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정파인들은 환호를 내지르고 있었고, 마교의 분위기는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율초언은 적호대주라는 이름을 내려놓아야 했다.
“네놈이 처음 그 녀석을 이긴 것은 요행이었다.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아.”
“…….”
율초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마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헛소리로 치부를 할 만큼 그는 바보가 아니다.
틀림없이 마존은 신유강의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고, 또한 그 힘이 결코 자신이 가진 것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엇일 것이다.
“그래, 사천은 어떻더냐?”
“권룡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사람들은 그를 칭송하기 바쁩니다. 또한 곧 있으면 천무관이 열린다 하니,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와 같다고 합니다.”
“천무관…… 천무관이라…….”
마존 또한 들은 적이 있었다.
사천 무림에 무관을 세워 마교를 견제하겠다는 우습지도 않은 발상으로 만들어진 것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마존은 익히 알고 있다.
사천의 세는 지극히 미약하기 그지없다.
당가나 청성, 그리고 아미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과거의 비해 그 힘이 많이 퇴색되었고, 이렇다 할 인재들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사천에 무관을 지어 정파의 세력을 더욱 굳건하게 다지려 한다는 것은 어느 의미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본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구파일방, 그것도 무림맹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들이, 사천의 이권을 얻기 위해 진행하는 일이다. 무관을 세우고 사천에 직접적으로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면, 당가는 물론이고 청성과 아미의 이권까지도 무림맹이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다.
“참으로 음흉한 녀석들이 아닌가.”
마존은 쯧쯧 혀를 차며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구파나 명문세가라는 놈들은 겉으로만 정의를 부르짖고, 뒤로는 제 이문만 챙기는 지독하게 나쁜 것들이었다. 누가 마교이고 누가 정도인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마존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율초언, 네놈은 지금부터 본좌를 따라라.”
“존명!”
“그리고 거기 사형 들리오?”
“쿠, 쿨럭, 말씀하십시오, 지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죽은 척하고 있던 부교주가 번쩍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누가 봐도 더 이상 맞기 싫어 보이는 엄살을 피우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마존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 웃었다.
“오늘부터 교주는 사형이 하시게나. 하하하.”
우습지도 않은 말에 부교주는 눈을 부릅떴고, 율초언은 바들바들 몸을 떨며 마존을 바라봤다. 그러나 마존은 조금도 그들의 눈치를 신경 쓰지 않고, 흑룡의를 펄럭이며 대좌를 내려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산속에 틀어박혀 있던 용이 중원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 * *
“저를 어떻게 아시죠? 만난 적이 있던가요?”
진소소는 정녕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눈빛에는 살짝 떨림이 존재하나,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았으며,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냉랭하기 짝이 없다.
“저, 정말로 소소 너였구나! 나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 제갈백헌을?”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제갈백헌은 바들바들 몸을 떨며 진소소를 바라봤다.
한때, 천하제일미라 칭송받았던 여인과 쏙 빼닮은 모습, 또한 그녀의 하나밖에 없었던 여식의 이름과 같으니 오해할 여지조차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진소소는 제갈백헌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가주답게 진소소의 눈빛에서 떨림이 일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제갈백헌은 허탈한 마음에 숨을 골랐다.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기는 하느냐?”
“죄송해요. 그런데 누구신지 정말 모르겠네요. 사람을 착각하셨어요.”
진소소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는 듯,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제갈백헌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진소소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하나 그보다 빠르게 신유강의 손이 움직이며 제갈백헌의 손목을 붙잡았다.
“……!”
“모른다 하지 않습니까?”
붙잡힌 손 때문인가? 아니면 어느새 방을 빠져나간 진소소 때문인가? 제갈백헌은 지금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가늘게 아미를 좁혔다.
그가 누구인가?
무림맹 총사이며 팔대세가 중 한 곳의 가주이다.
아무리 신유강이 권룡이라는 별호를 얻고 있다고는 하나, 신분으로 따지자면 하늘과 땅 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자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자네는 지금 무림맹 총사의 몸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일세.”
“하여 어쩌시겠습니까?”
제갈백헌은 더욱 아미를 좁히며 잽싸게 손을 움직였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손동작은, 신유강의 손을 쳐 내고는 그대로 목줄기를 향해 뻗어 나갔다.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기 그지없는 한 수.
이것이 바로 명문세가의 무공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품격 있는 금나수였다.
그러나 신유강 또한 만만치 않다.
금나수는 기초 중 기초.
흑영은 물론이며 진소소에게까지 맞아 가면서 배웠으며, 그가 익히고 있는 무예는 명문세가에 뒤지지 않는 상승 중 상승의 무학이다.
선선운현무의 금나수가 신유강의 손에서 펼쳐졌다.
휘릭.
손쉽게 제갈백헌의 수법을 흘린 신유강은 다시 한 번 손을 움직였다.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그 수법은 제갈백헌마저 기겁을 할 정도였으며, 이윽고 제갈백헌의 손은 다시금 신유강에게 붙잡혀 버렸다.
