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그런 식이 아니라면 대운상단 같은 천하십대상단과 손약란 사이에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평우 딴에는 손약란의 미모가 마음에 들었을 테고, 또한 그 집안조차 대단하지 않으니, 첩으로 들여도 잡음이 없을 것이라 판단을 한 것일 터였다.
“굉장하군. 천하십대상단의 안주인이라.”
혼인이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유강의 얼굴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서려 있지 않다. 그것은 손약란을 여자로 보고 있지 않고, 어린 시절 친구로 보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신유강에게 손약란은, 왕윤이나 장삼 같은 아이들과 동급인 것이다.
그것이 못내 씁쓸하기 그지없었지만, 손약란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도와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 유소란이라는 여인이 너를 지킨 거지.”
“그거야 그렇지만…….”
틀린 것 없는 사실이다.
유소란이 우연히 자신을 보지 못했다면 아마 그대로 육평우가 있는 방으로 끌려가 무슨 짓을 당했을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혼인을 약속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혼례조차 올리지 않았는데, 정조를 빼앗긴다는 것은 그녀의 상식상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순결을 빼앗긴 뒤 버려진다면 그 뒤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손약란은 내심 그것이 두려웠다.
그녀가 몸을 떠는 것을 본 신유강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앞뒤 상황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운상단에선 분명 신유강의 과거를 조사했을 테고, 그 과정에서 손약란의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신유강에게 거금을 뜯기는 일이 발생하였으니, 육평우 입장에선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신유강에게 그 화를 풀 용기는 없으니, 애꿋은 손약란을 괴롭힌 것이다.
“당분간 조용해질 때까지 우리 장원에 있어라. 대운상단 쪽에는 내가 가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지.”
“괘, 괜찮아. 딱히 무슨 일을 당한 것도 아니고…….”
“당하고 당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대운상단이 대단하다 하지만, 사람을 이렇게 막대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는데?”
“그…….”
손약란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변명을 하려 했다. 상대는 대운상단, 신유강이 아무리 대단하다는 말이 들려오고 있다지만, 힘과 돈으로 밀어붙인다면 큰 낭패를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신유강의 단호한 한마디였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라. 친구가 맞았는데 가만히 있을 만큼 내 성격은 좋지 않으니까.”
신유강의 말에 손약란은 감동이라도 받은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확실히 예전부터 신유강은 손약란이 무슨 일을 저지를 때마다, 그것을 도맡아 처리해 왔다.
손약란은 너무 미안해서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第六章. 무장기갱(無醬耆羹)
손약란이 신유강의 장원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육평우는 질근질근 입술을 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신유강과 아는 사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 각별한 모양이었다.
그 장원에 당소혜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과 혼례를 치를 여인이 외간 남자 집에 머문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육평우는 이가 갈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육평우는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이라는 것이 있다.
특히 권룡 정도 되는 남자와 그 집안을 깡그리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명분을 내세워야 한다.
하여 선택을 한 것이 바로 손약란을 이용하는 것이다.
본래 육평우의 생각은 자신에게 맞은 손약란이 신유강에게 도움을 청하고, 신유강이 대운상단의 누군가를 건드리게 되는 순간, 대의명분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기야 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무림맹이나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지 못할 명분을 세울 수 있는 계획이었다.
중간에 북해빙궁의 유소란이 끼어들면서 이상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결국엔 권룡이 나서며 계획대로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는 즉시 사람을 시켜 신유강이 자신의 약혼자를 데리고 갔다는 소문을 냈고, 덧붙여 사람까지 보내 손약란을 데려오려 하였으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사람들은 육평우의 행실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약혼을 파기한 것도 아닌 여인네를 장원으로 들인 신유강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육평우는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옆에는 상당히 많은 이들이 모여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낭인들이며, 대부분 일류 또는 절정에 오른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로 권룡을 이길 수 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어리긴 하지만 천하백대고수에 들어선 권룡이다.
이미 그 수준이 초절정에 머물고 있으니, 이들 중 권룡과 부딪힌다면 살아날 수 있는 이들은 없을 거다. 그러나 육평초는 확신했다.
“이 정도면 되겠소?”
그의 앞에는 기천검 진자명이 있다.
그리고 주위에는 하북진가의 무사로 보이는 두 명의 중년인들이 사납기 그지없는 기세를 풍기며 육평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하북진가에서 육평우에게 손을 빌려 주기로 한 것이다.
“천하백대고수에는 들지 못하나, 이들 또한 초절정에 근접한 무인들. 권룡이 아무리 강하다 하나, 이길 수 없을 것이오.”
“하하, 참으로 듬직합니다, 소가주님.”
소가주라는 말에 진자명은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위에 형님이 한 명 더 있기는 하지만, 가장 능력이 뛰어난 것이 진자명이었으니, 소가주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모조리 죽일 것이오. 씨도 남기지 말고 말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뒷일은 당연히…….”
