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흑호, 부탁이 있어요.”
“뭔 말인지 알 것 같다. 금방 갔다 올 테니 걱정 마라.”
진소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흑호의 몸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도우겸은 그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으나,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사실 신유강 또한 장원으로 쳐들어온 육평우를 죽이고 싶었을 터다.
그러나 그리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보는 눈이 너무 많다.
무공조차 익히지 못한 육평우를 죽이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천 장원에 처박혀 있는 그라면 자살로 위장시켜 죽이는 것은 우습지도 않을 것이다.
조금 독하다 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그 역시 스승에게 무림에 살다 보면 가끔 삭초제근만 한 방법이 없단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설마 이리도 빨리 그것을 행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때 진소소가 흑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운상단 쪽은 어찌할 생각인가요? 그쪽은 그냥 놔둘 건가요?”
“한 번이라면 몰라도 두 번이나 당했으니 갚아 주는 것이 도리지. 지금 장원에 있는 자금이라면 무너트리는 것 또한 쉬운 일이다. 조금 기다려 봐라. 곧 천하십대상단이 우리의 것이 될 테니까.”
씩 웃음을 짓는 흑영의 모습은 참으로 듬직하기 짝이 없다.
第八章. 하북진가(河北震家)
“……그럼 가 볼께.”
며칠 후, 충분히 마음을 추스른 손약란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기분이 좋았어야 할 사천 여행은 그녀에게 악몽이나 다름이 없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육평우와 맺었던 혼약이 깨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천하십대상단의 안주인이 된다면서 방정맞게 굴었던 손약란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물론 하남에 있는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떠올리니, 벌써부터 앞날이 막막하였지만, 어쨌든 나름 후련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래, 잘 지내고. 나중에 시간이 나면 꼭 들리도록 하지.”
“으응…….”
말은 그렇게 하나 신유강은 물론이고, 손약란 또한 두 번 다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아마 손약란은 더 이상 사천을 찾지 않을 테고, 만약 온다고 하여도 그때는 그녀의 곁에 그녀를 사랑해 줄 남자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신유강의 경우, 설령 하남으로 간다 하더라도 그녀가 있는 곳을 굳이 찾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에 붙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데다, 번거로운 짓을 하면서까지 손약란이나 혹은 손금운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테니까.
우연찮게 어딘가에서 만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으나, 그런 식의 만남이 아니라면 이 둘이 다시 얼굴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손약란과 신유강은 서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 잘 있어.”
이윽고 그녀가 등을 돌리며 신유강이 준비해 준 말을 타고 장원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던 신유강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장원으로 들어섰다.
“시원해요?”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쪼르르 다가 온 진소소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보였으나, 지금은 꽤 나아진 모습이다.
신유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시원하다 해야 할까? 아니면 으음…… 섭섭하다 해야 할까?”
“뭐예요? 그럼 남아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뾰족하기 짝이 없는 진소소의 말에 신유강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풉 하며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며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이지 이렇게 톡톡 튀는 매력을 지닌 그녀를 보고 있으면 다른 곳으로 눈이 돌아가지 않는다.
“하하, 그런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마. 그보다 마음은 좀 추슬렀어?”
“네에?”
갑작스런 신유강의 말에 진소소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치 그녀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는 사실을, 신유강이 알고 있었다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진소소는 곧 웃음을 지었다.
신유강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그녀가 그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것처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신유강도 그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하암, 어쨌든 이제 조금 조용해 졌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신유강은 꽤 피곤한 모습이다. 아마도 장원으로 마존이 들어오면서, 그를 상대하는 데 하루 반나절 이상 시간을 소비해야 하니 만큼, 심신(心身)이 피로해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워요. 마존이 우리 장원에 있다는 게…….”
진소소는 정파의 여식이기는 하나, 딱히 그러한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물론 처음 흑영과 흑호를 보았을 때에는, 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함께 몇 년을 함께 하다 보니, 마교인들 또한 정파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흑호의 걸쭉한 입은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하, 천하제일인이 장원에 있으니 듬직하기는 하지.”
“그건 그러네요. 하지만 천하제일인이라…… 그건 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기이한 진소소의 말에 신유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현 시점에서 마존보다 강한 이들은 무림에 존재하지 않으니, 그가 천하제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진소소는 마치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듯하지 않은가.
“다른 누가 있나?”
“예전에 말이에요. 엄청 대단한 사람이 있어요. 저를 구해 주신 분이기도 하고요. 으음, 20년 정도 지난 일이기는 한데…… 지금 무림맹주 또한 그 분에게 몇 수만에 졌죠.”
전혀 뜻밖에 소리가 들려오자 신유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칠제 중 한 명인 무림맹주를 꺾었단 말인가? 그것도 고작해야 몇 수만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듣기론 검후와도 깊은 사이였다던데…….”
