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그럼, 다음은 무관의 일이네만…….”
무현 선사가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제갈백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림맹 총사인 그에게 무관의 일을 전부 맡겼기 때문이다.
“순조롭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한 달 이내에 완공을 할 것입니다.”
“빠르군.”
“최고의 인부들을 고용하지 않았습니까? 하하. 물론 볼품은 없습니다만…….”
일 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완공을 시키는 것조차 말이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넓이인데, 무림맹의 본진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짓는다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정말로 볼품이 없다는 건 아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구파일방과 팔대세가라는 명문에 속한 인물들이니, 자신들의 눈이 보통 사람들보다 높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만약 평범한 이들이 완성된 무관을 본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잘 지어졌다 할 수 있었다.
“좋네, 그럼 한 달 뒤에 개관식을 열도록 하지. 구파와 팔대세가는 입관할 이들을 추리도록. 중소 문파 쪽은 이름 있는 곳들로 선정하도록 합세. 그리고 특히 자네들…….”
무현 선사는 다시 한 번 쯧 혀를 차며 당초운을 비롯한 윤환과 옥진을 바라봤다. 회의가 열린지 벌써 한 시진이 지났으나, 처음 흡혈광마에 대해 이야기를 한 뒤로 그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만큼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되도록이면 팔대세가와 구파의 이름에 먹칠이 되지 않을 우수한 인재들을 추려야 할 걸세. 중소 문파의 아이들에게도 밀린다면 그보다 창피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 알겠습니다.”
“…….”
윤환과 옥진은 모욕적인 말투에 파르르 몸을 떨며 대답을 하지 못했고, 결국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당초운이 굳은 얼굴로 대답을 했다.
당금 무림에서 소림과 무당의 위세는 하늘을 찌른다.
지금 이 상황은 그것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그 이름 쟁쟁한 자가 사천 사람이라지?”
권룡의 이름이 무현의 입에서 나오자, 당초운이 눈을 반짝였다. 확실히 현 사천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이를 손꼽자면, 응당 권룡 신유강을 말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용했던 사천무림에서 별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습니다, 맹주. 하하하. 사천의 자랑이지요.”
“흐흠…… 듣자 하니 적호대주를 이겼다는 헛소문이 돌고 있던데 그것은 사실인가?”
무현의 입장에선 헛소문으로 치부를 하고 싶은 일이다. 적호대주라 한다면, 무림백대고수의 한 명이다.
아무리 소림이라 하더라도, 신유강과 비슷한 나이의 무승은 결코 적호대주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그만큼 차이가 심하다 할 수 있는데, 고작해야 약관 나이로 적호대주를 이겼다는 우습지도 않은 말이 돌고 있으니, 무현과 청허는 내심 못마땅한 눈빛을 보였다.
“헛소문이 아니오, 맹주.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그럼 그대들은 적호대주를 꺾어 놓고도 그의 머리를 취하지 못했다는 말이로군.”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에 윤환은 입을 다물었다.
적호대는 중원 무림에 있어서 상당한 위협이 되는 인물이다.
그런 이의 목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놓쳤다는 것이 무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생사투를 벌인 것은 엄연히 신유강이었고, 그가 목을 취하지 않는데, 구경꾼인 사천 무림인들이 나서 적호대주를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윤환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 염불을 외며 마음을 다스릴 뿐이었다.
지금 이것이 중원 무림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뭐, 아무래도 좋네. 그 권룡이라는 자에게 특별히 맹주의 이름으로 입관패를 건네주도록 하게.”
무현의 말에 제갈백헌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특별히’라니? 마치 자신이 황제라도 되는 양 말을 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무림맹주는 정파의 황제나 마찬가지였다.
소림과 무당의 힘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제갈백헌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 * *
사천 무림에 한 차례 폭풍이 몰아쳤다.
무관이 입성하는 좋은 시기에 갑작스레 나타난 흡혈광마가 사천을 뒤집어 놓았고, 더욱이 금기나 다름없는 벽력탄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경악에 빠트렸다.
그러나 나쁜 소식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흡혈광마의 뒤를 쫓고 있던 상황에서 나타난 마교의 적호대, 그 대주를 물리친 권룡의 소문은 삽시간에 전 무림에 퍼져 나갔다.
그만큼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적호대주는 그야말로 마교의 얼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자다.
정파 무림인들에겐 저승사자와 다름이 없었던 그를, 고작해야 약관을 넘어선 권룡이 이긴 것이다.
때문인지 사천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
너 나 할 것 없이 권룡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흡혈광마라는 위협과 공포 따위는 권룡의 이름 앞에 초라하게 사라져 버렸다.
신유강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장원을 둘러보다, 기이한 것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눈앞에는 낯익은 얼굴에 당소혜가 무언가를 바리바리 장원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힐끔힐끔 둘러보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신유강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커다란 보따리를 힘겹게 짊어지고는 총총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둑질이라도 하냐?”
“아악!”
