라도 하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 행동에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하는 건 당연한 상황이었으나, 애초에 무림 경험 따위 쥐뿔도 없는 신유강은 그저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갈고 있을 뿐이다.
“와 보아라, 수준 차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지.”
그것은 율초언이 씩 웃음을 짓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사방에서 적호대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갑작스런 신유강의 등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낭인들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쓰레기를 먼저 치우고 혼전을 유도하는 것이다.
펑펑!
적호대는 거침없이 품에서 연막탄을 꺼내 사방으로 던졌다.
순식간에 주위는 연막으로 시야가 차단되었고, 기척을 느끼는 것이 어려운 낭인들과 수준 낮은 무사들은 그야말로 처참하게 도륙되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크아아악!”
“사…… 살려 줘! 커커억!”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청성과 아미는 물론 사천당가의 인물들 또한 속수무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적으로 우세하다지만 짙은 연막이 깔려 있는 상황.
극한상황 속에서도 늘 전투를 벌였던 적호대와 명백한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이놈들!”
윤환이 검을 뽑아 연막을 날리려 했으나 소용없는 짓이다. 날리는 것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다시금 연막이 터졌다.
카카캉!
곳곳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부딪히는 것보다 죽어 가는 이가 더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때에요!”
호야는 지금까지 상황을 지켜보며 기회를 노렸다.
혼전이 벌어지면서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자, 망설이지 않고 백호영준의 손을 부여잡은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적호대원들 중 몇몇이 그들을 보기는 했으나 쫓지 않았다. 오히려 연막을 이용해 혼전을 유도하더니, 곧 하나둘씩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파 쪽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다.
주위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를 뿐, 그럴 때마다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을 해할 뿐이다.
신유강은 인상을 쓰며 율초언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시야가 차단되니 그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유강, 저쪽이에요! 도망치고 있어요.”
진소소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다.
어느새 다가온 그녀가 매섭게 검풍을 뿌리자 신유강의 주변을 메우고 있던 연막이 순식간에 걷혔다.
“쫓아요. 저는 백호영준을 쫓을게요.”
진소소와 신유강은 서로 정반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신유강이 향하는 곳은 율초언과 적호대원들이 사라진 곳이었고, 진소소가 향한 곳은 백호영준과 호야가 있던 곳이다.
“쫓아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이어 당초운을 비롯한 윤환과 옥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은 채 연막을 치며 혼전을 유도하고 있는 적호대원들 탓에, 쉬이 그들을 쫓을 수가 없었다.
* * *
“헉헉…….”
백호영준과 호야는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흡혈마공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신체 능력이 올랐으나, 워낙 급박한 마음에 극성으로 내공을 끌어 올린 채 달리고 있었으니 지칠 만도 하다.
백호영준은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그에 비해 수준이 낮은 호야가 잘 쫓아오는지조차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한 번이라도 돌아본다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신유강이나 당가의 가주가 쫓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몹시 두려웠다.
“가, 같이 가요, 문주님……!”
뒤쳐진 호야가 소리를 치지만 백호영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기혈이 뒤틀릴 정도로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 올리고 있는 호야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모습이다.
“뭘 하는 것이냐! 어서 오지 않고!”
“헉, 헉……! 주, 죽을 것 같아요. 조, 조금 천천히……!”
“누군가 쫓아오면 우린 죽은 목숨이다. 힘들어도 조금 더 버텨라.”
백호영준은 이를 갈았다.
지금까지는 몰랐으나 이러한 상황이 되니 호야란 존재가 얼마나 거슬리는지 확연하게 느낀 것이다.
지금 당장 그 명을 끊어 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으나 백호영준은 꾹 참았다.
사람 하나 죽이는 데 드는 그 짧은 시간마저 아까운 것이다.
“헉헉……헉헉…….”
호야는 시퍼런 안색으로 당장이라도 죽을 듯 숨을 꼴깍꼴깍 넘기기 시작했다. 결국 참다못한 백호영준이 인상을 쓰며 그에게 다가섰다.
“괜찮으냐?”
“하아, 하아……. 주, 죽을 것 같아요. 그런데, 누가 쫓아오나요?”
“아직 보이지 않는군. 이곳을 벗어날 꾀라도 있느냐?”
“끄응……. 그 마교인들이 시간을 벌어 주고 있으니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요. 후욱, 흔적이 남지 않게 계곡을 따라 이동하죠.”
“계곡?”
계곡이라는 말에 백호영준은 힐끗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그들이 있는 곳 근처에는 깊지 않은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물이 다다르는 장소는 다름 아닌 사천 성도일 것이기에, 따라간다면 필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꼴일 터.
“후우……. 물 속에서 이동하면 저희 흔적을 찾아내기 힘들죠. 후하! 그리고 이런 혼전 속에서, 설마 저희가 성도로 돌아갔다는 생각을 하겠어요?”
“그, 그렇지.”
백호영준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사천 성도로 돌아간다는 것이 꺼림칙하나 대부분의 고수가 이곳에 모여 있으니만큼, 일단 성도에 들어서기만 한다면 빠져나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백호영준이 씨익 웃었다.
과연 총명한 놈이다.
“결정했으면 어서 가자.”
“그게, 문주님…….”
“뭐냐?”
“……저 좀 업어 주세요. 계, 계곡까지만…….”
호야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힘겹게 말했다.
내공이 삼 갑자에 이르는 백호영준과 달리 호야에게는 고작 반 갑자가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백호영준의 뒤를 쫓았으니, 겉으로야 멀쩡해 보여도 속은 말이 아닐 것이다.
백호영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나저러나 지금 당장 호야의 힘이 절실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백호영준은 호야를 업고 조심스레 계곡으로 향했다.
등에 업힌 호야는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많이 힘든가 보구나.”
“괘, 괜찮아요.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서 새외로 가요 문주님. 그리고 문파를 세워서 떵떵거리며 살자구요.”
“하하하, 그렇지.”
백호영준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의 한마디에 괜스레 양심이 찔린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야를 죽이고 싶지 않았던가.
“전 문주님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죽을 뻔한 저를 구해 주셨고, 지금은 이렇게 무공도 알려 주셨잖아요.”
“나도 네놈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에이, 어떻게 그래요. 내공마저 주신다는데.”
“뭐!?”
퍼걱!
“끄아아악!”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다.
호야의 작은 손이 삽시간에 백호영준의 몸을 꿰뚫었고, 뒤이어 운기되는 흡혈마공의 힘이 백호영준의 내공과 생기를 모조리 빨아들였다.
백호영준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입에서는 게거품이 흘러나오고, 눈과 코에서는 피가 줄줄이 새어 나왔다. 호야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극성으로 운공하여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있었기에 생기는 현상이다.
호야는 순식간에 말라 가는 백호영준을 바라보며 그 자그마한 입술을 히죽 말아 올렸다.
“그동안 내공 모으느라 수고하셨어요. 기회가 있으셨을 때 저를 죽이셔야 했어요, 문주님. 하하, 하하하하!”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트린 후, 호야는 축 늘어진 백호영준의 시체를 거침없이 계곡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아직 죽지는 않았는지 백호영준은 허망한 눈동자로 호야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호야는 관심 없다는 듯 웃으며 등을 돌렸다.
“대단하구나. 설마 자신을 길러 준 사람을 배신하는 종자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일련의 모든 상황을 보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진소소다.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진 것에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신유강은 호야가 가장 무서운 놈이라 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