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전 재산의 반이 훌쩍 날아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손실을 메우기는커녕, 사천 일은 실패하였고, 그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육평초가 잠적을 하면서 상단주인 육단호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상단이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사천으로 들어온 육단호가 죽었으니, 대운상단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냐며, 자금줄마저 막혀 버렸다.
한마디로 현재 대운상단은 그런 큰돈을 함부로 돌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육평초와의 일을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신유강을 추궁하기 위해 찾아온 육평우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우, 우리 인간적으로 대화를 좀 해 보십시다.”
결국 육평우는 두 손을 들었다는 듯, 존대를 쓰며 신유강의 기분을 맞추기 시작했다. 겨우 사천에서나 이름 있는 장원의 주인이라 무시하고 있었으나, 완벽하게 상황이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 때문인지 가만히 서 있던 흑영이 히죽히죽 웃음을 지었다.
“무엇이오?”
“사실 이 돈은 우리 형님이 아무도 모르게 빌린 돈이오. 더욱이 형님께서 일을 실패한 나머지 우리 대운상단은 지금 다 죽어 가는 형편이란 말이오.”
“……흐음, 계속 해 보시오.”
“내 보기에 신 대협께선 돈이 궁하지 않은 것 같으니, 우리 측 사정을 좀 봐주었으면 하는 바이오. 사실 금인지 은인지 쓰여 있지도 않은 각서로, 그 많은 돈을 내라고 한다면 누가 내겠소?”
물론 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설령 낸다 해도 은이라 우길 것이 분명하지만, 여기에 사천당가의 당소혜가 그것을 보았다고 말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또한 신유강은 최후의 한 수가 있었다.
바로 소동이다.
그가 천하의 명의 소동이라는 것을 밝힌다면, 누구도 신유강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관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봐준다라…… 나는 돈을 받아야겠고, 그쪽은 주지 못한다 하니…… 그럼 어쩔 수 없이 사천당가로…….”
“이, 이보시오.”
“나는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오. 대운상단이라면 천하십대상단, 고작 금 이십이만 냥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 보시오?”
그렇다.
누가 들으면 콧방귀를 뀌며 웃을 이야기다.
그러나 현재 대운상단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이십삼만 냥 가까이 되는 금약을 지불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물론 그러한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휘청거리고 있다고는 해도 천하십대상단,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내어 줄 수 있는 금액이지만, 자금줄이 막혀 있는 지금 상태에서 단 한 푼조차 아쉬울 판국이다.
육평우는 최대한 신유강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차차 갚기로 하는 것은 어떻소?”
“차차라…… 내 입장에선 아무래도 좋소만…… 하루에 금 백오십 냥 이상씩 벌 수 있겠소?”
물론 예전이라면 하루 백오십 냥이 문제가 아니라, 이백 냥 이상도 벌었겠지만, 대운상단의 자금력에 문제가 생긴 지금은 불가능해도 턱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 그거야…….”
“그럼 이건 어떻소. 내 이 각서를 드릴 테니 상단을 넘기시오.”
“그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천하십대상단인 대운상단을 고작 이십만 냥에 사겠다는 소리시오?!”
“물론.”
어이없는 신유강의 말에 육평우는 씩씩거렸다.
그만큼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운상단의 가치를 따진다면 이십만 냥이 아닌, 이천만 냥을 준다고 해도 팔지 않을 것이다. 대운상단이 가지고 있는 이권은 그 정도 값어치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비록 몰락하고 있다고는 하나, 언제든 재기의 발판을 만들 수 있는 이권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럼 잘 생각해 보도록 하시오.”
그러나 신유강은 관심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해 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적절한 때 일어서는 것이다.
밀고 당기기.
육평우 입장에서 애가 타기 시작할 테고, 자연스레 신유강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계속 겉돌면 신유강은 틀림없이 사천당가에 저 각서를 팔아버릴 테고, 당초운은 얼씨구나 하며 춤을 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결코 육평우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기, 기다리시게. 좋네. 내 돈을 내주겠네.”
“잘 생각하셨소.”
천하십대 상단이라 불리는 대운상단이 이제는 소규모 상단으로 몰락하는 어이없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던 손약란은 입을 쩍 벌렸다. 과거 그녀가 알고 있던 신유강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신유강과 육평우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녀는 그저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것뿐이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자리는 여인이 함부로 나설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무리이네. 내일 황룡전장의 전표로 가져다주겠네.”
육평우는 뻘뻘 식은땀을 흘렸다.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거금이 날아간다고 생각을 하니 속이 다 쓰라릴 지경이다. 그러나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상대가 천하의 권룡이니, 무력을 이용하는 것 또한 여의치 않았고, 사천당가를 들먹거리고 있는데, 함부로 몰아세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육평우는 두 손을 다 들었다는 듯, 아득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손약란과 함께 거칠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신유강은 태연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차를 들이켜고 있을 뿐이다.
“줄 것 같으냐?”
신유강과 둘만 남자,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흑영이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는 이미 육평우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다.
