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그가 진자명을 죽이려 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마강이 손을 쓰지 않았다면, 진소소는 제 오라비를, 진명은 제 아들이 산산이 가루가 되어 흩뿌려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진명은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몸을 움직였다.
당소혜의 방에 처박힌 진자명을 업고 나오더니, 힐끗 시선을 돌리며 진소소를 바라봤다.
“다시 찾아오마.”
“…….”
진소소는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했다.
씁쓸한 아비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들끓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표현하지 않았고, 그저 무심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자네는…… 잠시 나를 따라오게.”
진자명을 업고 터벅터벅 장원 밖으로 나가던 진명은, 힐끗 시선을 돌려 신유강을 바라봤다. 단호한 그 눈빛 때문인지, 신유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른 이유는 묻지 않는다.
장원을 때려 부순 값을 치르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진자명을 죽이려 했던 것에 앙심을 품고, 또다시 손을 쓰려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뒤에서는 진소소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신유강은 그녀에게 웃음으로 화답을 해 줄 뿐이었다.
세 사람이 장원을 빠져나왔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특히 제갈백헌은 이 상황이 너무 난감했다.
진소소의 일은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장원 객실에서 보여 주었던 두 사람의 힘은 거의 동등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하백대고수라 이름을 얻은 권룡이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했었지만, 알고 보니 신유강은 백대고수가 아닌 십대고수 반열에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뒤이어 벌어진 공방을 확실히 하자면, 신유강은 어쩌면 하북진가의 가주인 진명보다 더욱 높은 경지에 올라가 있는 듯했다.
그리 많은 공방을 나누고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도 상당한 여유가 남아 있다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제갈백헌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용이다.’
단순히 후기지수들을 뛰어넘은 이들에게 주는 용이란 칭호가 아니라, 신유강은 진짜 용이었다. 모래알같이 많은 기인들이 살고 있는 이 강호에서 정말로 엄청난 용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 하북진가에 대한 일은 제갈백헌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조금 전 보았던 그 중년인 또한 범상치 않은 능력을 소유한 이였다. 적어도 칠제에 버금갈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진명이 그리 쉽게 물러서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신유강을 잡아야 한다.’
제갈백헌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이 가득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때 신유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서 가고 있던 제갈백헌이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곁에 서 있던 진명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제갈백헌은 진명의 서늘한 눈빛에 오싹함을 감추지 못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객잔일세. 이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객잔이지.”
진명은 여전히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을 할 수 없는 모습. 사람의 언동과 표정을 보며 심리를 읽어 내는 제갈백헌조차, 지금 진명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우리 객잔은 문을 닫았는데?”
사천에서 가장 유명한 객잔이라는 말에 신유강은 당당하게 기연객잔의 대해 말했다. 그러자 앞서 가고 있던 진명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신유강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시선을 돌리자, 진명이 업고 있던 진자명을 제갈백헌에게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자네는 자명이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도록 하게.”
“괜찮겠는가?”
제갈백헌은 슬쩍 신유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두 사람이 또다시 손을 섞을 것을 우려한 한마디였다. 그러나 진명이 대답 없이 계속해서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고, 제갈백헌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무척 궁금했다.
특히 진정한 신유강의 실력을 보았고, 그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무관으로 돌아가는 제갈백헌은 인상을 썼다.
신유강과 진명은 약 이각 정도 걸어 황룡객잔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하북진가의 무사들이, 진명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밖에서 서성이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들 대부분 진명이 모습을 드러내자 눈을 빛냈다.
“오셨습니까.”
날카롭기 그지없는 기세를 지닌 한 남자가 조용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하북진가의 뢰검대(雷劍隊)를 이끌고 있는 혁무중이라는 자였다.
아무런 기세조차 뿜지 않았으나, 틀림없이 고수의 면모를 보였다.
신유강은 그를 바라보다가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나같이 대답 없이 객잔으로 들어서는 진명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진명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유강과 손을 섞었던 탓에 옷은 여기저기 찢겨져 나가 있었고, 입가에는 피를 흘린 흔적이 역력했다.
누군가와 혈투를 벌였다는 것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진명이 졌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 듯했다.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생각대로 아직 승패는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쪽은?”
대답 없는 진명의 곁을 따라가며 혁무중이 묻자, 진명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권룡이란 이름을 아느냐?”
“현 중원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가주.”
“그렇지. 지금 네 옆에 있는 놈이 바로 그 권룡이다.”
혁무중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신유강을 바라봤다.
그가 보기에 신유강은 무공을 익힌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진소소와 관련된 인물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설마 권룡 본인일 줄이야.
혁무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이에 천하백대고수 반열에 오른 이다. 자연스레 질투라는 감정이 몰아쳤지만, 그보다 먼저 무인에 대한 동경이 피어올랐다.
