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진소소는 미간을 좁히며 더욱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대운상단 측에서 세 번 씩이나 찾아왔어요. 그런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문전박대…… 지금 사천에 무슨 소문이 도는 줄 아세요?”
“물론 알지.”
신유강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시끌벅적하게 들려오는 소문을 모를 리가 없다.
진소소도 마찬가지겠지만, 신유강 역시 객잔 때문에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으니, 여기저기에서 그것을 들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당신과 저 손 소저가 눈맞았다는 소문이에요. 정말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해요?”
“하하, 나도 들었으니 당연히 알지.”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는 신유강을 보며 진소소는 기가찼다. 마치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처럼 말을 하지 않은가.
그녀는 더욱 아미를 좁혔다.
“우습지도 않은 소문은 귀담지 않았으면 해. 나와 약란은 그런 사이가 아니야.”
“하아…….”
진소소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예전같지 않은 저 모습을 볼 때마다, 참으로 기이한 느낌이 들지만, 그의 단호한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안심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딱히 일이 없으니 쉴 거예요. 나머진 유강이 알아서 해요.”
“으응.”
객잔의 일은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크게 증축을 하는 것도 아니니, 열흘 안에 완성을 하게 될 것이고, 곧 닫혔던 기연객잔이 다시 문을 열 것이다.
신유강이나 진소소가 해야 할 일은 대부분 다 했다고 함이 옳았다.
어쨌든 진소소는 피곤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당소혜와 청랑을 이끌고 사라졌고, 홀로 남은 신유강은 어색한 웃음을 짓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히 밖에 일이 있는 것은 아니나, 슬슬 손약란의 일을 마무리 짓지 않는다면, 왠지 자신이 장원에서 쫓겨날 것은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난 사흘 동안 손약란의 일을 정리하지 않았던 것은, 객잔의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었다.
대운상단에서 몇 번이고 찾아왔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애초에 주인이 없는 곳에 객을 함부로 들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전박대를 하고 말았다.
신유강은 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걸음을 옮겼다.
사실 말이 해결한다고 했지, 남의 집안 일을 해결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손약란과 육평우는 혼인을 약속한 사이이니, 그가 함부로 끼어든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신유강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단 육평우를 만나 이야기를 해야 한다. 풀 수 있는 오해는 풀고, 또한 되도록이면 부드럽게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대운상단과는 몇 번 얼굴을 붉힌 사이이긴 하지만, 이미 각서의 값을 받은 것으로 신유강에겐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물론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쾅쾅쾅!
그때 전혀 뜻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장원의 문을 부술 듯 거칠게 두들기기 시작을 한 것이다.
마침 대문을 향해 걷고 있었던 신유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려고 하자, 돌연 쾅!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대문이 부서져 나갔다.
“…….”
부서진 대문 너머에 보이는 것은 수십여 명의 무사들이었다.
가장 뒤쪽에는 육평우가 희미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고, 신유강이 그것을 어벙하게 보고 있는 찰나, 무사들이 우르르 장원 안으로 쏟아 들어오며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권룡, 네 이놈! 감히 네놈이 내 여인을 취하고도 무사할 성싶었더냐!?”
육평우의 일갈이 장원 전체를 쩌렁쩌렁 하게 울렸다.
신유강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관자놀이를 꾹꾹 짚었다.
그가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육평우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신유강이 겁을 먹었다 판단을 한 것이다.
“천하의 권룡이라 칭송을 받으니, 눈에 뵈는 것이 없구나. 대운상단과 척을 지고도 무사할 것이라 생각을 했다면 큰 오산이다!”
육평우는 득의양양하게 소리를 쳤다.
‘뭐 이런 멍청한 자식이 다 있지?’
물론 그것을 본 신유강은 속으로 욕을 했지만 말이다.
“……유강.”
그때 모습을 드러낸 진소소가 살벌하게 눈을 빛냈다. 어찌나 삭막하게 신유강의 이름을 부르는지, 신유강의 몸이 한 차례 파르르 떨렸다.
“이게 뭐죠?”
“글쎄…….”
진소소와 당소혜, 청랑, 그리고 흑영과 흑호마저 이 어이없는 상황을 바라보며 다들 혀를 내둘렀다. 육평우와 무사들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그녀들을 발견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이 돌아갈 만큼 절정의 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손약란은 얼굴이 시퍼렇게 죽어 있었다.
육평우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육평우가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짐작일 뿐이었지 정말 그가 강경하게 행동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육평우가 데리고 온 무인들은 대운상단에서도 상당한 기량을 자랑하는 자들이다.
낭인이라 하지만 경험이 풍부하니, 웬만한 일류나 절정 고수 못지 않았다.
더욱이 육평우 바로 옆의 두 명은 그녀도 처음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손약란은 한 차례 몸을 떨며 주저앉았다.
자신 때문에 신유강에게 좋지 않은 일이 또 벌어졌다는 자책감 탓이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오?”
결국 참다못한 신유강이 입을 열었다.
그의 주위에는 이미 십여 명에 무사들이 병장기를 뽑아 들고 있었으나 신유강은 그것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히려 그의 입가엔 비웃음이 머무르고 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육평우는 얼굴을 찌푸리며 또 한 번 고함을 내질렀다.
