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사천십대갑부 중 한 명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장원의 풍경은 당가를 뛰어넘어 사천제일갑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문팔대세가 중, 천하제일세가, 즉 하북진가 또한 이 정도 규모와 아름다움을 가진 장원을 소유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곳이 고작해야 약관에 지나지 않은 이가 소유한 장원이라는 말인가? 듣기로는 고작해야 점소이였을 뿐이라고 했는데, 몇 년 만에 이 정도 규모의 장원을 소유할 만큼 돈을 벌었다는 것이 도통 믿기지 않았다.
“좋은 장원입니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기억이 나지 않는 흑영의 뒤를 따라가던 제갈백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인사를 한 것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두 사람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탓이다.
“마음에 드시다니 다행이오. 우리 가주께서 금 오만 냥을 털어 지은 것이니.”
“하하하, 과연 그 값어치를 하는 것 같구려.”
고작해야 장원의 총관인 자의 말투가 영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것이 딱히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뭘까?
제갈백헌은 속으로 끙 신음을 삼키면서도, 겉으로 웃음을 지어야 했다.
괜한 트집을 잡히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이곳에 단순히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무림맹주를 대신하여 왔으니, 정파의 기둥인 무림맹 총사의 넓은 아량과 기품을 보여 주여야 하는 상황이다.
“그럼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늦어도 일각 안에는 오실 테니.”
흑영은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굳은 얼굴을 펴지 않은 채, 제갈백헌이 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문을 닫아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흑영과 제갈백헌은 일전에 면식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마교의 은밀 부대를 이끌었던 흑영은, 제갈백헌의 꾀에 속아 몇 번이고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적이 있으며, 한 번은 그를 암살하기 위해 제갈세가에 침투를 한 적도 있었다.
온갖 진법 탓에 실패를 하긴 했지만, 당시에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바득바득 이가 갈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재수 없는 놈.”
흑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섰다.
반면 손님방에 홀로 남은 제갈백헌은 차조차 내주지 않는 흑영의 행태를 몹시 불쾌히 여기고 있었다. 무림맹 총사라는 직책은 오대세가의 가주들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였다.
한데 고작해야 일개 장원의 총관 따위가 자신을 박대하는 것이다.
더욱이 살짝 보았던 그 얼굴은 왠지 어디선가 한 번 보았던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딱히 무엇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으니, 제갈백헌은 그저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떨쳐야 했다.
“재수 없는 놈이로세.”
툭 하고 말을 내뱉은 제갈백헌은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혹여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다행이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애초에 이 넓은 장원에 시비나 하인들조차 없으니, 낮말이든 밤말이든 엿들을 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대고수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절정에 오른 자신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제갈백헌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때 객방에 문이 열리며 신유강이 안으로 들어섰다.
제갈백헌은 그의 얼굴을 보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약관도 되지 않는 청년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어려 보였던 탓이다.
체구도 호리호리한 데다 태양혈은 물론, 기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른 무림맹주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아닌가?
‘정말로 이자가 권룡이라는 말인가?’
제갈백헌은 끙 하며 신음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갈백헌이라 하네. 무림맹 총사 직을 맡고 있지.”
“이 장원의 주인인 신유강입니다.”
“하하하, 그래그래. 정말로 반갑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만 설마 자네 같은 자가 권룡일 것라곤 생각도 못했네.”
제갈백헌은 정녕 믿을 수 없다는 듯 말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무지 무공을 익힌 이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또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총사.”
“하하, 그리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게나. 이곳에 주인은 자네가 아니던가?”
제갈백헌의 말에 신유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손님이 왔으니 응당 차를 내어 올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제갈백헌은, 신유강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차 한 잔 내어 오지 않는 것에 살짝 불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불만을 표현하진 않았다.
“죄송합니다. 워낙 급작스러운 일이라, 조금 있으면 차와 다과를 내어 올 테니 불쾌하시더라도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하, 알겠네. 내 조금 기다리도록 하지.”
뜬금없는 신유강의 말에 제갈백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방문 예정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고, 그만큼 준비를 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제갈백헌은 불쾌했던 표정을 풀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적호대 건은 정말 잘해 주었네. 자네와 같은 인재가 우리 정파에 있으니, 정말로 다행인 일이야.”
“과찬이십니다.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한 일은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호오…… 그럼 무엇 때문에 적호대주와 생사투를 벌였는가?”
율초언과 신유강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제갈백헌이 사정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신유강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흐음…… 그런가?”
제갈백헌은 돌연 입을 다무는 신유강을 보며 썩 내키지 않았다.
단순히 공을 감추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닌, 무언가 깊은 사정이 있어 보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깊게 파고들고 싶었으나, 무표정한 신유강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이상 파도 좋은 대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어린놈 주제에 은근히 만만치가 않군.’
“하하, 뭐 좋네. 그보다 내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말하겠네. 자네, 이곳 사천에 무관이 생기는 것을 알고 있는가?”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희 장원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닌 데다, 사천 전체가 그 때문에 떠들썩합니다.”