“물론 우리가 책임지겠소. 대의명분은 이쪽이 가지고 있소. 사전에 통보 또한 했으나 저들이 들은 척도 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권룡에게 약혼자를 빼앗긴 처지로 보일 것이오.”
“하지만 멸문지화를 시킨다면 응당 관에서 움직일 겁니다.”
“그 점도 걱정하지 마시오. 관 또한 우리가 손을 써 놓았으니.”
진자명은 매섭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육평우를 압박했다.
확실히 육평우가 생각해 낸 계책은 권룡이 아닌 다른 이들이었다면 충분히 통할 법한 일이다.
그러나 상대는 권룡이다.
더욱이 이 근방에서는 사천당가에 버금가는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이다. 또한 진소소라는 여인과 함께 살고 있는 데다, 당소혜마저 있다.
애초에 불륜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진소소…….’
아득!
진자명은 이를 갈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무언가 기묘했던 그 느낌.
검을 마주했을 당시, 느꼈던 명백한 살기.
그 당시에는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오래전, 세가를 떠난 그의 동생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제갈백헌에게 듣지 못했다면 지금까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소식을 알게 된 것은 진자명뿐 아니라, 하북진가 또한 마찬가지였고, 덕분에 가주인 진명이 사천을 향해 오고 있었다.
진자명은 결코 진소소와 진명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 진자명과 그 형제들이 진소소를 왜 괴롭혔던가?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진명이 진소소를 가장 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첩실의 자식이라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진명의 관심마저 진소소에게 가 있으니, 자신과 형제들의 눈이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칫 진명과 진소소가 만나게 된다면, 소가주 자리가 흔들릴지도 모른다.
진소소와 신유강의 관계를 모르는 사천 사람들은 없다. 명문세가의 규율상, 그 정도 소문이 났으니 응당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이고, 이렇다 할 가문도 없는 신유강은 자연스레 데릴사위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진자명과 신유강.
둘의 차이가 명확하하니, 소가주 자리가 크게 흔들리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니 진명이 사천에 도착하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
“최선을 다하도록. 우리의 흔적은 남겨서는 아니될 것이야.”
등을 돌려 그곳을 벗어난 진자명은 두 명의 남자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소리가 워낙 작았던 탓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육평우는 듣지 못한 듯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듬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며, 육평우는 기분좋게 웃음을 지었다.
* * *
피로써 마교를 장악하여 공포와 두려움의 상징으로 떠오른 마존.
그의 밑으로 칠제(七帝)가 중원을 오시하고 있다 한다면, 다시 그 한 단계 밑에는 천하백대고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천하백대고수, 그중 말석이라고는 하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유강은 날카로운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손약란이 장원으로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장원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신유강 또한 내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다른 여인들의 눈매가 사나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깨작깨작 밥을 먹으며 힐끗힐끗 눈을 흘기고 있는 손약란 또한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남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대운상단의 보복이 두려워 그럴 수도 없었다.
더욱이 진소소는 물론, 당소혜나 청랑 같은 화사한 외모를 지닌 여인들이 곁에 있으니, 자신의 외모가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이 장원에 있는 것이 편치 않는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그녀의 옆에 붙어 있는 쌍검룡 도우겸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곁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손약란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이것 좀 드셔 보시오, 소저. 우리 사모가 만든 것인데 아주 솜씨가 일품이오. 하하하.”
도우겸은 웃음을 지으며 진소소를 사모라 불렀다.
그것은 애초에 신유강에게는 짝이 있으니, 더 이상 관심을 갖지 말라는 뜻과 같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도우겸의 말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 그나마 살벌한 분위기가 한층 사그라지는 느낌이었다.
“고, 고마워요.”
손약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것을 집어먹으며 힐끗힐끗 눈치를 살폈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밥을 먹고 있는 신유강은 물론이며, 며칠동안 싸늘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보내는 진소소.
게다가 당소혜는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두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기실 손약란이 이들 중에서 가장 꺼려하는 것은 다름 아닌 당소혜였다.
사천에 살았을 때부터 당소혜는 감히 닿을 수조차 없었던 존재, 말을 거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천당가의 금지옥엽이다.
더욱이 과거 한 차례 얻어맞을 뻔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 당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기는 했지만, 사천당가의 여식이라는 점에서, 손약란이 가장 껄끄러운 상대임은 틀림없다.
손약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일어날게요.”
“하하, 소저 같이 갑시다.”
자리를 떠나는 손약란의 뒤를 따라 도우겸마저 떠나자, 장내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며칠째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정말이지 적응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신유강은 애써 헛기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고, 곧 돌려보낼 생각이다.”
“아아, 그래요?”
그러나 진소소는 영 관심이 없다는 투다.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신유강의 능력이라면 언제든 손약란과 대운상단의 일을 해결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혹여 그가 손약란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