아마도 십 년 안에 칠제에 버금가는 위치에 오를 것이다.
사십 년이 넘게 하북진가에 살며 무공을 익힌 그였지만, 저 정도로 빠른 성장을 하며 중원에 이름을 떨친 무인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뇌천대의 대주 혁무중이라 하오. 만나서 반갑소.”
“신유강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리지요.”
신유강은 나이가 많은 혁무중이 자신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 행동을 하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재빠르게 포권을 취했다.
말투 또한 상당히 공손하다.
마존에게 그렇소, 저렇소. 했던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신유강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는 것이었지만, 사마강이 본다면, 틀림없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어느새 안으로 들어선 진명은 이 층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신유강이 다급하게 쫓아가 앞에 앉자, 그제야 진명의 입이 열렸다.
“안주와 술을 가져오너라.”
“아, 알겠습니다.”
무엇을 가져오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 시간 점소이를 해 온 그 남자는 객잔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요리와 최고의 명주를 가지고 올 것이다.
상대는 하북진가의 가주.
그 정도는 나가야 황룡객잔의 체면이 선다.
“가주님, 아가씨는 어찌하시고……?”
자리에 앉지 못하고 진명의 옆에 서 있는 혁무중은 가장 궁금했던 그것을 물었다. 하북에서 이곳까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는 아가씨의 이름을 듣고, 밤잠을 설쳐 가면서 달려왔다. 그러나 진명의 곁에는 진소소가 없고, 신유강만 있었다.
“되었으니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거라. 내 나중에 따로 말을 해 주마.”
“명!”
혁무중은 진소소의 일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지만 더 이상 묻지는 못했다. 진명의 표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혁무중이 물러나자 주위를 고요하기 짝이 없다.
이미 황룡객잔 객방 전체를 하북진가가 빌린 데다, 진가의 가주가 머물고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탓이다.
괜히 밥 한 끼 거하게 먹기 위해 찾아왔다가, 자칫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누구 책임이란 말인가? 더욱이 철면뇌검(鐵面雷劍)이라 불리는 진명이다.
구파조차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하는 거물이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용한 객잔 안은 어느새 두 사람뿐이 없었다.
조용한 침묵이 한동안 흘렀고, 객잔 안을 서성이고 있는 점소이들만 죽을 맛이다.
약 일각여 정도 시간이 흐르자, 점소이가 휘황찬란한 음식과 술을 가지고 돌아왔다.
진명은 아무렇지 않게 점소이에게 은자 한 냥을 꺼내 주더니, 곧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것을 본 신유강이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치고받던 남자들끼리 술 한잔 마시며 울분이라도 풀자는 겁니까?”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술을 마시는 것은 응당 당연하다. 그러나 신유강은 진명의 기분이 좋지 않은 만큼, 진소소 또한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그녀의 곁에 있어 줘야 할 때, 고작해야 술 한잔 마시기 위해, 장원을 때려 부순 남자와 함께 있으니 내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진명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신유강의 잔에 술을 따랐다.
“마시게.”
말 한 마디와 함께 잔을 비운 진명의 모습을 본 신유강은 인상을 쓰면서도 빠르게 잔을 비우며 내려놨다.
동시에 또다시 진명의 손이 움직이며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뭐하자는 겁니까?”
“자네는 소소와 언제 만났나?”
“칠 년 전입니다.”
확실히 말을 하자면 오십 년은 더 된 일일 것이다.
“그때 소소는 어디에 있었나?”
“……산속에서 어떤 기인과 함께 살고 있더군요.”
기연고서점에 대한 것을 입에 담을 수 없으니, 신유강은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쉽게 납득할 말을 꺼냈다.
“산속, 산속이라……. 그렇군. 그래서 찾지를 못했던 것이야.”
씁쓸하기 짝이 없는 눈빛과 목소리로 말을 하는 진명의 모습에 신유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소소에게 듣기론 지독하게 무심한 아버지라 했다. 그래서 그가 아까 그렇게 막나갔던 것이다.
진명에게 진소소를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진명의 모습은 그러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진자명을 바라보고 있을 때보다, 진소소의 이야기를 할 때 더욱 감정을 드러냈다.
부모가 없는 신유강조차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나는 그 아이가 누구보다 강하게 컸으면 했네.”
쪼르르.
진명이 다시금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며, 그 당시에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유강 또한 술잔을 들이켰다.
“조금 전 그것도 그래서입니까?”
“자명이 놈 말이로군.”
진자명이 진소소를 향해 검을 뽑았을 당시를 말하는 것이다. 진명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을 쓰지 않았다.
신유강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자, 진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비슷하네. 나는 소소가 자명이보다 강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
“허울만 좋은 말이로군요.”
이번엔 신유강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만약 진소소가 약했다면 응당 손을 썼을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불상사라는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