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이번 일은 절대 좌시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만……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이지?”
“어머, 시치미를 떼는 것도 예전과 똑같군요. 그 더러운 성격이 변하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에요. 복수를 하는 맛이 있을 것 같으니까요.”
“하하, 네가 집을 나가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구나.”
진자명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가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자연스럽게 말이 나오는 것은 혈육이라는 그 특수한 관계라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진소소와 진자명 사이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냉기가 흘러 넘쳤다.
남매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살기가 요동쳤다.
주위에 있는 무관의 관도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다.
“다음에는 또 어떤 수작을 부릴까 벌써부터 궁금하네요. 하지만 생각이 있으시다면 육평우 같은 멍청한 사람을 보내지 말고, 직접 그 잘나신 다리로 찾아오시길 바라요.”
“…….”
“물론 찾아온다 해도 문전박대를 당할 테지만.”
“네년…….”
“설마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창피를 당하고 싶으신가요? 얼마든지 좋아요.”
진소소는 그리 말을 하며 슬쩍 검을 들어 올렸다.
명백한 도발.
그러나 진자명은 육평우처럼 생각이 없는 이가 아니었다. 그녀를 이긴다면 다행이겠지만 이 자리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동생보다 못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기 좋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이 자리에서 진소소가 한 말 때문에, 곳곳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들려왔다.
어린 시절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끼게 해 주는 말투였기 때문이다.
제갈가후는 어느 정도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쉬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현 팔대세가의 주축은 누가 뭐래도 하북진가다.
함부로 그곳의 치부에 대해 입을 열 만큼 그는 어리석지 않은 것이다.
무작정 생각 없이 쳐들어온 것 같은 모양새이지만, 진소소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생각 한 뒤에 행한 일이었다.
그녀는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과 진자명의 사이를 밝혔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했다.
그리고 육평우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권룡의 장원에서 있었던 일 뒤에 진자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하는 이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결국 진자명이 무언가를 꾸몄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것도 좋은 쪽이 아닌 나쁜 쪽으로 말이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자명이긴 하지만,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가 어떠한 계획을 실행한다 하여도, 모든 눈총이 그에게 집중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다음에 그 얼굴을 볼 때는 지금보다 더한 얼굴로 만들어 드리죠.”
진소소는 할 말을 마쳤는지 휙 하고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차가운지 한기가 몰아치는 듯했다.
진자명은 사라져 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험악하게 표정을 구겼다. 예전부터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다.
“빌어먹을!”
* * *
무관을 빠져나온 진소소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그 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선 그녀는 덜덜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 채 털썩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울화가 치밀었다.
하북진가에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어미를 잃었고, 항상 외롭게 지내던 그녀가 지금 유일하게 머물 장소를 찾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신유강과 함께 한평생 살아갈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모두 포기할 수도 있는 그녀였다.
처음 신유강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평온했던 나날들이 하나둘 떠오르자, 그녀는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그저 조용히 남들과 다르지 않게 살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어느새 하북진가라는 곳은 또다시 그녀의 안식처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진소소는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렀다.
조금의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게, 그 누구도 그녀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는 그렇게 숨죽여 오열했다.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어머니의 얼굴이 그립다.
기연고서점에서 몇 년 동안 함께 했던 석무자의 얼굴 또한 그립다. 그러나 지금 더욱 그리운 것은, 항상 그녀의 곁에 있어 준 신유강이었다.
당장 장원으로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으나, 진소소는 꾹 참아 냈다.
처음 고서점을 나왔을 때 무엇을 결심했던가?
누군가에게 어리광 부리지 말자.
오로지 그것 하나다.
더욱이 신유강은 책 한 권을 얻다가, 우연히 그녀를 떠맡게 된 인물이다.
물론 회귀신공이라는 힘으로 수차례 회귀를 하며 서로를 알게 되었다고는 했지만, 결국 그녀는 책과 함께 주어진 덤에 지나지 않는다.
기연고서점의 약속은 절대적이다.
인간인 이상 누구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석무자는 신유강에게 진소소의 인생을 맡겼고, 신유강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지만, 진소소의 모든 행동은 신유강을 위해서지 결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좋든 싫든 간에.
때문에 진소소는 가끔 투정을 부리긴 하지만, 결코 신유강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당소혜는 물론이며 청랑과 손약란 마저 내쫓고 싶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신유강이 그러한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하아…… 생각했더니 또 울적해지네.”
진소소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곤 한숨을 쉬었다.
신유강의 책값이 진소소를 맡는 것이라 한다면, 진소소의 책값은 자신의 인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인형이란 말이 더 알기 쉬울까?
