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수준 차이가 나서 이기지 못하거나 경지의 차이가 나서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강호에선 통하지 않는다. 경험이 많은 무인일수록 살아남기 위해 비장의 한 수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종종 이류가 일류에게도 이길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
때문에 진명의 말은 개소리다.
신유강은 그리 판단했다.
아마 진명은 진소소가 진자명을 향해 손을 쓰는 것을 원했을 것이다. 차라리 독하게 손을 써서, 과거의 묵은 원한을 해결하고, 자신의 곁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자넨 은근히 눈치가 빠르군.”
“소소보다는 아닙니다.”
진소소 또한 그러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검을 뽑으려는 그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자리에서 진자명의 검에 맞을 각오를 했을 터였다.
중간에 신유강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피투성이가 된 것은 진자명이 아니라 진소소였을 것이다.
“그래, 자네는 소소와 무슨 사이인가?”
“하늘이 맺어 주어 만난 사이입니다.”
신유강의 말에 진명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무엇이 그리 웃긴 것인지, 곧 낮은 음성으로 웃음을 지었다.
신유강은 처음으로 진명의 웃음을 본 순간이다.
“더럽게 닭살 돋는 소리를 내뱉는군. 그런 말투로 소소를 꼬였는가?”
“진짜입니다만…….”
기연고서점은 그에게 하늘과도 같은 곳이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이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듣는 이에 따라서 닭살이 돋을 만도 했다.
신유강 또한 그리 생각을 하였는지 시뻘겋게 얼굴을 붉혔다. 술기운이 올라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라…… 닭살이 돋기는 하나 좋은 말이란 것은 틀림없지. 옛날 생각이 나는군. 나도 그 소리를 죽은 소소의 어미에게 한 적이 있었으니 말일세.”
“그,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언젠가 소소와 혼인을 하겠군?”
“그렇습니다만?”
신유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혼인이라는 말이 아직까지 확연하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사천 바닥에서 소문이 날 만큼 났으니, 언제 혼인을 해도 이상하지 않으나, 왠지 모르게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렇군……. 그럼 팽가와의 매듭은 자네가 풀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가?”
팽가라는 소리에 신유강이 인상을 썼다.
제갈백헌에게 들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북팽가의 장남과 혼인을 약속했다는 것 말입니까? 하지만 오래 된 일인 데다, 소소는 이미 진가를 나왔습니다.”
“그리 생각을 하는 것은 아마도 자네 혼자뿐일 걸세. 소소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말은 그리했으나 연을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 말이네.”
“……?”
“핏줄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네.”
진명은 비어 버린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식이었기에 신유강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명을 올려다봤다.
“하북으로 오게나. 소소의 일을 매듭짓기로 하지. 나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네.”
* * *
“그런 소리를 하더군.”
장원으로 돌아온 신유강은 마치 제 어미에게 고자질을 하는 것처럼 미주알고주알 진소소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부서진 장원을 수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들어온 탓인지 장원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진소소는 고요한 표정으로 신유강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진소소는 한숨을 쉬었다.
하북팽가 장남의 얼굴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애초에 나이 차이도 상당했으니 만큼,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들었던 탓이다. 물론 하북팽가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 여겼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하북팽가라…… 그러고 보니 그런 가문이 있었지.”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사마강은 무언가를 떠올리듯 웃었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가문을 떠올리는 것처럼 오만하기 짝이 없는 미소다.
“하북팽가면 상당히 유명한데, 설마 모르셨습니까?”
“이 중원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곳은 몇 곳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소림과 무당, 그리고 화산 정도지.”
팔대세가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모습이다.
하긴 그의 능력이라면 응당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하북으로 갈 생각이더냐?”
사마강의 눈빛은 진소소와 신유강에게 가 있었다.
물론 묻지 않아도 대답은 안다.
신유강은 진명과 약속을 하였고, 또한 진소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뛰어들 남자다. 당연히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물론 올라갑니다.”
“그냥 조용히……. 이곳에 있어도 괜찮아요. 굳이 유강이 나설 필요도 없고…… 저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되니까요.”
진소소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북진가로 돌아간다는 것이 꽤 불안한 모습이다. 또한 하북팽가까지 상대를 해야 하니, 더욱 위험한 여정이 될 것은 자명하다.
그러한 짐을 신유강에게 떠맡기기 싫은 눈치였다.
“아니, 움직일 수밖에 없어. 난 네 아버지와 약속을 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곳은 네 집이야.”
“…….”
진소소는 더욱 떨떠름한 모습이다.
하북진가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작은 편린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하북에는…….
“그리고 하북에는 소소의 어머니도 계시지? 응당 찾아뵈어야 하지 않겠어?”
그녀의 어머니가 묻힌 곳은 하북에 있었다.
그 마음을 헤아린 신유강이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진소소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는 듯하다.
“소소가 좋든 싫든, 이번 일은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 해. 그렇지 않다면 둘 중 하나가 사라지던가.”
신유강의 눈빛이 순간 매섭게 일렁였다.
하북진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진소소에게 나쁜 일이라도 생겼다간, 진가든 팽가든 결코 가만히 놔둘 것 같지 않은 모습이다.
사마강은 그런 신유강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지.’
이거였다.