진소소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기라도 하 듯, 초롱초롱 두 눈빛을 빛냈다. 그것은 마치 꿈에 그리던 영웅을 떠올리는 듯하다.
신유강은 아미를 찌푸렸다.
“껄껄, 나도 들은 적은 있지. 무황이라는 허황된 별호를 얻었던가?”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사마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나타나 무림을 휩쓸고는, 또다시 갑작스레 사라진 영웅이다.
고작 짧은 몇 개월 동안 그가 벌인 행보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한번 겨뤄 보고 싶긴 했는데, 아쉽게도 그때는 내가 폐관에 들어가 있었지. 대신 우리 부교주가 얻어맞았다지? 껄껄껄.”
“폐관이요?”
“당신이 폐관도 합니까?”
신유강과 진소소는 부교주가 얻어맞았다는 사실보다, 사마강이 폐관을 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운 듯했다.
물론 무공을 익히고 있는 사람이니, 더욱 강한 힘을 얻기 위해 폐관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사마강은 그러한 수준을 뛰어넘지 않았는가.
한창 기분 좋게 웃음을 짓고 있었던 사마강은, ‘당신’이라는 말에 아미를 찌푸렸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
“유강!”
“크흠, 조, 조부께서도 폐관을 하셨습니까?”
신유강은 다시금 말을 고쳤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마존 사마강은 신유강의 조부라는 이름으로 와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맞는 말투를 써 주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신유강은 꽤 내키지 않는다는 모습이었지만, 진소소마저 그를 닦달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 사형이 가끔 일거리를 꽤 많이 들고 올 때가 있어서 말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뒷방 늙은이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럴 때마다 간간이 폐관을 하곤 했지.”
“그, 그래요?”
진소소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강의 나이는 상당하다.
십 년 전 이라 해도 그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을 하기 싫어 폐관을 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참 아쉬웠어. 내가 그의 존재를 알았을 때에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지.”
“그런 무인이 있다는 건 처음 들었습니다.”
신유강은 새삼 강호라는 곳이 상당히 넓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중원의 무인 중 마존의 호승심을 끌어 낼 만큼 강한 자가 있었다니.
정말이지 놀랍기 그지없다.
“그런데 너는 그와 만난 것 같구나?”
“네, 우연히 말이죠.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굉장한 분이셨어요. 곁에는 지금의 검후님도 있으셨고.”
“검후라면 칠제를 말하는 것이겠지?”
진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 검후의 나이는 고작해야 삼십 중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제에 오른 그녀의 실력은, 화산파의 인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출신은 화산이다.
그러나 그녀의 기반은 무황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고작해야 삼십 대 중반의 나이인 그녀를 칠제에 오르게 만들었으니, 무황의 이름이 더욱 빛을 발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 그럼 어딜 가면 그 녀석을 만날 수 있느냐?”
사마강은 실실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당장이라도 무황이 있는 장소를 자백하라는 듯, 상당한 압박을 주면서 말이다.
진소소는 떨떠름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 몰라요, 저도.”
“정말로?”
“정말이에요. 헤어지고 난 뒤엔 전서구를 나눌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까요.”
무황과 함께 있던 것은 고작해야 수일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죽을 뻔한 상황에서 그에게 도움을 받았고, 한동안 함께 여행을 하긴 했지만, 결국 무황과 검후가 없는 상황에서 하북진가의 추격이 붙었기에 그녀는 결국 홀로 도주를 감행했다.
이후 산을 타다 길을 헤맸고, 우연히 기연고서점을 발견했다.
그러나 굳이 그러한 것을 입에 담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추억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분이 사라지지만 않았다면, 이무신(二武神)이라 불렸을지도 모르겠네요.”
진소소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하자, 사마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적수가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그러한 이야기를 하며 느긋하게 정원을 거닐었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대부분 사람들이 잠을 청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마존이 두려워 나오지 않는 것인지 주위는 고요했다.
기실 율초언이 어딘가에 숨어 있기는 하지만, 그를 신경을 쓰는 이는 이 장원에 단 한 사람도 없었다.
* * *
짝!
진자명의 고개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그의 앞에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표정의 남자가,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북부터 이곳까지, 사천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던 그는 당연히 육평우와 사천신가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알 수밖에 없었다.
“네 이놈! 하북진가를 이어받을 녀석이 어찌 그런 어이없는 짓을 벌인 것이냐?”
진자명의 생각대로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다른 형제들보다 진소소를 먼저 생각하고 있는 진명이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진자명이 그런 진소소를 죽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명의 목소리는 침착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소소를 아끼는 사람이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을 진자명은 어느 정도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욱 확연하게 다가오는 것은, 여전히 진명은 다른 형제들 보다 진소소를 더욱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