책값을 지불할 능력조차 되지 않는 어린아이, 청랑과는 다르게 홀로 자립할 수도 없는 그러한 나이, 그 아이를 기르기 위해 석무자는 책값이라는 명목하에, 그녀의 인생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진소소는 결코 기연고서점에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
기연고서점이 사라지면서, 그것이 신유강에 넘어갔으니, 진소소는 좋든 싫든 신유강의 곁에 붙어 있어야만 한다.
석무자는 신유강에게 ‘맡아’ 달라 부탁을 했고, 그로 인해 석무자에게 인생으로 책값을 지불한 진소소의 소유권이 신유강에게 넘어간 것이다.
지금 신유강이 좋다. 아니, 사랑한다.
어쩌면 그런 감정 또한 그 제약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소소는 그것이 나쁘다 생각지 않았다.
실제로 즐겁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신유강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들뜬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하아.”
진소소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보냈다.
고요한 수면에 파문을 일게 만든 것은 진소소 자신이었다.
그녀가 조금만 조심했다면 제갈백헌이 그녀를 알아볼 리가 없었을 테고, 진자명의 귀에 이런저런 소리가 들어가지 않았을 테니, 장원에서 벌어진 살육 또한 없었을 것이다.
“정말 바보같이.”
진소소는 더욱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기에, 함부로 장원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여의치 않아 보인다. 때문인지 주저앉은 그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호, 이거 또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군.”
그때 어디선가 기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런 기척 때문에 놀란 진소소는 힐끗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두 명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부드럽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껄껄 웃음을 짓고 있는 것에 반해, 다른 이는 진소소의 얼굴을 확인하다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이런 곳에서 어린 아가씨가 어이하여 눈물을 짜고 있단 말이냐?”
“……신경 쓰지 마시고 가세요.”
“껄껄, 그리 말하지 말고, 이 노부에게도 알려 다오. 이래 봬도 인생 경험이 풍부하니 네 힘이 되어 줄지 또 누가 아느냐?”
“…….”
노부라는 말을 쓰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나이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겉모습은 고작해야 중년인에 지나지 않으니, 어마어마한 내공으로 그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 추측되었다.
진소소는 마른침을 삼키며 슬쩍 일어섰다.
그녀는 이러한 고수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석무자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런, 노부가 너를 놀래켰나 보구나. 하지만 안심해도 좋다. 딱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은 아니니, 껄껄.”
인자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을 하지만,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상대가 그 경지를 추측할 수 없는 고수라면 더욱 그러하다.
진소소는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중년인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했다.
“괜찮아요. 처음 보는 분에게 걱정을 끼쳐 드린 것 같아 죄송하네요.”
꾸벅 인사를 한 진소소는 당장이라도 벗어날 듯 빠르게 등을 돌렸다.
더 이상 중년인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 일체 망설임도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진소소의 걸음을 붙잡는 한마디가 들려왔다.
“허허, 그런가? 그럼 이 노부에게 한 가지 알려 주지 않겠나? 신유강이라는 아이의 장원이 어디인지 말이네.”
등을 돌려 재빨리 그곳을 벗어나려 했던 진소소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슬쩍 중년인을 바라봤다. 여전히 인자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으나, 왠지 모르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진소소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시죠?”
“으음? 그 녀석을 알고 있는 겐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묻는 중년인을 본 진소소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중년인이 그녀와 신유강이 아는 사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진소소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알고 있어요.”
“그것참 다행이로군.”
“아직 제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으셨어요.”
뾰족하기 짝이 없는 말투지만, 중년인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오히려 더욱 자애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눈을 빛낼 뿐이다.
“그렇지, 그 녀석의…… 할아비라 할까?”
진소소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말았다.
* * *
“…….”
신유강은 눈앞에 가만 서 있는 중년인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또한 또르르 눈알을 굴려 중년인 곁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는데, 얼굴은 확연하게 다르지만 틀림없이 익숙하기 그지없는 느낌이었다.
“유강? 내 말 듣고 있어요? 이분이 유강의 할아버님이 맞나요?”
장원으로 정체 모를 이들을 끌고 온 진소소는 혹여 자신이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닌지 불안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년인과 남자를 보는 순간, 굳어 버린 신유강의 표정을 보아하니, 결코 조부(祖父)와 같은 느낌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이곳에?”
신유강은 진소소의 말을 무시하며 얼떨떨한 표정을 입을 열었다.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가.
마교의 정점이자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현세에 재림한 천마대제(天魔大帝).
무관에 몰려 있는 무림맹 인사들이 떼로 몰려 덤벼들어도, 손짓 발 짓 한 번에 그들을 피떡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바로 마존 사마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