“그렇지! 하하하,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다름 아닌 그 일 때문이라네. 정도 무관 입관생들을 모집하고 있는데, 무림맹주께서 친히 자네에게 입관패를 주라 하셨네.”
제갈백헌은 주섬주섬 품 안에서 무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입관패를 꺼냈다.
무림맹주 직인이 찍혀 있는 그것은,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가운데에는 웅장한 용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으며, 뒷면에는 무림맹에 깃발이 그러져 있다.
“맹주께서 친히 자네의 입관을 허락하셨으니, 다른 이들보다 대우가 좋을 것임은 틀림이 없네.”
신유강은 그 입관패를 받아 들며 웃음을 지었다.
“이 패를 가지고 있으면 그 대우를 받는단 말입니까?”
“물론이네. 그 패는 무림에 단 두 개밖에 존재하지 않네. 다른 하나는 바로 하북진가의 진자명이 가지고 있지.”
진자명이라는 말에 신유강은 불쾌한 듯 아미를 찌푸렸으나, 이내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패를 품에 챙겼다.
“자네가 입관을 해 준다면 무관의 명예가 상당히 올라갈 것일세. 자네는 현재 무림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일세. 하하하.”
제갈백헌은 진심으로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을 지었다.
권룡이 무관으로 입학을 한다면 구파일방이나 명문세가의 후기지수들의 심한 견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적호대주를 이긴 권룡의 기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
제갈백헌은 무당은 물론이며 콧대 높은 소림까지 신유강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거라 생각했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다 나올 일이다.
“유강, 차 가져왔어요.”
그렇게 저 혼자 웃음을 짓고 있을 무렵, 고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제갈백헌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이내 끽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여인이 들어왔다.
한 명은 청랑이었고, 다른 한 명은 진소소였다.
청랑은 들고 있던 차를 신유강과 제갈백헌의 앞에 놓아두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영락없는 시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제갈백헌은 차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진소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과를 탁자 위에 올려놓는 그 나긋나긋한 행동에 놀란 것인가? 아니면 그 미모의 넋을 잃은 것인가.
제갈백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신유강은 그 모습에 불쾌한 듯 인상을 썼고, 진소소 또한 뚫어지게 자신을 응시하는 그 시선이 내키지는 않는지, 아미를 찌푸리며 조용히 등을 돌렸다.
이럴 때는 조금이라도 빨리 방을 나가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속으로 아무리 무공이 높고 세상을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남자가 여색을 밝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혀를 찼다.
진소소는 최대한 제갈백헌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을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소…… 소소야!”
제갈백헌의 입에서 지금까지 소개조차 하지 않았던 진소소의 이름이 터져 나왔고, 신유강은 물론 진소소마저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그를 바라봤다.
“소소구나? 그렇지? 소소가 맞구나?!”
진소소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第二章. 천무관 개관(天武館 開館)
마존은 지루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 종일 거처에 틀어박혀 하는 일이라곤, 외부의 이야기를 수하에게 전해 듣는 것이 전부였다.
남들이 보면 일조차 하지 않고 먹고 놀며, 원하는 만큼 가지고, 싶을 것을 탐하는데 무엇이 불만이냐 묻겠겠으나, 여자를 탐하는 것도, 혹은 재물을 탐하는 것도, 몇 십 년 동안 계속되다 보니,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천산(天山).
그 웅장하기 그지없는 산세와 아름다운 정경.
마음만 먹으면 그 모든 곳을 둘러보며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었던 마존이지만, 마찬가지로 그 짓도 오래하다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으음…….”
마존은 신음을 삼키며 눈을 흘겼다.
그의 시선 끝에는 부교주의 모습이 보인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은 피떡이 되어 있었고, 밧줄로 전신이 칭칭 묶여 있는 그는, 고개를 축 늘어트린 채 벽에 걸려 있었다.
누가 보면 죽은 줄 알 것이다.
어떤 자가 천하의 부교주를 이리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답은 하나.
마존이었다.
부교주인 그가 이러한 몰골이 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마교의 지존인 교주조차 모르게 무사들을 움직였으며,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신유강은 물론, 흡혈광마를 포섭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또한 그 탓에 마교의 대외적인 행동을 맡은 율초언이 사천 무림에서 패배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미 언제라도 자리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는 마존이긴 하나, 이번 일만큼은 쉬이 좌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어두운 그림자를 헤치고 검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율초언, 지존을 뵈옵니다.”
“오호, 왔느냐?”
“송구합니다, 지존. 이 율초언 고작 중원의 신진 고수 따위에게 패하여 교의 명성에 먹칠을 했나이다.”
쿵!
바닥에 머리를 찍은 율초언은 피가 터질 정도로 사죄를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교에서 자랑하는 타격대인 적호대의 대주가 진 것이다.
천하백대고수 중 일인이자, 저승사자라 불리는 그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