“네놈이 내 여인을 강제로 취했으니 응당 그 죗값을 받으러 찾아왔다. 살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야!”
“누가 누굴 취했다고?”
신유강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사천에서 도는 소문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우습지도 않은 소문이라는 것을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그것이 헛소문이라 치부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객잔 단골들이 가끔 만날 때마다, ‘또 여자를 후렸다며?’하고 농담 섞인 소리를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농담이지 진심이 아니었다.
그런데 육평우는 그것을 진심이라 생각한 듯했다.
물론 서로 반대의 입장이라면 응당 그럴 법도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도가 지나쳐도 상당히 지나쳤다.
신유강은 힐끗 시선을 돌려 대문 너머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관 근처에 장원이 있으니 만큼, 무인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고, 그들 중 익숙한 얼굴을 지닌 이들 또한 상당하다.
신유강은 이번엔 이마를 짚었다.
“이놈! 이 제와서 발?을 할 생각이냐. 권룡이라는 별호가 아깝지도 않더냐! 내 오늘 네놈을 단죄하여 내 여인을 욕보인 죄를 깔끔히 씻어 낼 것이다!”
쩌렁쩌렁!
육평우는 진자명과 진행한 이 모든 일에 자신이 있었다. 권룡이 대단하고는 하나,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자만 있다면, 이깟 장원 하나 쓸어버리는 것은 손쉬운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지금까지 대운상단이 그랬던 것처럼, 욕을 좀 얻어먹기는 하겠으나, 빼앗긴 이십만 냥은 물론, 그보다 더한 이권을 챙길 수 있는 일이니,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히죽.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게다가 당소혜는 함부로 건들 수는 없겠지만, 지금 이 장원에 있는 다른 여인들은 얼마든지 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벌써부터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우와…… 언니를 보고 침을 삼켰어요. 봤어요?”
“상기시키지 마렴. 역겨우니까.”
그녀들의 말처럼 육평우의 표정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곁에 있는 진자명의 그림자들 또한 인상을 찌푸릴 만큼, 그의 더러운 생각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나서지 않고 묵묵히 있는 것은 진소소가 어떤 꼴을 당하던 간에, 처리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끌고 오지 않고!”
드디어 육평우가 명령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신유강을 둘러쌌고 있었던 이들이 하나둘 거리를 좁혀 다가왔는데, 누구도 먼저 손을 쓰지 않고 힐끗힐끗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만큼 권룡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대단했던 것이다.
“웃기지도 않은 핑계로 사람 잡으려 하는 건 네놈의 형이나 네놈이나 똑같군.”
신유강은 곳곳으로 눈길을 주며 다가오는 자들을 바라봤다. 적호대보다 못한 수준인 이들은 자신의 발목조차 잡지 못할 것이다.
신유강은 천천히 기운을 끌어 올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지금 네놈은 큰 실수를 하는 거다.”
“이놈!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였느냐! 어디 죽어서도 그 입을 나불거릴 수 있나 보자!”
육평우의 한마디가 끝나자 눈치를 살피고 있던 대운상단의 무인 한 명이 재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신유강의 뒤에서 소리조차 내지 않고 빠르게 날아간 그것은 정확히 목을 꿰뚫을 듯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푸욱!
“커, 커컥!”
신유강을 향해 검을 내질렀던 남자의 목에 어느 순간 칼이 꽂혀 있었다. 죽어 가고 있는 남자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이해하려 하려는 듯, 힘겹게 눈을 돌렸다.
그의 옆에는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서 있었다.
무표정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사신의 눈빛과도 같았다.
털썩!
청랑의 검에 목숨을 잃은 남자가 쓰러지자, 다들 눈을 부릅떴다.
워낙 찰나의 순간이었고, 그들의 눈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손을 썼는지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겐 생각을 할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스릉!
진소소의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돌연 퍼퍽! 하는 육중한 울림과 함께, 육평초의 곁에 있던 무사 두 명이 쓰러졌다.
배에는 손바닥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
검탄(劍彈)이었다.
“뭐…….”
육평우는 지금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지 마른침을 삼켰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명의 무사들이 죽었다.
그러나 그것에 반응을 한 이가 아무도 없다.
이윽고 진소소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걸어온 싸움은 마다하지 않아요. 당신이야말로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리는 편이 좋을 겁니다.”
득의양양하게 웃는 진소소.
그 미소가 어찌나 섬뜩한지 육평초 등은 전신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청랑이 가장 먼저 몸을 날렸고, 뒤이어 흑영과 흑호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진소소가 검을 들고 한복판으로 뛰어들었고, 멀리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던 도우겸이 쌍검을 뽑아 들고 나섰다.
서거거거!
“커컥!”
“으아악!”
“싸, 쌍검…… 거걱!”
무관에 있어야 할 도우겸이 신유강의 장원에서 나타나자,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전장을 누비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귀였다.
춤을 추는 듯 아름다운 검기(劍技).
넋을 잃을 정도로 화려하나, 그의 검에 맺히는 핏방울은 섬뜩함을 일게 해 주었다.
서거걱!
장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투가 아니라 도륙이었다.
너무도 일방적인 싸움.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