툭 하고 말을 내뱉자 전혀 그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당소혜가 소리를 빽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소리가 워낙 컸던 탓인지, 어느새 흑영과 흑호, 그리고 진소소와 청랑마저 부리나케 달려왔다.
최근 뒤숭숭한 일들이 가득한 나머지,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깜짝 놀랐잖아!”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힌 당소혜는 앙칼지게 신유강을 노려봤다.
예전에는 신유강의 기척을 쉽게 느낄 수 있었으나, 지금은 눈앞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지 않는다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수준이 그만큼 벌어진 것이다.
당소혜는 그것이 못마땅하였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도둑년이 큰소리네.”
“누가 도둑이야! 이건 내 짐이라고!”
“후우, 그만들 해요. 그보다 소혜야 그 짐은 뭐니?”
진소소는 지금 말리지 않는다면 한도 끝도 없이 약을 올리고, 화를 내는 것을 반복할 것 같은 두 사람을 뜯어 말렸다.
때문인지 뭔가 말을 하려던 당소혜가 입을 다물었고, 신유강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그건 뭐니?”
“지, 짐이에요, 언니.”
“짐?”
“드디어 쫓겨났군. 축하한다.”
“이 씨!”
짝짝 박수마저 치는 신유강의 행태에 당소혜는 잔뜩 얼굴을 부풀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차마 주먹을 휘두를 용기는 없는 모양이다.
당소혜는 그저 분에 못 이겨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그래, 어떻게 된 거지?”
“그게 있잖아요, 언니……. 집에 있으려니까 자꾸 지난번 일을 거들먹거리면서…….”
아직 말을 다 들어 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소소는 대강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에서 지난번 흡혈광마에게 당할 뻔한 당소혜를 수련시키려 했으나, 당소혜가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을 친 것이다.
짐까지 바리바리 싸서 도망 온 것을 보아, 한동안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진소소는 포옥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딱히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안 그래도 장원이 너무 넓어 객식구를 받아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소혜는 그 자리를 채워 주는 역할로 충분했다.
거기다 당소혜가 이곳에 있다면, 당가 또한 장원을 수시로 봐줄 테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당가 측에서 먼저 나서 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진소소는 묘한 눈빛으로 당소혜와 신유강을 번갈아 바라봤다.
신유강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를 바라보고 있는 당소혜의 눈빛은 사모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 별다른 거부감은 없으나, 내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당소혜는 사천당가의 무공을 익힌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낮았다.
그런 그녀가 짐을 싸 들고 나가는데, 당가에서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 리가 없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은 당소혜와 신유강을 붙여 두기 위한, 사천당가의 방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소소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물론 당소혜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는 모양새다.
멍청해 보이는 것에 비해, 신유강에 관한 일에는 상당히 눈치가 빠른 편이니, 모를 리가 만무하다.
“그러니까 당분간 이곳에 있을 거야.”
당소혜는 조심스레 신유강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무표정하기 그지없으나, 딱히 싫어한다는 표정이 아니었고, 그것을 본 당소혜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총총걸음으로 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짐을 풀려는 것이다.
“괜찮겠어요? 둘은 매일같이 싸우는데?”
진소소는 의미 모를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적이던 신유강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며 웃었다.
“뭐 어때, 집안에 여자라곤 소소 혼자뿐이니 소혜가 들어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아…….”
청랑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분명 이 장원에는 분명 청랑 또한 살고 있음이 분명한데, 신유강의 눈에는 청랑이 여자로 보이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가 너무 어리니 여자라기보단 애로 보이는 것이다.
“재미있어 보이는데 미안하다. 그런데 유강아, 손님이 왔다.”
그때 후비적후비적 귀를 파며, 귀찮다는 듯 다가온 흑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흑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이 온 모양이다.
신유강과 진소소는 손님이 왔다는 소리에 한숨을 쉬었다.
최근 들어 권룡이라는 신유강의 별호가 유명세를 타며, 한 수 배움을 청하기 위해 몰려드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던 탓이다.
또 그런 종류의 손님이라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흑호의 말이 들려왔다.
“하여튼 정파 새끼들이 다 그렇지. 이름 좀 얻으니 어떻게 해서든 지들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 봐.”
“무슨 소리예요?”
진소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흑호의 말을 들어 보자니 평소 오던 손님들이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무림맹에서 왔단다. 그것도 상당한 거물이 말이다.”
“거물?”
“총사다. 무림맹 총사. 웬만한 사람은 얼굴을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는 놈이지.”
흑호의 말에 신유강은 신음을 삼켰다.
도대체 무림맹에서 무슨 용무가 있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흡혈광마의 대해서는 이미 당가측에 모든 사실을 전했으니 만큼, 찾아올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가 보도록 해요. 무림맹 총사가 직접 찾아왔는데, 문전박대를 했다간 건방지다고 욕을 먹을 거예요.”
진소소의 말에 신유강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녀의 말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유강의 장원에 들어선 제갈백헌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