“으음…….”
제갈백헌은 신음을 삼키며 식은땀을 흘렸다.
고작해야 금나수 대결이라 하지만, 이미 신유강의 경지는 자신이 측정할 수 없는 곳에 올라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적호대주를 이겼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연히 눈앞에 있는 신유강이 천하백대고수에 들어가는 인재라는 소리이며, 제갈백헌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제갈백헌은 쉽게 물러 설 수가 없었다.
“자네는 저 아이가 누구인지 아는가?”
“물론입니다. 이름은 진소소, 곧 제 안사람이 될 여인입니다.”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네. 저 아이는 하북진가의 아이일세. 그런 아이가 자네와 어울릴 성 싶은가?”
“본인이 아니라고 했는데 듣지 못했습니까?”
“이 제갈백헌의 눈은 속일 수 없다네. 만약 이 사실이 하북진가 귀에 들어간다면 어찌 될 것 같은가? 결코 웃고 있지만은 않을 걸세.”
명문세가, 그것도 천하제일세가라 불리는 하북진가의 칠제 중 한 명인 천검제(天劍帝) 진백의 무공은, 마교의 천마와도 필적한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여유롭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으나, 단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게다가 소소가 하북진가의 여식이라는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하…… 아무래도 자네는 알고 있었나 보군. 어쨌든 나는 이번 일을 하북진가의 알릴 것이네. 그러면 어찌 될 것 같은가? 설령 권룡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 하더라도, 홀로 천하제일세가를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천하제일세가…….”
“그렇지, 소소 저 아이는 그 천하제일세가의 여식일세. 자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하북진가 또한 가만있지 않을 것일세.”
제갈백헌의 말에 신유강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현 무림에서 천하제일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신유강이 알고 있기로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천산마교, 그것도 십만마도의 정점에 올라와 있는 마존.
오로지 그만이 천하제일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말은 마존만을 위한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유강은 마존을 떠올리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제갈백헌이 보기에는 하북진가의 위세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기에,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발을 움직이려 했다.
“알아들었을 것이라 믿네. 그럼 이제 소소를 만나 보러 가겠네.”
“못 가십니다.”
“자네! 내가 하는 말을 듣기는 하였는가!”
“물론 두 귀가 열려 있으니 듣지 못할 리가 없지요. 그러나 진소소가 하북진가의 여식이든 아니든, 저에겐 그녀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지요.”
“미쳤군. 정녕 하북진가와 이 제갈백헌을 적으로 돌리려 하는가!?”
“아까부터 귀에 거슬리는군요. 하북진가, 하북진가. 하하, 혹시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 하북진가의 진자명은 저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당당하기 짝이 없는 신유강의 말에 제갈백헌은 인상을 썼다.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처참하게 깨졌으니, 응당 그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중원 전역에 퍼져 나간 것은 당연하다.
덕분에 하북진가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나, 하북진가의 힘은 고작 진자명 하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가는!”
“당신이 진가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제갈세가의 사람입니까? 진가와 친한 것 같습니다만, 호가호위하지 마십시오.”
“하…….”
“또한 하북진가가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우리를 위협하려 든다면, 저는 제 모든 걸 걸고 하북진가, 그 자체를 부숴 버릴 겁니다.”
“미쳤군, 자네!”
“저는 결코 허언을 하지 않습니다. 확인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찾아오라 일러 주십시오. 단, 그의 상응하는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신유강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갈백헌을 쏘아보며 말 했고, 그 알 수 없는 기세에 제갈백헌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이게 고작해야 약관이 넘은 청년이 가질 수 있는 기세인가?’
마치 천하의 절대자처럼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제갈백헌은 사람들이 어째서 권룡의 이름을 그리 입에 담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 * *
“후우…… 정말이지 끈질긴 놈이로군.”
“하하, 그렇지. 내 예전에 저놈의 목을 땃어야 했는데, 그것을 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유감이야.”
흑영과 흑호, 진소소를 비롯한 청랑과 당소혜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회의라도 하고 있는 듯 저마다 심각하기 그지없는 표정들이었고, 그중에서 진소소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당금 하북진가의 위세는 그야말로 천하를 진동시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소림과 무당 같은 커다란 구파보다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명문세가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그 어떠한 곳보다 강하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다.
제갈백헌의 말대로 만약 하북진가에서 진소소의 존재를 파악하고 시비를 건다면, 상당히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은 자명했다.
당소혜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흑영의 말을 듣고는,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진소소를 위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카랑카랑 목소리를 높였다.
“당가는 무조건 언니의 편이에요! 그깟 진가 따위가 무슨 대수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고, 고마워.”
기분 나빠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그러나 진소소는 당소혜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조금 전 보다는 한결 편안한 모습이다.
“그런데 정말 놀랍네요. 설마하니 하북진가의…….”
청랑은 슬쩍 눈을 흘기며 진소소를 바라봤다.
이들 중에서 가장 늦게 인연을 맺은 그녀는 진소소의 정체를 전혀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명문세가의 여식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으나, 하북진가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