육평우는 권룡과 사천당가, 더욱이 무림맹이 지은 무관의 옆에서 함부로 행동을 할 멍청한 자식은 아니었다.
결국.
“주겠지요. 돈이 아까워 속이 쓰리겠지만, 하루 이자가 금 백오십 냥이나 되는 각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되찾아야 할 테니까.”
흑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가 본 육평우는 형인 육평초와는 다른 이다.
사리분별이 강하며, 손익 계산이 빠르니, 사람을 보내 강제로 각서를 되찾겠단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천하의 이름 높은 권룡의 장원.
휘청거리고 있는 대운상단이 거금을 들여 권룡의 이목을 속일 만한 고수를 고용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수이기 때문이다.
실패했을 때 뒤따라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몸을 사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까 그 아가씨가 너를 꽤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데 혹시 아는 사이냐?”
그 시선은 신유강 또한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미 손약란이라는 어린 소녀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 저편으로 훨훨 날아간 탓에 기억하려 해도 쉬이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글쎄요, 저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럼 네놈에게 반한 것이로구나.”
“하하, 척 보아도 육평우의 안사람 같던데 무슨 소리십니까?”
“혹시 네놈이 숨겨 둔 애인 아니냐?”
그 말에 신유강이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어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혹여 진소소가 이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누구 죽일 일 있습니까? 헛소리 그만하시고, 흑호를 보내서 저들 감시나 좀 하세요.”
“감시까지 하려고?”
“어리석은 짓을 할 놈은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흐음…… 그렇기는 하지. 알았다. 지금부터 대운상단의 건은 나에게 맡겨다오. 특별한 일이 있으면 말을 하도록 하마.”
“특별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하하하, 나도 그렇다, 인석아.”
흑영은 부드럽게 웃음을 지으며 등을 돌렸다.
신유강은 대운상단과 자신의 악연이 마무리되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아마도 각서를 육평우에게 넘기게 되면 더 이상 대운상단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육평우가 신유강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지 않는 이상 말이다.
第五章. 북해빙궁(北海氷宮)
신유강은 결코 적대하지 않는 이에게 함부로 손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에게 대협의 성품이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고개를 저을 것이다.
신유강은 결코 대협의 기질이 없다.
물론 아주 협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신유강은 과거 육평초의 일로 인해 정신적인 피해를 입은 것을 금 이십삼만 냥이라는 거금을 받고 깔끔하게 잊었다.
가뜩이나 진소소 몰래 뒷주머니를 차고 있는 돈도 어마어마한 액수인데, 거기에 새로이 이십삼만 냥이라는 액수가 손에 들어오니, 마치 돈에 파묻힌 사람마냥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흑영에게 그 엄청난 액수의 돈을 맡긴 신유강은 유유자적 웃음을 지으며 장원을 빠져나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가 문앞에 서 있지만 않았다면 틀림없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또 시비 걸러 왔소?”
장원 앞을 서성이고 있었던 자는 다름 아닌 쌍검룡 도우겸이었다.
무관에 입관을 하였으니, 유시(酉時)가 지나기 전에는 나오지 못한다는 규칙이 그에게도 적용될 테지만, 도우겸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큼! 나를 기억하느냐?”
“내가 붕어도 아니고, 세 번이나 만난 사람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오?”
신유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말을 하자, 도우겸은 슬쩍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좋은 만남이라고는 볼 수 없으나, 어쨌든 세 번이나 만났으니 얼굴을 기억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는 네놈이 무관에 입관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곳에는 관심이 없으니 신경 끄시오.”
“네놈 정도의 실력이라면 응당 무관에 입관하여 정파의 협의를 드높여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 아닌가?”
신유강은 아미를 찌푸리며 도우겸을 바라봤다.
도우겸답지 않은 말인지라 사뭇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알고 있는 도우겸은 의협심은커녕, 정파의 인물인지조차 의구심이 들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댁이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할 계제요?”
“푸하하! 그렇긴 하지? 나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는 건 안다.”
“흰소리 하지 말고 볼일이나 말하시오. 객잔을 열기 전까지 새단장을 해야 해서 여러모로 바쁘니.”
“딱히 별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은 아닌데…… 단지 네놈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이다.”
“무엇이오?”
“나는 네놈에게 졌지. 그것도 두 번이나.”
졌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도우겸의 태도에 신유강은 조금 놀랐다. 무인이라면 함부로 꺼내기 힘든 말이기 때문이다.
“해서?”
“나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네놈은 알고 있겠지?”
신유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우겸이 무관을 벗어나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우겸은 신유강에게 두 번이나 완벽한 패배를 당했으니, 신유강이 그의 단점을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도우겸의 질문에 답을 해 줄 수는 없었다.
애초에 신유강의 싸움은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파고드는 일반적인 싸움이 아니다. 회귀신공을 이용해 상대의 내력을 되돌려 내상을 입히고, 그 틈을 타 선선운현무를 운용할 뿐이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그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지만, 기본적인 것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