강호라는 곳은 한 번 발을 들이면 쉬이 빠져나올 수 있는 곳이 결코 아니다.
때문에 힘이 없어 죽든지 아니면 그 속에서 살아남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신유강은 살기로 결정을 했고, 그 투지가 눈에 보였다.
마치, 과거의 현선자를 보는 듯했다.
사마강은 전율을 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더욱더 강해져라.’
신유강이 높고 더 높은 곳까지 올라오길 바랐다. 그는 천애절벽으로 신유강을 몇 번이고 밀어 떨어트려 줄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더욱더 힘차게 올라오길 바랐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이곳까지 말이다.
“그럼 이 노부는 집을 지키고 있으면 되느냐?”
“따라오실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겠지요?”
“으음, 부탁을 한다면 따라가 줄 수도 있다만.”
“천하의 마존을 데리고 하북까지 갔다간 저는 권룡이 아니라 권마(拳魔)라는 별호를 얻을 테고, 무림공적이 되는 건 순식간일 겁니다.”
그 말에 사마강은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거 나름대로 흥미가 돋는 말이로군. 하나, 걱정하지 말거라. 이 몸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은 전대 칠제 정도뿐이니.”
사마강이 활동을 할 당시에 그를 만난 것은 다름 아닌 칠제 정도였다.
위치가 위치이니, 그 정도 무력을 지니지 않는다면 얼굴조차 구경하기 힘든 이라는 것이다.
“됐습니다.”
“그래요, 할아버지께선 이곳을 지키고 있는 편이 좋겠어요.”
진소소마저 그리 말을 하고 나오니, 사마강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유강을 대할 때와는 천지차이의 반응이다.
“출발은 언제죠?”
“지금 당장 갈 것은 아니고, 객잔과 장원 수리가 끝나면 그때나 움직일 생각이야.”
진소소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과 장원을 흑영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긴 하지만, 완벽한 모습을 두 눈에 새기고 가지 않으면 괜스레 불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출발은 보름 뒤로 하죠.”
* * *
어두운 밤.
모든 등불이 꺼져 있는 그곳에 마존 사마강은 홀로 나와 유유히 산책을 했다. 율초언이 그의 옆을 따르고 있으나, 어떠한 말조차 하지 않았다.
“좋은 달이로구나.”
하늘에 떠 있는 달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 만큼 아름다웠다.
만월(滿月), 그것은 선명하고 사람의 시선을 빼앗는 빛을 뿜고 있었다.
“오늘 보았던 그 녀석은 어떠하더냐?”
마존 사마강은 물었다.
아마도 진명과 신유강의 싸움을 본 감상을 묻는 것일터다.
“저와 수련을 할 때보다 한층 더 위로 올라선 느낌입니다. 설마 철면뇌검을 상대로 그 정도까지 해낼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한 감상평이기는 하나, 마존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신유강이 가지고 있는 현선자의 무공이라면 능히 그 정도 수준은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약하다.
회천공을 사용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일지 알 수는 없었다.
“하북의 수준은 어떠한지 아느냐?”
“두말할 필요 없이 현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 만큼 대단한 수준입니다. 하북진가는 물론이고 하북팽가 또한 말입니다.”
“그렇군…… 하나 그 정도 자극으론 녀석에겐 도움이 되지 않아.”
보지 않아도 안다.
신유강은 현선자의 무공으로 압도적인 신위를 보여 줄 터,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마강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 더 신유강의 힘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
‘무엇이 있을까?’
물론 한 가지 있기는 했다.
무엇보다 빠르고 간편하며 확실하게 신유강의 독기를 불러일으킬 만한 방법이 말이다.
바로 이 장원은 물론이며 사천당가와 당소혜, 그리고 신유강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진소소를 죽이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틀림없이 마존에 대한 원한으로 신유강은 미쳐 버릴 것이다. 그것으로 사상 최악, 최강의 강적이 탄생할 수도 있을 터다.
그러나 마존은 그 정도까지 독한 수를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는 것은 천천히 괴롭히는 맛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천무황성을 움직일 수 있겠느냐?”
“……그곳을 말입니까?”
천무황성이라는 말에 율초언은 표정을 굳혔다.
서장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절대적 무력 단체.
기본적으로 마교와 비슷한 곳이기는 하나, 그 숨은 힘은 마교를 뛰어넘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이 조용히 물러나 있는 이유는, 바로 눈앞에 있는 존재 천마존 사마강 때문이었다.
“하북에 있는 천무황성 지부를 모조리 박살 내라. 물론…….”
“존명!”
율초언은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듯, 머리를 숙이며 대답을 했다. 어느새 그의 모습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틀림없이 하북진가와 하북팽가가 그런 것으로 꾸미라는 명일 터였다. 잠자는 호랑이만큼 세상에 두려운 존재는 없다.
현재의 천무황성이 그런 존재다.
빠르게 하북으로 향하고 있는 율초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아마도 이번 일을 계기로 무림은 한 차례 크게 진동을 하게 될 것이다.
어느새 율초언의 주위로 수십 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율초언이 마존과 함께 마교를 나간다는 말을 듣고, 적호대에서 나와 둘의 뒤를 따른, 과거 적호대원 오십 인이었다.
“하북으로 간다.”
“명!”